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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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 칼럼] 이목 선생님 이야기


교사 노릇하고 월급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려 하는가?

교육에 대해 말을 한다. 알아듣게 말을 한다. 그 말에 세상이 묻어있다. 그게 사람 노릇 하고 사는 모양새 이다. 사람 노릇이 교사 노릇 보다 먼저이고 그리고 끝이다. 지위를 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위를 내려놓고 누구에게나 통하는 말을 해보라고, 선생님은 간곡하게 당부한다.

선생님의 말은 문장이다. 
‘신기해, 컴퓨터를 배우고 있지. 이미 배웠던 것을 다시 들추어 새로 배우기도 하지. 예전에 배운 것은 붓글씨였는데 요새는 서예라고 하데, 서예를 배워. 같은 것인데 이름을 달리하니, 같은 것이 다른 것이 돼, 놀랍데.’

새로운 것을 배우고, 전에 이미 배운 옛 것을 새로 배운다. 배움에 들떠 있는 당신의 일상을 놀라움으로 뒤돌아본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지.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국가를 가르치라고 해. 애국은 당시 한국인에게 시대정신이기에 더욱 힘들여 국가를 잘 가르치려고 했지. 그런데 국가가 반공이야. 반공을 맹목적으로 가르치라고 해. 왜 맹목적일까? 그들이 내세우는 국가에 아이들도 들어있지 않고 민족도 들어있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아. 반공과 맹목이 교육의 목적이 되고 교육의 과정이 되었지. 아무튼 반공도 애국도 아이들에게 이해와 지식이 되게 가르치려고 애쓰는 것이 가르치는 자의 도리 아닌가. 일본 군국주의가 하는 짓과 별로 다르지 않았고. 진정으로 열심히 반공도 애국도 아이들의 것이 되게 가르치고 싶었지.’

‘위해서’ 주의자들
교육 ‘속에’ 있어야 하는 아이들을, 교육 밖으로 끌어내 특정 세력의 욕망 실현에 동원하는 모양새이다. 소수가 다수를 관리하는 역사사회에서, 그런 모양새는 마치 불변의 가치인양  굳어 있다. 교육의 동력을, 당대 젊은 세대의 필요와 요구에서 끌어내지 않고 저들의 사람 관리술에서 찾아낸다. 저들은 아이들과 학교에 교육목표를 부과하고 목표 관철을 위해 교육과정을 자의적으로 조작한다. 부과한 교육목표는 ‘위해서’ 어법으로 진술되고, 그 어법을 사용하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절제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정은 안중에 없고 성과에 집착한다. ‘위해서 주의’가 교육의 철학으로 자리 잡는다. 그것이 잘 사는 길이라고, 가진 자도 못가진 자도 아이들을 다구친다. 저들의 사람관리 욕망이 교육의 목적으로 둔갑하여 정당화 되어버렸다.

교육은 ‘오늘’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인데 그런데 교육을 내일의 문제라고 혹은 어제의 문제라고, 교사들끼리 노선 투쟁한다.

‘전교조는 60년 교원노조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해. 아이들에게 돌아가자는 선언을 보면 같고, 그런데 서울이 중심인 것을 보면 달라. 그 때는 지역이 제각기 중심인데 지금은 서울만 중심이야. 중심이 서울이라고 해서 안 될 것도 없지만 내가 보기에 서울은 이미 교육 밖의 욕망을 대표하는 세력이 된 것 같아. 오늘 우리 교육은 삶의 터를 가꾸는 사람들의 문제, 그 문제의 현안과 근본을 살펴야지. 전교조에 노선 싸움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노선 싸움은 내일의 설계를 두고 하는 싸움이지. 그 싸움을 누가 좋아하고 누구에게 이득이 될까. 취할 것이 많은 서울의 싸움이지. 삶의 터를 가꾸는 사람들의 정서를 잃은 자들의 이데올로기 놀음이지. 위해서, 위해서, 입에 달고 살아. 그래도 전교조가 있어서 안심이 돼. 적어 둘 것도 많아. 그게 글감이 돼. 참 좋아.’

이목(91)
이목(91)
61년 5월 18일 군부에 의해 구금, 특수 반국가 행위 10년 징역형 선고, 5년 감옥살이, 그 난감한 처지에도 그 때나 지금 선생님은 경쾌한 몸과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맹목을 강요하는 시대에 문제를 가진 생애를 살고 있다.

선생님의 말에는 언제나 선생님이 들어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랬으면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고백도 있다. 
당신의 삶은 아픔이고 그 아픔이 당신 말의 구조이다. 그 아픔을 드러내는 문법이 있다. 그 문법은 고발과 선언이다. 선생님의 말은 그래서 문장이다.


아이들, 배움, 놀람, 아픔, 선생님의 삶을 설명하는 키워드이다. 그 키워드는 뿌리내린 삶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흔들리지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다. 다들 떠나는데 홀로 거기에 남는다. 더디 간다. 그 삶은 전설 같은 이야기로 남는다. 선생님의 삶은 정보이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선생님은 굽은 나무가 되었다. 선생님이 지키는 선산은 대구이고 교육이다. 대구가 변방이 되고 교육이 전술 같은 것으로 변모했지만, 그래도 변방이 된 선산을 지킨다. 
 
가르치는 자에게 맹목의 길을 강요하는 교육 밖의 세력과 교육 안의 세력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가려내는 눈빛이 있기에 선생님은 여전히 글을 쓴다.

선생님의 글을 안내하는 序를 쓰고 있다. 아흔을 넘기신 선생님이 당신의 책에 序를 쓰라고 부탁한다. ‘예’라고 하지만 그 순간부터 내내 무엇을 어떻게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선생님을 알고 그리고 조금이라도 내 편을 들어주는 분이라면, 틀림없이 나의 난감한 처지를 이해할 것이다.

선생님 책의 序가 될 수 있을지, 우선 평화뉴스에 묻기 위해 미리 序를 싣는다. 많은 분들이 음미하고, ‘이정도면 됐다.’고 대답해 주기를 기다린다.






[김민남 칼럼 24]
김민남 / 교육학자. 경북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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