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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골의 물빛
[김윤곤 칼럼1] 10월항쟁의 진실, 대구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재인식
2014년 08월 04일 (월) 15:06:12 평화뉴스 pnnews@pn.or.kr

그해 여름이 갔다. 가을도 갔다. 다시 겨울과 봄이 지났지만 댐물은 여전히 싯누랬다. 태풍이 쓸고 간 지 아홉 달이 됐는데도 물빛은 불길한 전조처럼 탁하고 무거웠다. 태풍에 큰물 황톳물이야 거의 해마다 나는 일이지만 왜 달이, 해가 바뀌도록 황톳물이 가라앉지 않는지 전문가들도 일치된 원인이나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댐으로 흘러드는 계곡물은 태풍 며칠 만에 맑아졌지만 댐물은 아홉 달이 되도록 황톳물 그대로였다.

가창댐은 작지만 대구지역 상수원 중에서 물이 가장 맑다고 소문난 곳이었다. 그래서 황톳물로 뒤집힌 댐물에 대한 안타까움은 더했다. 탁해진 물을 정수하려고 염소 같은 처리제를 많이 넣는다는 소문도 돌았다. 한동안 상수원을 폐쇄하기도 했다. 대구시민들은 그동안 가장 맑은 상수원 하나를 잃었다.

작은 댐 하나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을 잃은 듯 허전했다. 어쩌면 예전의 맑고 푸른 댐의 물빛을 영영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웬만한 곳마다 전원주택이니 펜션이니 방갈로니 짓는다고 온통 들쑤신 옛이름 포산이던 비슬산이 동티난 것이라는 생각에 박혔다. 싯누런 가창댐물 옆을 지날 때마다 불편했고 두려웠다. 물의 완강한 탁도는 산그늘 고요히 내리던 물의 분노였을까.

싯누런 물의 탁도는 물의 분노

그러고는 오랫동안 한두 주마다 가창댐 찾던 일을 그만뒀다. 그래서 얼마나 더 오래 가창댐물이 황톳빛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식수원 하나가 황톳물이 돼 망가졌는데도 막상 그 물을 먹던 사람들은 먼 일인 듯 대수롭잖게 여겼다. 지역 언론도 더 이상 댐의 물빛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10년 전 가창댐 물빛이 더욱 잊히지 않는지도 모른다.

최고기온 경산 39.9도, 대구 38.6도였다는 지난 7월 31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 가창골 희생자 64주기 위령제>라는 긴 이름의 행사가 가창댐 수변공원에서 열렸다. 행사장 부근에서 오랜만에 댐물을 들여다보며 10년 전 물빛을 떠올렸다. 댐물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이전처럼 맑아 보였다. 가뭄에다 계속된 불볕더위 탓이었을까. 설핏 물비린내가 끼친다.

저 물비린내가 피비린내였던 때가 있었다. 1946년 10월부터 한국전쟁 초기까지. 이 3~4년의 은폐된 역사는 지워져 처참하고, 처참해 지워진 역사다. ‘1946년 10월 대구’는 폭동이라고 폄하되다가 2006년 무렵부터 10월항쟁이라 불리기 시작한 시공간이었다. 해방의 기쁨과 자유 만세를 누려야 할 시기에 유혈의 항거와 진압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 항쟁은 학살의 타겟이 됐다.

가창골에 묻힌 2,500~8,000명 피학살자

4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최상층의 지시에 의해 10월항쟁 관련자를 비롯한 제주4·3항쟁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전국보도연맹원, 예비검속자 등 대구형무소 수감자 2,574명이 이곳 가창골과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집단 학살됐다. 1980년대 댐 증축 과정에서 굴착작업을 하던 기사는 파내도 파내도 유골이 계속 나오자 더 이상 일할 수가 없다며 도망갈 정도였다. 10월항쟁유족회는 이 시기 가창골에서 8,000여 명이 학살됐다고 믿고 있다.

해방된 나라에서 벌어진 유혈의 비극은 이후 벌어질 한국 현대사의 앞날을 예고한다. 1945년 쌀 수확량은 216만7,000t으로 1940~1944년 평균 200만7,600t보다 크게 늘었지만 심각한 쌀 부족사태가 벌어졌다. 해방 후 미군정 3년간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하지는 이 시기 쌀이 부족한 이유 일곱 가지를 제시했다.

1. 한국 농민은 자가 소비용으로 쌀을 저장해두고 있다.
2. 대체식량이 되는 곡물을 주로 북한에서 들여오는데 지금은 손에 넣을 수 없다.
3. 한국 농민은 인플레이션을 염려해 수확을 현금화하기를 꺼리고 있다.
4. 약간의 쌀은 가격상승을 예상하여 가지고 있다.
5. 한국인 대부분은 쌀이 일본으로 밀수출되는 것을 우려하여 내놓지 않는다.
6. 적절한 쌀 유통을 위해 필요한 운송수단이 부족하다.
7. (해방으로) 북한 및 외국에서 돌아온 전재민 동포들로 인해 쌀 소비량이 늘고 있다.

결국 한국 농민이 여러 가지 명목으로 쌀을 숨겨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아사태의 진짜 원인은 미군정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쌀 부족의 근본원인을 감추고 있었다. 근본원인은 미군정이 실시한 자유시장제도의 실패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쌀 수확량의 최소 절반(약 100만t) 이상이 일본으로 강제 반출됐고, 나머지 중 일부는 북한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1945년 9월 이후에는 미군정의 쌀 일본 수출 금지로 수확량 전량이 남한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두 달이 지나기도 전에 쌀 절대량이 부족해 아사자까지 나온 것은 미군정이 쌀 유통 통제정책을 전면 철폐함으로써 한국에서 일본으로 쌀 밀수출이 성행했고,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진 탓이었다. 1946년에 접어들자 쌀은 더 이상 공정가격으로 거래되지 않고 폭등했다. 1월에 쌀 1가마당 공정가격은 730환이었으나 암시세는 1,160환이었다. 암시세는 이후 60배까지 폭등했다.

언론과 정당들은 “물가통제 정책을 시행하고 정상모리배의 매점매석을 강력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쌀 밀수출과 매점매석을 일삼는 큰손에 철퇴를 내리는 대신 미군정 법령 5호를 발표해 미군정 관리가 농민으로부터 쌀을 강제로 징수하는 공출제도를 시행했고, 쌀을 재료로 하는 막걸리, 떡 등의 제조를 금지했다. 그럼에도 기아사태는 계속됐고 급기야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없었던 하곡(보리) 강제수매제도까지 시행했다. 공출을 담당하는 미군 관리의 잔혹한 처사에 대한 분노도 커져갔다.

해방자 미국에 대한 환상은 이미 앞서 깨졌다. 미군정은 식민 치하에서 민중과 독립지사를 괴롭히고 투옥하고 죽이기까지 한 친일경찰과 형사, 친일부역자들을 재등용함으로써 해방된 나라에서 민중과 독립지사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다. 더욱이 미군정은 남한의 모든 정치활동을 철저히 통제하면서 해방자가 아니라 이름만 바꾼 또 다른 압제자의 맨얼굴을 드러냈다. 여기에 1946년 여름에 고전형 콜레라(호열자)가 창궐하여 사망자가 속출해 민중의 불안과 불만은 더욱 높아갔다. 

굶어죽느니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

해방된 나라에서 악질 부역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차지하여 떵떵거리고, 농지개혁은 미뤄지고 쌀은 구경조차 못해 청송과 같은 산간지역에서는 아사자가 나왔다. 귀환동포들의 절망은 더욱 컸다. 콜레라까지 번져 시신이 길거리에 널렸으며, 자유로운 정치활동마저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저항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해방된 백성으로서 저항하지 않는 민중은 죽은 민중이다.

9월 총파업이 서울에서는 무력으로 진압됐고 부산에서는 흐지부지됐다. 그러나 친일 부역자들의 식량 강제매입, 매점매석이 가장 심했던 대구‧경북에서는 항쟁의 국면으로 이어졌다. 10월 1일 부녀자들이 배가 고파 쌀을 달라고 외치며 시청으로 몰려가는 기아데모가 벌어졌다. 경찰이 공포를 쏘며 위협하자 흥분한 시위대는 공포를 발사한 경찰을 구타했고, 대구역전에서는 동맹파업으로 수천 명이 모였다. 이를 강제 해산하려는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1명이 사망하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됐다.

격앙한 시위대는 이튿날 대구경찰서를 점거했고 경찰의 집중 발포로 양측에서 20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일제 고등계 형사, 반민족행위자들이 그대로 자리를 꿰차고 악행을 일삼던 경찰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컸다. 대구 곳곳에서 경찰서 공격이 이어졌다. 항쟁은 대구는 물론 인근 경산, 성주, 영천 지역으로 확산됐다. 미군정의 반민주적 반민중적 행태에 저항해 맞부딪힌 최초의 유혈항쟁이었다. 이것이 10월항쟁이다.

항쟁에 관련돼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이들은 앞에서 밝혔듯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집단 학살됐다. 그것은 우발적인 집단 학살이 아니라 적색분자를 모조리 제거하려는 박멸 계획이었다. 남과 북이 좌와 우로 갈려 이념갈등을 겪기 이전 미군정에 의해 탄압당한 이들은 전쟁의 와중에 국가 권력에 의해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다.

대구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재인식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곧 독립운동의 유력한 방편이었다. 대구와 경북은 그러한 독립운동의 유력한 한 중심이었다. 그러나 소련과의 대결정책 과정에서 전범국가 일본이 아니라 애꿎은 한반도를 분할한 미국은 남한을 사실상 점령했고 민중의 자주적인 통일운동을 철저히 금지함으로써 분단을 고착시켰다. 특히 한국의 모스크바라고 불렸던 대구지역 독립투사,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철저한 탄압은 대구를 오늘 보수의 아성으로 만드는 단초가 됐다.

10월항쟁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들의 원혼을 풀어 명예를 회복하는 일은 단순한 과거사 정리의 차원이 아니라, 대구의 정체성과 정치적 상상력, 위기를 돌파하는 민중의 에너지를 회복하는 근본적인 자기 성찰과 재인식의 문제다. 해결해야 할 일은 첩첩이다.

나의 눈에는 아직도 그해 여름의 싯누런 황톳물이 댐에 출렁거린다. 그러나 숱한 세월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낸 유가족과 지워진 역사의 행간을 메워줄 또렷한 증언들이 살아 있는 한, 연유를 알 수 없는 황톳물 같은 전조들은 잦아들 것이다. 가창골 골골이 묻힌 원혼들의 한이 풀리는 날, 동티난 비슬산도 무거운 짐을 벗고 편안히 잠들 것이다.

   




[김윤곤 칼럼 1]
김윤곤 / 시인. 언론인
한국작가회의 회원. <엠플러스한국> 편집장. 전 영남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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