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19.10.16 수 14:59
> 뉴스 > 지역사회
   
오늘도 신천을 건너..."걷고 걸으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요"
한겨울 찬 바람에 취업과 가족을...일터에서 학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
2016년 01월 05일 (화) 16:54:34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pnnews@pn.or.kr

새해가 나흘 지난 4일 오후 3시 30분. 대구 도심을 가로지르는 강줄기 신천의 20개 다리 중 상류에서 10번째 다리인 동신교(중구 동인동). 겨울답지 않게 따뜻한 날씨라고 하지만 강바람이 부는 신천 일대에는 두꺼운 점퍼와 목도리, 마스크로 몸을 꽁꽁 싸맨 이들이 각자의 이유로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대구 동쪽의 대구MBC와 청구네거리에서 중구청과 동성로를 잇는 동신교는 수성구 수성동과 동구 신천동, 중구 동인동까지 3개의 구(區)가 맞닿은 곳이다.

   
▲ 수성교를 건너는 사람들(2016.1.4)/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신천동 방면으로 다리를 건너던 장창식(28.가명)씨는 지역 4년제 사립대를 졸업하고 2년째 취업을 준비하는 '취준생'이다. 자격증과 토익 점수를 위해 매일 아침 8시 동신교를 건너 동성로에 있는 학원 2개를 다닌다. 이날도 문제집이 가득 든 백팩을 메고 안경을 낀 채 학원을 갔다. 보통 수업을 듣고 자습을 하면 저녁 7시가 넘어 집에 온다. 학원 친구들끼리 '회사원'이라며 자조적 농담을 한다.

이날은 달랐다. 장씨는 3시간 빨리 학원에서 나와 동신교를 건너 집으로 향했다. 같이 공부하던 후배녀석이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축하는 해줬지만 속이 쓰렸다. 자신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 집안에서도 조심조심 다니는 부모님을 떠올리니 더욱 면목이 없었다.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 세대가. 남들 밟고 올라가야 돼고. 다 고스펙이니 뒤질 수 없어 대학 나오고 또 학원다니고...." 장씨는 답답한지 점퍼를 열어 바람을 마셨다. "동생이 합격했다는데 축하해줄 수만은 없더라구요. 내가 못난 것 같고. 아예 짐싸서 나왔어요. 그래도 강을 보니까 좀 시원하네요. 집에 일찍 가도 할 게 없는데...오늘 공부는 아예 쨀려구요"라고며 웃었다. 다리 끝에 선 장씨는 "기사에 너무 우울하게 쓰지 마세요. 내일 또 다리 건너 공부하러 가니까"라고 말하며 집으로 향했다.

   
▲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동신교를 건너는 윤주(2016.1.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방학에도 학원을 다니기 위해 다리를 건너는 아이들(2016.1.4.동신교)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청년이 떠난 다리 위로 방학 중 학원을 다니는 중·고등학생들이 수업이 끝났는지 삼삼오오 나타났다. 다리 위를 지나는 자동차 소음 사이로 앳된 웃음소리들이 뒤섞였다. 오후 5시 성명여자중학교에 다니는 임윤주(15.가명)양은 수성구에서 친구와 학원을 마치고 동신교를 건너 중구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비슷한 키와 머리모양을 가진 친구와 수다를 떠느라 다른 사람이 다가가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났다.

중3이 되는 윤주는 고교입시를 위해 가장 약한 과목인 수학 학원을 다닌다. "올해는 무조건 공부해야 돼요. 안 그럼 고등학교 못가요"라며 "집에 가면 엄마가 폰도 압수해요. 그래서 친구랑 다리 건널 때 제일 많이 놀아요. 건너면 이 길부터 혼자가야 돼요"라고 말하며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뛰어갔다.

   
▲ 수성교를 건너는 청년들(2016.1.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오후 5시 30분 박희순(56)씨는 양지 국거리가 든 봉지를 들고 동신교에 올랐다. 임용고시 준비를 하는 딸을 위해 퇴근길에 마트에 들렀다. 출판도매업을 하는 박씨는 동신교 근처 아파트에 살면서 30년째 이 다리를 건너 출·퇴근을 한다. 매년 매출이 떨어져 장사를 접어야 하나 고민하는 박씨는 종이책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어 죽기 살기로 하고 있다. 다리 끝에 이르러 박씨에게 '왜 다리를 걷는냐'고 물었다. "글쎄요. 삶을 위해 건너죠. 걷고 또 걸으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요"라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저녁 6시. 수성교에서도 다리를 건너는 이들의 발걸음은 계속됐다. 임현주(29)씨는 수성구 A학원에서 석달째 비정규직 강사로 일하고 있다. 이날 임씨는 퇴근 후 동성로에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 임씨는 대학 졸업 후 2년간 학원 강사로 일했다. 급여 문제로 최근 규모가 큰 학원으로 이직했다. 그러나 업무만 늘고 월급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액수는 말하기 그렇구요. 죽지 않을만큼 벌어요. 올해는 월급이 팍팍 올라 친구들 맛있는 것도 사주고 부모님께 용돈도 턱턱 드리고 싶어요"라고 소망했다.

   
▲ 수성교를 건너며 신천을 바라보는 임현주씨(2016.1.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퇴근하는 이들은 종종 걸음으로 다리를 건너 모습을 감췄다. 송우식(37.가명)씨는 마스크를 끼고 깁스를 한 다리로 수성교를 건넜다.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송씨는 "일하다 다쳤는데 크게 사고 난 건 아니고 해서 출근했다가 이제 퇴근하는 길"이라며 "한의원가서 침 좀 맞고 쉴려고 한다. 내일 또 출근해야 돼서 길게 말 못한다. 미안하다"고 씁쓸하게 말하며 뚜벅뚜벅 다리를 건넜다.

저녁 7시. 해가 지자 어둠이 내렸다. 바람은 매서워졌다. 퇴근 차량이 빚어낸 불빛이 다리를 채웠다.

대백프라자 앞 대봉교. 사람들의 발걸음은 점차 뜸해졌다. 다리를 건너는 이들보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드문 드문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은 옷깃을 세우거나 모자를 쓰고 입을 여는 것을 꺼려했다. 그 사이로 갓난아이를 업은 한 젊은 여성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 딸 아이를 안고 퇴근하는 김경미씨(2016.1.4.대봉교)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김경미(34.가명)씨는 태어난지 8개월된 딸을 앞으로 안고 있었다. 두 손에는 자신의 가방과 아기 용품이 든 가방, 종이백 등을 들었다. 어린이집에서 강사로 일하는 김씨는 자신의 아이를 여동생에게 맡기고 석달째 출·퇴근을 하고 있다. 저녁이 되면 아이를 받아 안고 이렇게 다리를 건너 집으로 향한다. 남편은 북구에서 출·퇴근을 한다. 오늘은 야간 근무를 해 혼자 아이를 돌봐야 한다.

"미안한데 지금 진이 빠져서 대답하기 곤란해요" 김씨는 다리 중반도 못가 한 번 쉬고 아이를 다시 들쳐 안고를 반복하며 길을 갔다. "애기 보면 힘이 나는데 또 몸은 힘들어서 조금 지쳐요. 다 힘들죠? 그래도 이 다리 건너면 집이니까 힘을 내야죠. 수고해요" 아이와 엄마는 무사히 다리를 건넜다.

   
▲ 24시간 근무 후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전현자씨(2016.1.4.대봉교)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인적은 더 드물어졌다. 바람도 더 차가워졌다. 달이 뜬 밤. 아직 다리에는 사람이 있었다.

저녁 8시. 한 60대 여성이 자전거를 끌고 대봉교를 건너려 했다. 경계하던 그녀는 차츰 경계를 풀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일하다 이제 집에 가요. 사람하고 오랜만에 말하는 것 같아 반갑네요" 첫 인사였다. 전현자(63)씨는 간병인 일을 하고 있다. 남편과 4년전 사별하고 생계를 위해 선택한 길이다. 3일 오후 5시부터 4일 오후 6시까지 24시간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다 이제 퇴근하는 길이다.

지금 돌보는 할아버지는 두 달째 입원해 있다. 가족들이 잘 오지 않아 전씨는 할아버지 곁을 떠날 수가 없다. 다행히 이날 저녁에는 할아버지 아들이 찾아와 퇴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일 아침에도 자전거를 타고 대봉교를 지나 출근해야 한다. "건강하다는 것,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감사할 수 없어요" 전씨는 말했다. "다리 건너는 건 하나도 안 힘들어.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건 좋지. 혼자되는 게 무섭지...더 말하면 너무 잔소리다 그쵸?"라고 되묻곤 인사 후 다리 끝편으로 페달을 밟았다.

퇴근 차량 교통체증도 풀렸을 무렵인 저녁 8시 30분. 인적 없는 다리 위로 완연한 어둠이 내렸다.

   
▲ 대봉교를 지나 저녁에 귀가하는 사람들(2016.1.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관련기사
· 한해 끝날의 밤과 새해 첫날의 새벽, 사람들· 새해, 착한 정부를 꿈꾼다
· 새해, 따뜻한 국가를 꿈꾼다· 바닥친 고달픔도...새해엔 올라갈 일만 있겠지요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본 신문에 게재된 기사, 링크에 대한 모든 법적권리와 책임은 기사작성자 평화뉴스 에게 있습니다.
* 제호 : 평화뉴스 * 편집.발행인 : 유지웅 * 창간.발행일 : 2004년 2월 28일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대구 아00010 * 정기간행물 등록 연월일 : 2007년 3월 14일
(우)41266 대구시 동구 국채보상로 155길 54 (상가동 202호) | 대표전화 053-421-6151 | 팩스 0505-421-61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유지웅
Copyright 2008 평화뉴스. All rights reserved. 전자메일 pnnews@pn.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