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따뜻한 국가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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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퇴행한 민주주의, 그 불씨를 되살리기 위하여


2016년 병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여기저기서 덕담을 주고받으며 희망을 나눕니다. 형식적으로 보면 인사치레일 뿐이지만 그만큼 지난해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지난해를 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무엇 하나 새롭게 시작하거나 희망할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암울할 뿐이지요. 무엇을 소망한다는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혹시 저만의 생각일까요.

지난해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했습니다. 우리 현실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키워드였지요.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지옥’이라고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N포 세대’라 불리는 청년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우리 사회의 붕괴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주저 없이 거론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현실은 지옥인데 정치와 권력의 언어는 언제나 천국입니다. 도대체 이 극단적인 모순상황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단적으로 두 가지만 짚어 봅시다. 먼저 세월호 참사입니다. 2년이 흘러도 세월호 침몰의 아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하고 먹먹해집니다. 국가는 묵묵부답입니다. 청문회에서는 뻔뻔한 위증으로 유족들을 다시 한 번 긴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통치술을 발휘하더군요. 참으로 냉정하고 교활한 국가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또 어떻습니까. ‘최종적-불가역적 합의’라는 듣도 보도 못한 외교적 수사로 할머니들, 아니 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버렸습니다. 국가의 존재를 의심스럽게 합니다. 최소한의 도덕적 감수성이 좌절된 국가의 전형적인 ‘악의 평범성’입니다.

오래 전 예루살렘에서 독일 전범 재판이 있었죠. 법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가 무자비하고 병적인 괴물을 보리라 기대했지만 정신과 의사들이 아이히만을 완전히 정상이라고 진단했을 때 한나 아렌트가 바로 이 ‘예루살렘의 아돌프 아이히만’ 사례를 통해 ‘악의 평범성’을 제기한 것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국가뿐만 아니라 ‘우리들 안’에도 이 악의 평범성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고의적으로 망각하는 것, 우리 옆에서 살아 있고 실재하며 무언가 옳은 것을 행하거나 말하는 사람을 거부하거나 배제함으로써 나와 다른 너를 인식하고 인정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우리 안에 세워진 정신적 장벽이며 도덕적 불감증 때문입니다. 국가로부터 전이된 우리들 안의 ‘악의 평범성’이며, 우리가 현실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정말 불쾌하고 충격적인 진실은 저 악이 연약하고 깨지기 쉬우며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 악은 강력하지도 않으며 이곳저곳에 널리 산재해 있습니다. 더 슬픈 진실은 이 악이 정상적이고 건강한 모든 사람들에게 잠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내재하는 악의 잠재력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의 믿음이나 인간관계, 그리고 문화 등으로는 이 악의 상황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고통 받는 인간의 모습에 아무런 동정도 느끼지 않으면서 한 인간을 서서히 살해하는 가학적이고 반사회적인 인격 장애자처럼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들도 비도덕적이고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국가가 개인에게서 그의 얼굴과 개성을 빼앗는 것은 아주 사악한 짓입니다. 우리는 2년전 세월호 참사 때 ‘얌전히 가만히 있어라!’고 했던 정치권력의 언어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 명령어에는 ‘얌전히 굴지 않으면 너희들이 어느 누구도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 사회적 기존 질서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들 것’이라는 위협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국가가 개인에게 남용했던 언어입니다. 그 사이 우리의 모습은 각자의 얼굴과 개성이 사라지고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비도덕적이고 비정상적인 개인으로 변했습니다. 국가와 개인의 탈도덕화가 전면화되었습니다.

국가가 무엇입니까. 국가란 ‘일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능력’인 권력과 ‘올바른 일이 이루어지도록 조치하는 능력’인 정치를 함께 가지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국가는 어떻습니까. ‘일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능력’인 권력도, ‘올바른 일이 이루어지도록 조치하는 능력’인 정치도 완전히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각 주체인 권력과 정치가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딴 살림을 차려 이전투구하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드넓은 세계 공간을 배회하면서 정치적 통제를 받지 않은 채 자신의 목적을 무한대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권력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자신의 모든 힘과 근육과 이빨을 갈취당하고 강탈당한 초라한 정치가 있습니다. 혈연, 학연, 지연 등의 운명의 명령에 따라 개인들로 존재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자원에만 의존하도록 국가로부터 철저하게 방치되어 있습니다.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 개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겨우 비도덕적이고 비정상적인 삶입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정치와 권력이 떠맡아야 할 최우선 과제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개인들을 엄습하고 있는 공포와 불안을 덜어주는 일입니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비통한 개인들은 그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되기 위해 자유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개인들이 궁극적으로 국가에게 바라는 것은 불안과 공포를 소멸시켜 줄 따뜻한 국가이며, 이것의 구체적인 얼굴은 민주주의입니다. 개인이라는 행위주체가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며 각자의 얼굴을 실현하는 제도적 장치 말입니다. 새해, 우리의 소망은 인간적인 국가와 사회를 만드는 일에 매진하는 일, 즉 퇴행한 민주주의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한 지난한 싸움이어야 할 것입니다.






[평화뉴스 이재성 칼럼 59]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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