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의 생략, 방법의 부재
1년 365일중 제일 풍성하다는 한가위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한가위날인 음력 8월 15일은 농경시대인 옛날 가을 추수를 마치고, 먹을거리가 가장 풍성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1년 12달이 모두 한가위날처럼 풍성해지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생겨난 말일 것입니다.
해방 이후 산업화를 거치며 고향을 등진 많은 이들이 명절을 앞두고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아마 고향과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과 친지일 것입니다. 특히 자의가 아닌 타의로 가족과 헤어져야 했던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이산가족은 더더욱 고향이 그리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임진각과 속초의 아바이마을에서는 합동차례를 지내며 그리움을 달래곤 합니다.
다행히 올해 한가위를 앞두고 이산가족상봉이 노무현 정부때의 16차 상봉 후 1년 11개월, 이명박 정부 출범 후 1년 7개월 만에 처음으로 열렸습니다. 1985년에 1번, 김대중-노무현 정부때 16번이 열렸으니 이번이 18번째 이산가족상봉인 셈입니다. 공교롭게 이번 한가위가 10․4선언 2주년과 겹쳐 마치 10․4선언 2돌을 축하해주는 남북합동행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쌀과 비료, 인도주의적 문제
북의 장재언 조선적십자사 중앙위원장은 남북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해 남측이 모종의 ‘호의’를 보여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아마 쌀과 비료지원을 간접적으로 요청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측 일부에서는 남북이산가족 상봉은 순수한 인도주의적 문제이므로 쌀, 비료지원과 연계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입장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홍양호 통일부 차관도 “이산가족 상봉과 연계해 대규모 쌀.비료 지원을 할 계획은 없다”고 밝혀 이를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산가족상봉이 순수한 인도주의적 문제이듯 북에 대한 쌀과 비료의 지원 역시 순수한 인도주의적 문제입니다.
북의 입장에서는 이산가족상봉에서 인도주의적 호의를 보였으니 쌀과 비료에서 남측이 인도주의적 호의를 보여달라는 것이겠지요. 물론 이산가족상봉과 쌀과 비료의 지원을 맞바꾸는 방식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남측도 아무런 조건 없이 식량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북녘의 동포들을 위해 쌀과 비료를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명절을 전후해 이를 지원한다면 남측의 호의는 더욱 돋보일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쌀과 비료를 주면서까지 이산가족상봉을 할 필요가 있냐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또 이산가족이 1000만인데 한 번에 100명 씩 만나면 어느 세월에 다 만나느냐'고 공격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실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14만 밖에 안되고 그후로 많은 분들이 돌아가셔서 지금은 8~9만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분들도 고령이라 진짜 얼마 지나지 않으면 5만명도 채 되지 않을 지경입니다. 또한 지난 28일에는 이산가족상봉을 신청했으나 10년째 뽑히지 않은 70대 실향민이 이번에도 뽑히지 않자 자살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매년 명절이 되면 임진각에서 고향을 바라보며 자살하는 분들도 계시다고 합니다. 이들의 아픔을 씻어주기 위해서는 쌀과 비료를 지원해서라도 이산가족상봉 행사가 이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추석명절, 설명절날 두런두런 모여 앉아 옛이야기 나누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인도주의 일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MB의 대북정책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쌀과 비료를 지원할 생각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남북관계 악화를 가져왔던 지금까지의 대북정책을 변경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9.21일 미국외교협회(CFR) 연설 및 9.23일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대북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을 제안하였습니다. 이는 6자회담의 9.19공동성명에서 제시된 최종목표인 ‘비핵화’와 ‘경제협력’, ‘관계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등을 단계적으로 이행하지 말고, ‘일거(一擧)에 해결하자’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복잡한 절차와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를 위룰 수 있는 비핵화와 평화체제구축이 일시에 포괄적으로 타결이 된다면 그야 환영할 일입니다.
하지만 이는 내용과 절차, 시기에서 모두 문제가 있는 제안입니다.
우선 북한의 핵포기는 단기간에 이룰 수 있고 한번 돌리면 불가역적인 사안이지만 북한에 대한 체제보장 및 경제지원은 시간이 걸리고 언제든지 다시 돌릴 수 있는 사안입니다. 절차적으로도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은 주변관련국들과의 긴밀한 협의가 필요한데 이 제안은 아무런 사전 협의 없이 제안된 듯 합니다. 이는 이후 미국의 냉담한 반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6자회담이 사실상 휴업된 상태에서 관련국들은 양자 또는 다자대화를 통한 문제해결 메커니즘을 다시 궤도로 올려놓기 위해 신중히 접근하고 있는 와중에 아무런 협의없이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내용을 차지하고 그 의도에 의심을 갖게 만드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괄타결방안이 이루어지려면 쌍방간에 돈독한 신뢰가 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북한과 미국, 북한과 남한은 한국전쟁 이후 아직 공식적으로 전쟁을 마치지 않은 상태입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상대방을 수십번 전멸시킬 수 있는 군사력이 대치하고 있는 상대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에 대한 차분한 신뢰구축과정을 생략한 채 한번에 자기가 가진 모든 카드를 내려놓으라는 것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 제안일까요? 이는 마치 맞선 보는 자리에서 데이트 과정도 생략한 채 결혼날짜를 잡자고 하는 돈키호테같은 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모두 이런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뢰가 미비한 상태에서 방법은 제시하지 않고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목표지점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식이지요.
예를 들어 나들섬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쪽에 있는 개성공단 사업도 남측의 지원미비 - 기숙사 건립 등 - 로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남쪽에다가 북의 근로자들이 출퇴근하는 공단을 만든다고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개성공단이 성공하고 이를 통해 북이 남과의 경제협력을 신뢰를 할 수 있을 때라야 북의 입장에서 남쪽으로 근로자를 보내는 나들섬사업도 검토해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혹자는 꼭 왜 북의 입장에서만 바라봐야 하느냐고 질문을 할 수 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남과 북이 협력을 할 때 우리가 북의 입장을 먼저 헤아려야 하는 것은 강자이기 때문입니다. 곳간이 차 있는 사람이 비어있는 사람의 입장을 헤아려야 일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북의 곳간을 채워줘야 북도 보다 여유를 가지고 남과의 협력사업에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랜드 바겐', 남북합의 정신으로 '그랜드 리턴'해야
더욱이 앞에서는 그랜드 바겐이라고 통 큰 제안을 해놓고는 이명박 정부의 장관들은 지속적으로 북에 대한 강경발언을 쏟아놓는다면 그 제안의 진실성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전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북한 핵무기저장소에 대한 선제타격 발언을 하였습니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도 아무런 증거없이 북한의 황강댐 방류를 의도가 있다고 발언하고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한반도는 불안정하고, 남북관계 발전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선핵폐기의 입장을 지속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도 얼마전 "북한의 핵무기는 남한을 겨냥한 것"이라며 "북한의 목표는 적화통일이고 그런 수단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대통령의 직속 자문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김대식 사무처장은 21일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주최 토론회의 기조강연에서 "김정일 이후의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북한의 체제와 지도자를 자극하면서 남북한 사이에 신뢰가 단단하게 쌓여야 가능한 그랜드 바겐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이명박 대통령은 그동안 남한이 북핵문제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없었고 이제 우리의 안이 필요한 때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입니다. 이는 북과 합의한 6․15공동선언과 10․4평화번영선언의 내용을 애써 외면하는 발언이며 심각한 착시현상입니다.
10․4선언에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청사진과 구체적인 방도가 나와 있습니다. 또한 남과 북이 주도하여 주변의 4대국을 설득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나 국제정치현실에서 우리가 주도하려면 결국 남과 북이 손잡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나 있는 길을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정권이 닦은 길이라 외면하면 결국 그 종착점은 변화하는 국제정치현실에서 왕따가 되는 일 밖에 남아 있지 않지요.
더욱이 최근 미국의 전현직 관리와 한반도 전문가들이 북미정상회담 가능성까지 언급할 정도로 북미회담은 10월 이후 급속히 진전될 것입니다. 일본도 민주당 정권으로의 정권교체 이후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이 급진전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 이명박 정부가 겉으로는 현실성 없는 제안에 국력을 낭비하고 뒤에서는 지속적으로 북을 비난하며 실질적으로는 북미, 북일간의 관계증진에 딴지를 건다면 그 후과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지금 이병박 대통령이 이야기 해야 할 것은 그랜드 바겐이 아니라 그랜드 리턴입니다. 김대중 - 노무현 정부가 이루어 놓은 남북간의 합의인 6.15선언과 10.4선언 정신으로 돌아가고 4차 6자회담에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그랜드 리턴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번 한가위 보름달을 보며 다시 한번 간절히 기원해 보려 합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관계 진전을 위해 6․15공동선언과 10․4 평화번영선언이 되살아나기를"
[평화와 통일]
김두현 /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사무처장. 평화뉴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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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선언 2돌> 김두현..."남북정상의 합의, 그 정신으로 그랜드 리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