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뭐냐? 내게 물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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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 "과연 나의 꿈...불안하지만 설레고 또 설렌다"


"엄마는 꿈이 뭐야?"
아홉 살 아이가 불쑥 묻는다.
꿈? 꿈... 그래, 꿈!
어릴 때부터 사명감이 강해서였나, 기자가 꿈이었다.
아이가 활짝 웃으며 손뼉을 친다. "와~ 엄마는 꿈을 이룬거네?!"
그...렇지... 돈 안되는 인터넷신문의 객원기자 노릇을 하면서 매번 글 쓸 때마다 "원고 쓰니까 방문 닫고 좀 나가줄래?" 하고 유난을 떨고 있으니.

사실, 머리가 굵어질 때부터 나의 꿈은 '농민'이 되는 거였다.
대구 토박이로 태어나 지금까지 40평생 살면서 한 번도 흙을 가꿔본 적이 없지만, 지금도 나는 농꾼을 꿈꾼다. 작은 화분 하나조차 키우지 못해 늘 말려죽이면서도 말이다.

돌이켜보면, 이 ‘택도 없는’ 꿈은 고등학교 때의 은사인 배창환 선생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나는 열일곱이었고, 시를 쓰고 싶었고, 시문학동인회에서 다달이 열리는 문학토론이 떨리면서도 좋았다. 선생님이 소개하는 문학행사들, 예컨대 시인과의 만남이나 시낭송회, 문학 강좌 같은 행사에는 동무들과 하루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배창환 선생님 주위 어른들에게 "배창환 추종자들!"이라는 별칭을 얻어가면서. 그 때 알게 된 대가들이 바로 권정생, 이오덕, 고 은, 김지하, 황석영 같은 분들이다.

배창환 선생님의 문학지도의 핵심은 바로 ‘흙의 정서’였다.
자연에서 얻는 진리와 교감, 치열하게 생각하며 발로 쓰는 문학, 약하고 소외된 인간을 치유하는 생활글... 선생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그것이 중심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방학 때마다 농촌일손을 돕는 ‘농촌활동’에 열심히 다녔다.
대학 들어가자마자 꽂힌 남자도 농촌 출신이었다. 어쩌다가 들어간 강의 시간에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니, 그가 죽어가는 나무를 북돋아주고 물을 부어 주고 있었다. 그는 지금의 남편이 되었고, 시어머니와 시동생은 경주에서 아직도 농사일을 하고 있다. 내 주변에는 귀농한 사람들도 꽤 있다.

헌데! 내 꿈의 세세한 그림을 들여다보면, 사실 내가 꾸는 꿈은 계속 변하고 있다.
애송이 때는 농민운동을 꿈꿨다.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농민운동이라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시어머니가 거둔 농산물을 앉아서 받아먹게 되자, 진정한 농꾼이 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됐다. ‘농민운동 이전에 진짜 농사꾼이 되어야겠구나.’하고 뒤통수를 긁으면서.

나이가 들면서, 가을들녘의 황금들판을 그저 흐뭇한 풍경화로 볼 수 없을 만큼 현실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농촌의 붕괴, 농업의 붕괴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농민은 선거판의 거수기로도 치부되지 않을 만큼, 몰락했다. 농촌의 아름다운 경관은 도시의 무자비한 약탈로 더욱 처참하게 파괴되고 있다. 더욱 약아진 나는 요즘 이렇게 꿈꾼다. “여보, 당신이 농사짓고, 난 전원생활 하면 안될까?”

불혹이 된 지금은... '공동체'를 꿈꾼다. '나눔'이라는 말이 좋다.
어차피 돈안되는 농사. ‘귀농’ 말고 ‘귀촌’이란 신조어를 들먹이며 나는 여전히 ‘귀촌’을 꿈꾼다.
손재주가 좋은 내가 시골에서, 아~무 내용 없는 공방을 차려서, 결혼한 이주여성들과 그 자녀들과 함께 생활의 지혜를 나누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우리 아이들을 평화주의자로 키우는 그런 꿈.

조금은 초조하다. 큰 아이가 벌써 3학년이다. 3년 안에 뭔가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 관성에 젖고말 것이다. ‘일은 치고 봐야 한다!’는 신조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과연 꿈을 어떻게 이루어 나갈지.
불안하지만 설레고 또 설렌다.  





[주말 에세이]
이은정 / 평화뉴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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