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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한 수업, 배창환 선생님의 시와 삶
이은정 / 『겨울 가야산』(배창환 | 실천문학사 | 2006)
2011년 10월 07일 (금) 15:00:15 평화뉴스 이은정 객원기자 pnnews@pn.or.kr

「겨울 가야산」은 「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이후 6년 만에 출간된 배창환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대구경북은 글쟁이들, 특히나 시인이 많은 지역이지만, ‘창작과비평사’나 ‘실천문학사’같은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하는 시인은 썩 많지 않다. 더욱이 선생님은 교육운동의 본보기로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분이다. 헌데도 「겨울 가야산」이 출간됐을 때, 선생님은 오직 제자들만 초청하여 출판기념회를 하고 싶다 하셨다. 그리하여 2006년 겨울 세밑, 50여명의 제자들이 ‘곡주사’에 모였다. 못오는 제자들은 꽃과 축전을 부치기도 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출판기념회였다. 선생님은 정작 수업 준비를 해 오신 것이다. 「못다 한 나의 수업 - 나의 시와 노래와 삶에 대한 보고서」란 제목의 강의안도 나눠주었다. 거기 앉아 있던 중년의 제자들은 선생님의 수업을 빼앗긴 사람들이었고, 젊은 제자들은 학교에서 쫓겨나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눈물 속에 또렷이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제서야 선생님이 왜 한물 간 식당 ‘곡주사’를 택했으며, 매번 가던 ‘곡주사’에 답사까지 하면서 일일이 마음을 쓰셨는지 알았다. 선생님은 ‘못 다 한 수업’을 꼭 마무리 짓고 싶었던 것이다.

   
▲ 2006년 12월, 곡주사에서 열린 배창환 선생님의 『겨울 가야산』 출판기념회 / 사진. 평화뉴스 이은정 객원기자

내 생애의 별들

서른을 채워 결혼하는 아이 덕에
벌써 두 아이 엄마 된 아이도 오고
아직 좋은 사람 없다며 선하게 웃는 아이도 와서
밥 먹고 술 몇 잔씩 나누고 헤어졌지만
돌아와 눈 감으면 어룽대는 것은 있다
그해 여름,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

차마 부끄러워 딴 애들처럼
교무실로 복도로 찾아 오도 못하고
교문 떠나는 내 뒷모습 훔쳐보며
목련잎 그늘에 숨어 울기만 했다고
오래 묵은 사랑처럼 털어놓고는
가슴이 조금 시원한 듯 웃는 아이,

- 선생님, 그땐 다들 힘들었어요
아이가 다섯 살이나 된 아이가 말했다
- 오냐오냐, 내 다 안다
   
▲ 『겨울 가야산』(배창환| 실천문학사| 2006)
내 음성은 토란잎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그렁그렁 매달려 떨고 있었다

그해 여름,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
굳게 입 다문 쇠교문에 매달려 울던 아이들
언젠가는 꼭 한번 빌고 빌어
용서받겠노라고 다짐하던 나 먼저
가던 길 지쳐 허덕일 땐 언제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던 아픈 채찍들

나눠 가진 상처 때문에 더 자랑스러운
내 생애의 별이 된 그 아이들을 다시 만났다
(『겨울 가야산』 중에서)


   
▲ 배창환 시인
선생님은 그런 분이다. 언제나 제자들에 대한 빚을 지고 사셨다. 해직된 교사들이 다시 학교로 복귀할 때도 선생님은 교원노조에 남아 어려운 자리를 지켰고, 학교에 복직된 뒤에는 아예 성주로 옮겨가서 마치 한풀이처럼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학교에서 쫓겨나 거리에서 보낸 시간만큼 언제나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부족했고, 자신과 아이들에게 빚을 갚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세월만큼 더욱 열심히 아이들을 보살피고 함께 뛰어야 했다. 성주 벽진중학교에서는 학부모들로부터 감사패를 받았고 김천여고를 거치면서는 아이들 글로 엮은 책을 쏟아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여전히 옛 제자들에 대한 미안함을 원죄마냥 지고 살아가시는 것 같다.
얼마 전에는 <대구작가회의>가 주최한 선생님의 문학강연에 참석했는데, 강연도중 청중들 앞에서 선생님의 옛날 시 「각서 쓴 날」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울음이 쏟아지는 바람에 다 읽지도 못한 채 단상을 내려오고야 말았다. 어린 나날에 어쩌면 나의 전부였을지도 모를 선생님을 상실한 아픔이 똑같은 지점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각서 쓴 날

마지막 각서를 써 주고 오랜만에 사철나무 푸른 잎을 본다. 잎이 하나 둘 잠깐 내린 빗방울에 떨어져 제 발바닥을 덮고 있다. 그 위에는 벌써 꽃잎을 다 떨군 목련이 한창 푸른 지붕처럼 덮여 있고 참 푸른 하늘은 또 그 위에 있다. ‘다시는 .....않을 것을 맹세한다’고는 못 쓴다고 버티다 ‘서약한다’로 고쳐 쓰고 볼펜을 던지고 나니 갑자기 시원한 공기와 하늘을 마시고 싶어진다.

종이 한 장, 내 목에 칭칭 감기는 올가미임을 나는 안다. 이런 걸 쓸 날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군, 생각하니 갑자기 아이들이 보고 싶다. 내가 사랑하고 날 사랑한 아이들...... 그 아이들이 보낸 편지가 구름 위에서 떨어지고 거기 아이들이 있다. 모두 웃는 얼굴이다. 선생님, 힘 내셔야 해요......살아 남으셔요......보구 싶어요......그래, 나도 보고 싶다......선생님 수업, 다시 듣고 싶어요......아이들아, 세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란다......예 알아요, 선생님......건강하셔요, 선생님......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나는 선생님인가, 목련잎 커다란 얼굴이 손바닥에 떨어지며, 그렇다! 한다. 나도 그렇다! 하며 일어설 때 해가 넘어가고, 저문 하늘에서 마지막 빛살이 터져 내렸다. 찢어진 각서처럼 (『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중에서)


그 때서야 깨달았다. 나 역시 아팠던 그 시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이은정에게 드림’이라는 서명이 들어있는 선생님의 시집을 받아들 때마다, 버릇처럼 선생님의 ‘시’를 읽기보다는 ‘삶’을 읽어왔다는 걸. 나눠 가진 상처 때문에 서로에게 채찍이었음을.

   
▲ 배창환 선생님의 시집 / (왼쪽부터) 『잠든그대』(민음사 1984),『다시 사랑하는 제자에게』(실천문학사 1988),『백두산 놀러가자』(사람 1994),『흔들림에 대한 작은 생각』( 창비 2000),『겨울 가야산』(실천문학사 2006) / 사진 제공. 정훈교(대구작가회의)

이제 나는 선생님의 시를 즐겁고 재미있게 읽고 싶다. 그래서 또 다른 강연장에서 여쭤보았다. “은유야말로 시 맛의 핵심이 아닙니까. 은유가 빛나는 시들을 쓰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어떤 면에선「백두산 놀러가자」가 참 부끄러운 시집입니다. 구호같은 시를 쓰느라 그동안은 일부러 어려워지는 걸 기피하지 않았을까... 이젠 그렇게 쓰려고 애써볼라 캐요. 체질이 안그래서 우째될지 알 수 없지만 재미있게 쓰고 싶어요.”

선생님은 자신의 시가 ‘막걸리 한잔’이면 좋겠다 하셨다. 하다못해 ‘라면받침대’라도 쓰이면 좋겠다고.
선생님의 다음 시집을 기다린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텁텁하고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쭈욱~ 들이키고 싶다.

   





[책 속의 길] 38
이은정 / 평화뉴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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