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의 피흘린 역사와 보수 정치ㆍ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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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기 독도 폭격, 우리 어민 참극…미국 기만으로 '對일본강화조약' 독도 제외


▲희생자 최덕신(남면 소저동) 35세 ▲희생자 김새도(남면 소저동) 27세 ▲희생자 김해술(남면 도동) 19세 ▲희생자 고원호(남면 소저동)…

웬 뜬금없는 사망자 이야기냐고 할지 모르지만 필자는 독도는 살아 있는 우리의 문제, 피 흘린 역사를 안고 있는 우리의 영토란 사실을 역사적으로, 언론에 보도된 묵은 기사를 통해서라도, 말하려는 것이다. 독도가 현안이 된 이 시점에도 우리 보수 언론은 독도가 어떻게 위협받아왔는지, 왜 일본인들은 왜 저토록 ‘다케시마는 우리 땅’이라고 우기고 있는지 보도하기를 외면하고 있다.

미군기의 독도 폭격, 어민 14명 희생

1948년 6월 8일 오전 11시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에서 미역을 따던 울릉도를 비롯한 동해안 어민들이 미군비행기의 폭격과 기관총사격으로 참변을 당한 희생자들의 명단 일부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으로 독도는 이명박 대통령의 모든 실정, ‘경제대통령’으로 자신했던 경제가 겹겹 위기국면으로 빠지고, 친인척과 멘토, 핵심 측근들의 비리․부정, 새누리당 돈선거 의혹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일거에 빨아들이고 있다. 그 다대한 공로는 ‘독도문제’의 경위, ‘독도문제’의 역사를 외면한 보수 언론 몫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해서 풀리지 않는다. 역사는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독도참극의 희생자 명단이 실린 위의 「독도사건의 유족들/사라갈 앞길은 아득하고/격랑 같은 원한 무었으로 푸리-」 기사는 해방공간 대구에서 발행된 남선경제신문(1948년 8월 4일치 2면)에 실렸는데 우리 어민들이 왜 독도에 가서 미군기에 의해 참변을 당했는지 이 기사의 전반부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한자는 한글,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

그날 6월 8일에 미역 따려 나간 어부들은 울릉도 강원도 죽변 원(후)포 흑(묵)호 각지의 60여명으로 격랑 수천리를 조고만한 발동선 또는 범선으로 동해의 무인고도 독도에 모혀 풍부한 미역 채취에 여념이 없었다. 격랑 노도와 싸우며 평화생업에 종사하는 사자 같이 억새고도 양 같이 순한 그들에게 청천의 벽력! 미 비행기의 무분별한 집단 폭격 기총소사로 대자연의 직장에 쓰러진 “바다의 사나이”들은 울릉도에 여섯 강원도 흑(묵)호에 하나 죽변에 여섯 원(후)포에 한 사람으로 모다 열 넷의 아까운 생명을 창파에 원한을 남기고 쓰러지고 마럿는 이 사건으로 주권 없는 약소국가의 비애는 필경 민족적인 비분사였다 이 동포들의 참사에 대하야 애석과 통분을 금치 못하는 동시에 그 유족에 따듯한 민족애를 발휘하야야 할 것이다…

미군기의 폭격, 기총소사로 참극을 당한 독도어민 돕기 신문 캠페인(남선경제신문 1948. 6. 26일 1면) 알림. 해방됐지만 외세에 의해 유린되는 민족의 삶은 동포들의 온정으로 지탱돼야 했다.
미군기의 폭격, 기총소사로 참극을 당한 독도어민 돕기 신문 캠페인(남선경제신문 1948. 6. 26일 1면) 알림. 해방됐지만 외세에 의해 유린되는 민족의 삶은 동포들의 온정으로 지탱돼야 했다.

이 기사를 통해 울릉도와 동해안 지역 어민들이 독도에서 천연의 풍부한 미역을 채취해 생업으로 삼았으며 미군기가 폭격, 기총소사를 하던 당일에도 60여명의 어민들이 독도에 있었으며 14명이 희생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미군기는 왜, 무슨 사정으로 독도의 우리 어민들을 겨냥해 폭격, 기총소사를 했으며, 우리 어민들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미군의 만행에 의한 어민 참극이 알려지자 미군 측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이런 여러 중요한 사실에 대해 대구에서 발행되던 영남일보 1948년 6월 13일치 2면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결사대를 조직코
  현장서 시체 수색
  포항서 귀임한 신 수산과장 담/
  독도사건 속보」


한편 독도사건에 대하야 사건 진상조사의 임무를 띄고 지난 10일 오후 포항에 출장한 경북도 수산과장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현장까지 가지 못하고 작(昨) 12일 귀임하였는데 씨는 동일 아침 기자단을 만나 지난 11일 아침 포항에 상륙한 조난자 4명과 어부로부터 청취한 이야기 기타 수집한 정보를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독도까지 가서 조사하려고 해안경비대 김 부사령관을 만나 배를 내도록 해달라고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과 애로가 있어 목적을 달하기에는 곤란하다는 답변이 있었다 그러므로 부득이 포항서 수집한 정보만 가지고 일단 돌아온 것이다 조난자 중 포항에 상륙한 4명의 어부(그 중 1명은 부상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건은 8일 상오 11시 경 돌연 비행기 9대가 상당히 높은 곳에서 급강하하여 어선을 중심으로 폭탄을 던진 후 기관총으로 쏜 것인데 이 생각도 못하였는 일에 어부들은 태극기를 섬에 펴고 소속을 표시했으나 습격은 여전히 계속되어 약 20분 동안이나 총알의 세례를 받엇고 조난자 중 동굴 속으로 혹은 수중으로 피한 사람들 중에는 무사한 사람도 있었다 하는데 비행기의 표식을 식별할만한 여유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방불명이 된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9일 밤 울능도에서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현장에 파견한 결과 익(翌) 10일 아침 현장서 겨우 사체 두 개를 발견하고 돌아왔을 뿐이고 구조선이 돌아올 때에도 하늘에 비행기를 보았다고 한다 다음에 출어한 사람 수는 43명 어선은 20척이였다 하며 출어자는 울릉도을 위시한 강원도 죽변 등의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 기사를 통해 당시 독도에는 모두 43명이 20척의 발동선 또는 범선을 타고 들어간 사실을 알 수 있다. 남선경제신문이 독도 출어자를 모두 60며명, 출어선박을 모두 20척이라고 한 것은 미군의 만행이 발생하고부터 거의 두 달 가까운 시간이 흘러 만행의 전모가 완전히 파악됨에 따라 배의 숫자나 독도 출어 어민들의 숫자가 확인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보면 우리 어민들은 자신들이 해적이나 기타 독도에 몰래 들어간 침입자들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위급한 순간에도 태극기를 섬에 펼쳐 보였다. 정직하고 당당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어민들이 자신의 신분을 태극기를 통해 미군들에게 알렸는데도 미군은 계속 폭격, 기총소사를 가하였다.

독도 참극 현장 접근 방해

이 기사를 보면 미군정 경북도청의 간부인 신 아무개 수산과장이 독도 현장조사에 나섰으나 ‘여러 가지 사정’과 ‘애로’를 말하는 해안경비대 부사령관에 의해 현장조사가 저지된 사실을 전한다. 해안경비대는 미군정에 의해 설립된 해방공간의 해군 격인데 미군의 통제 아래 있었던 사정을 고려하면 미군기에 의한 참극 현장 독도에 접근하는 것을 미군이 허용하지 않았음을 행간에서 읽게 한다. 2002년 6월 파주에서 심효선 신미순 두 여중생이 미군 탱크에 압사해 희생되기 54년 앞서 우리 어민들은 미군 비행기 9대에 의해 독도에서 참혹하게 희생된 것이다. 독도는 이렇게 현대 우리 국민들의 삶과 역사적으로 연결되는 현장인데 남선경제신문은 일제가 망한 뒤에도 이어지는 그 억울한 사정을 ‘약소국’의 민족이 당해야 하는 ‘비분사(悲憤事)로 규정했다. 해방공간. 아직 우리민족이 해방은 되었으면서도 독립국의 국민이 되지 못했던 그 시절, 일개 미 육군 군단장이 한반도 이남 우리 민족을 직접 점령통치하던 시절 우리 언론은 지방지라도 미군의 만행을 민족 수난 차원에서 당당히 비판, 보도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객들이 ‘독도=다케시마’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고 끝없는 망언을 일삼고 있고 일본인들이 그 영향을 크게 받아 ‘다케시마=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도 현재 우리 언론은 ‘독도는 우리 땅’임을 말하는 동시에, ‘왜 일본인들이 우리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지 그 배경과 맥락을 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다케시마는 일본땅' 우기는 이유 몰라 

국내에서 활동하는 한 외국인은 최근 모 신문에 실린 칼럼에서 자신이 한국 대학에서 우리 대학생들과 대화한 경험을 회상하는 가운데 자신이 만난 한국 대학생들은 ‘독도는 우리 땅’임을 100% 확신하면서도 일본이 독도를 저네 땅이라고 우기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킨 사실을 꼬집었다.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본이 독도를 저네 땅이라고 우기는 그 배경, 일본이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가겠다고 주장하는 맥락, ‘믿는 구석’에 대해 우리 언론이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언론은 이제까지 ‘독도’와 관련해서는 ‘신라장군 이사부’ ‘세종실록지리지’ ‘안용복 활약’ ‘독도 대한제국 관보 게재’ 그리고 독도가 우리 영토로 돼 있는 지도 보여주기 보도에 주력했을 뿐 현대의 국제여론, 국제정치 같은 면은 미국 외에는 애써 외면해왔고 그 때문에 우리 국민은 이 부문의 흐름에 대해서는 사실상 무지에 가깝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역사 맥락 속에서 현실 직시해야

‘미디어창’이 독도 어민들의 참변을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되돌아본 것은 일본제국을 제압한 미군의 한반도 대리인(미24군단 사령관) 하지가 “한국은 일본 제국의 일부분으로 미국의 적이었다”고 휘하 군정부사령관 해리스에게 지침(3호)을 하달, 적대하도록 한 때부터 미국이 일본과 1951년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 독도를 최종적으로 한국의 영토에서 기만적으로 제외한 과정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한국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었는지를 역사적 사건 속에서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이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란 점을 우리 어민들의 머리 위에 폭격과 기총소사를 사양하지 않은 미국의 비정함(일본에 기운 태도)을 통해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달 10일 독도를 방문했을 때 보수언론, 그 중 우리 지역 매일신문과 영남일보는 1면에 통단 컷을 달아 ‘대서특필’했다.

<영남일보> 2012년 8월 11일자 1면
<영남일보> 2012년 8월 11일자 1면
<매일신문> 2012년 8월 10일자 1면
<매일신문> 2012년 8월 10일자 1면

SNS로 요약되는 신속․다양한 디지털 매체가 등장, 더 이상 호외 발행의 의미가 사라진지 아득한 ‘4통8달’의 시대에 그 옛날 호외를 연상시키듯 1면 통단 컷을 달아 보도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대한 보수언론의 태도(이명박 대통령 영웅 만들기)를 집약해서 드러낸 제목․기사가 아닐 수 없다.
 
말 따로 행동 따로 엇박자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 일왕사죄 요구 발언은 당연하다. 문제는 일본 자위대와 군사정보협정을 은밀히 맺으려던 이명박 대통령의 언행이 빚는 엇박자, 어떤 배경에서 그런 행보를 하는 것인지, 앞으로 어떤 국면이 전개될 것인지, 그 때 우리 국민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적확하게 분석하고 전망하게 하는 정보전달 노력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외면했다고 하는 편이 바를 것이다.

일본이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운운하는 것은 쇼이든, 실제상황이든 관계없이 그 배경을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바르다. 왜냐하면 독도를 미국이 미․일 강화조약에서 일방적으로 삭제한 과정, 그리고 그 이후 전개된 상황들을 살펴보면 우리 정부는 ‘꿀 먹은 벙어리’였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독도를 한국영토에서 일방 삭제

알려진 대로 독도는 미국과 일본이 강화조약 체결을 위한 준비회담을 하던 대부분 과정에서 한국 영토로 규정되어가고 있었다. 학자들에 의하면 적어도 1949년 1차 초안에서부터 5차 초안까지 독도는 한국 영토로 규정돼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6차 회담(초안)에서 독도를 미국의 이익에 중요한 요충임을 강조하면서 적극 로비했고 그에 따라 미국은 독도를 한국영토에서 빼고 일본영토에 포함시켰으며 초안 주석에서도 독도의 일본 귀속을 합리화 했다. 이어 7차에서 9차에는 독도에 관한 언급이 사라지며 9차 초안에서 미국을 제외한 연합국들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미국은 일본의 영토조항에서 일본은 한국에 관한 모든 권리, 권원,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명시하기만 하고 독도를 비롯한 구체적인 섬 이름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독도를 외형상 한국영토도 일본영토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미국이 끝내 ‘독도=한국 영토’를 지워버림으로써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놓았다. 최종 조약문에서 미국은 독도를 한국 땅도, 일본 땅도 아닌 것이 되도록 만들어버린 때는 이미 한국이 주권국가로 독립하여 독도를 독도 어민 참극에서 보듯이 한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로 지배하고 있었고 1952년에는 ‘이승만라인’까지 발포하여 독도에 대한 한국주권 지배를 국제사회에 천명한 때였다. 그런데도 미국은 독도에 대한 한국의 주권적 지배를 무시하고 ‘한국 땅도, 일본 땅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는데 이런 행동은 ‘미국의 의지’가 독립국가 한국의 주권 위에 있음을 보여준 웅변적 사태였다.

문제는 우리 정부에도 있다. 한 학자의 논구에 따르면 한국정부는 미국과 일본이 강화조역을 체결(1951년 9월 8일)하기 한 달 전인 8월 10일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Dean Rusk)가 미국 주재 한국대사 양유찬에게 ‘독도는 한국영토가 아니다’는 내용의 공문(“독도, 다른 이름으로 죽도, 혹은 Liancourt Rocks).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암석에 보통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며, 역사적으로 한국영토의 일부분으로 보지 않았다. 1905년 이래 줄곧 일본 隱岐島司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한국도 이 섬에 대한 관리권을 주장해온 바 절대 없었다”)을보냈고, 한국정부는 현재까지 딘 러스크 공문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독도연구』제9호, 방호범, 「영토문제의 역사, 그 비판적 성찰」). (이 주장이 사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딘 러스크는 누군가. 바로 1945년 해방을 눈앞에 둔 시점(8월 10~15일 사이. 8월 11일 일반명령 초안에 이미 ‘38도선’이 등장한다)에서 서울과 부산, 인천 두 항구를 포함하도록 하는 선에서 38도선을 그은-그에 따라 한반도를 영구 분단지역으로 만들고, 권위주의 정부, 안보국가가 등장하도록 길을 터주고, 5.16쿠데타를 계기로 군부의 정치 관여가 이루어지도록 한(김석준, 『미군정시대의 국가와 행정』)-3인 장본인의 한 사람(미 국무성의 딘 러스크 대령)이다.  

<영남일보> 2012년 8월 11일자 사설
<영남일보> 2012년 8월 11일자 사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애 대해 매일신문은 ‘감격하며 환영’한다고 했고(2012. 8. 10. 사설, 영남일보도 ‘‘독도는 우리 땅’임을 대내외에 공식 선포하는 것이라 의미가 깊다‘(2012. 8. 11. 사설)고 해 두 보수신문 모두 ‘용비어천가’를 불렀다.

영남일보는 매일신문과 대동소이한 논조였으나 말미에서 아쉬움을 다음과 같이 표했다.

‘그동안 일본의 도발에 단호히 대처하되 국제 분쟁화를 피한다는 대응기조를 바꿀 전략적 필요성의 공감대가 형성됐느냐는 것이다. 또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일본의 중대한 도발에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대응카드였던 만큼, 정권 말기 지지도가 급락한 시점에서 꺼내든 까닭에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도 방문은 내부선전용?

이런 ‘아쉬움’을 덧붙인 것은 마냥 ‘용비어천가’만 부르기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문제점이 비쳐 켕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작 일본을 변화시키기 위해 세계로 걸음 하는 전략이 없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나 친일파 문제에 대해 여태 담을 쌓듯 해온 이명박 대통령이 느닷없이 위안부 문제를 거론한 것 등은 과연 진정성이 있기나 한 것인지 국민들이 의아해 하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세계를 향한 ‘대외용’이 아니라 ‘내부선전용’이란 시각이 엄연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나마 독도방문에 따른 ‘뒷감당’(전략 공유)에 대한 우려와, 독도방문에 따른 ‘언명된 말’과 의도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점, 달리 말해 외부에 적을 만들어 국민의 관심을 그리로 향하게 함으로써 실정․민생실종을 가리려는 것이 독도방문의 정치적 노림수일 가능성을 지적한 것은 영남일보 사설의 ‘행간 서비스’라고나 할까.

<매일신문> 2012년 8월 10일자 사설
<매일신문> 2012년 8월 10일자 사설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함으로써 한․중․일 3국은 경쟁적으로 ‘민족주의의 판도라 상자’를 열고 국민들에게 ‘분기탱천’ 하도록 ‘애국주의’의 깃발을 흔들고 있다. 그러나 언론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실정을 그럴 듯한 명분으로 호도, 지지도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쓴다고 하더라도 영토회복을 위해 피 흘린 민족사를 외면하거나, 38도선 획정, ‘독도=한국영토’의 정통성․타당성을 무시한 ‘미국의 의지’가 오늘 우리나라의 장래와 우리 국민의 삶에 악영향을 미쳐온 과정, 현재도 미치고 있는 맥락, 정치지도자들이 자신의 실정으로 국민이 피로감을 느낄 때가 되면 ‘카드’로 꺼냄으로써 민심을 현혹시켜 민생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위험천만한 작태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독도’를 다루는 우리 언론은 세계의 여론을 분석하고 세계여론이 우리를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세계가 수긍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언론 특유의 의제설정 기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에서 배우는 정치인 기대

지금은 대선을 앞둔 정치의 계절이다. 강화조약 체결 전야에 미국으로 하여금 독도를 한국 영토에서 빼도록 설득했고 그에 따라 독도를 한국영토에서 제외해버린 그 나라 미국과 맹방관계인 우리는 ‘독도’를 통해 극일(克日) 할 수 있고, 20세기 초 미국에 ‘절 모르고 시주’했다가 ‘국제정치(열강놀음)’에 말려 나라와 독도를 통째 잃은 불행한 일을 경험했다. 이런 비극을 다시 당하지 않도록 역사에서 배우는 정치, 정치인을 간절히 기대한다. 그 일에서 언론은 지금 참으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러나 언론에 기대하기에는 전망이 밝지 않다. SNS 확산으로 독자․시청자 지키기가 어려워지자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해 SNS 때리기에 바빴던 보수언론이 독자․시청자를 붙들어둘 가장 안전한 전략으로 ‘독도 애국주의’란 환상의 카드를 포기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 많은 정치인’에게 ‘일본이 과거잘못에 대해 완전히 사죄하고, 억지주장을 철회하고, 교과서에서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것을 그만 두는 것’은 내부선전용 ‘독도 카드’를 때만 되면 꺼내들 태세가 돼 있는 정치인들에게는 악몽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라는 한 외국인의 지적도 같은 맥락의 통찰이다.) 애국주의가 광기를 부린 러일전쟁이 끝나고 ‘피로 도배’된 신문을 독자들이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자 일본신문은 또 다시 대중이 뿅 가게 미칠 ‘거리’를 찾는 데 혈안이 됐던 역사가 있다. 우리 보수 언론의 행보는 이와 다를까?)






[평화뉴스 - 미디어 창 199]
여은경 / 대구경북민주언론시민협의회 사무처장. 전 대구일보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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