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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유산과 한계
'대구읍성 파괴' 박중양 - '유신' 박정희 - '영남학원' 박근혜
2012년 11월 27일 (화) 15:03:47 평화뉴스 pnnews@pn.or.kr

박중양, 대구읍성을 파괴하다

1906년 가을 일본의 대구 부이사관 오카모토와 대리민장 카게야마는 성벽 파괴를 기도했는데 그들이 파괴하기로 한 도로는 다섯 간 폭의 가로였고, 그 협력자는 경상북도관찰사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이었다.
박중양은 일본 유학을 7년 간 마친 인물로 이등박문의 양자 행세를 하고 다녔으며 일본 이름은 야마모토 신(山本 信)이었다.

박중양=야마모토 신이 대구성벽의 일부를 파괴하려고 측량에 착수한 것은 이보다 한 해 빠른 1905년의 일로, 일본 대구이사청 측은 "거류민의 열심있는 주창자 박중양의 영단에 의하여 성취됐다"고 평가했다. 그것은 한국정부 측에 의하여 대구성벽 파괴는 중단명령이 내려진 상태였던 것이다. 결국 대구성벽 파괴는 박중양=야마모토 신, 일본인 거류민단에 의하여 1907년 4월 전부 완료되었다. 역사 깊은 문화도시 영남의 전통은 이렇게 철저히 무너져 내린다.

서상돈과 국채보상운동

그런데 대구성벽 철거문제는 일본침략자가 조선민족의 경제권을 여지 없이 흔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서상돈의 1906년 1월 행적을 구체적으로 보면 분명해진다. 1906년 1월 창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광문사는 국채보상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대구성벽이 파괴되기 시작하는 1905년부터 철거가 완료되는 1907년 4월까지 기간은 일제 침략자가 조선민족의 경제권을 멍석말이하여, 이들의 경제권을 강제로 적용하는 음모기간에 해당하는 기간이었다. 결코 조선인을 위한 "도시의 자유로운 발전"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대구성벽 파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일본경제 침투의 "자유"가 대폭 확대됐다.

   
▲ <공립신보> 1907년 4월 26일자

그런데 대구지방에 있어서 은행금융기관으로서는 1905년 1월 일본 제일은행(당시 중앙기관으로서 "한국" 국고금 사무를 집행) 부산지방출장소가 설치되어 영업이 개시되었다. 이해 6월 1일에 제일은행 대구지점이 문을 열었고 또 대구농공은행이 이해 8월에 설치되었다.

대구 부근 우리민족의 특성은 원래 자못 선량하였다. 그 선량함을 노려 일본침략자는 거액의 폭리(巨利)를 챙긴 것이었다.

서상돈이 대구 대동광문회를 무대로 국채보상운동을 개시한 1906년 이후와, 접은 다음인 1907년 4월~8월 사이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이때 대한제국이 일제에 진 외채 총액은 1,300만원의 규모였다.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1906~1907년 당시 대구지방에는 일본인 재무감독국장 카와카미 츠네로오가 재무보좌관으로(1911) 취임을 준비 중이었다. 그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는 처음 재정감찰관으로서 대구에 왔을 때 잠시 재무감독국이 설치된 적이 있었다. 카와카미는 재무감독국장이 되었는데, 감독국은 경상남북도 두 도의 재무를 지휘, 감독하고 은행․금융조합의 감독, 통화를 정리하여 엽전의 회수, 신화(新貨-일본 제일은행권을 가리킴) 및 국유지의 정리, 재원조사 등 사무범위가 자못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 카와카미는 대구재무감독국장이 된 인물인데, 대구의 왕년 사교계 황태자였다.

서상돈의 일본 제일은행권(백동화) 보급 방법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당시 서상돈이 사용한 일본 제일은행권 보급 방법은 독특했다. 바로 민족경제 역량을 밑바탕으로부터 헐어내리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서상돈이 사용한 백동화 보급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카와카미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그의 백동화 보급 방법은 탁월했다. 바로 무이자 대부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인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자.

카와카미는 먼저 국채보상운동 주창자 서상돈, 정재학, 정해붕 그리고 이와세(岩瀨)를 일단으로 하는 무이자 대부단을 구성한다. 카와카미가 사용한 방식은 5전 짜리 백동화 30만원을 무이자로 대부하는 것. 자본금 10만원의 익명 조합에 백동화 20만원을 무이자로 대부했다.

무이자 대부를 받는 대상은 이와세 만이 아니었다. 다른 대상자들에게도 2만~3만원을 융통받는 길이 열렸다. 대부의 조건은 이러했다. 그 백동화가 한인(韓人)들에게 흘러들어가기만 하면 좋고, 돈이 대부되면 되고, 물품을 구입하게 되어 엽전 대신에 백동화가 사용되면 되는 것.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가능했고 이익을 내는 일이 적지 않았다. 대구묘포용지 2만평의 매수, 공소원 부지, 재판소관사 용지 매수에는 대부분의 한인에게 신화(新貨)가 지불되었다. 이리하여 무이자로 대부된 신화(新貨)는 만 2년 만에 회수되었다.

우리는 국채보상운동 주창자 서상돈이 이 시기에 일본 침략경제 세력과 손발을 같이 한 사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민족경제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것인 줄 그는 몰랐던가? 서상돈의 2중성-국채보상운동의 전개와 관련-은 자명하다.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처음부터 최후까지 추진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그런 행동을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손을 뗀다!" 그리고 서상돈은 1907년 4월~8월 국채보상운동이 절정에 오른 시기, 그의 계획을 결정하고 말았다. 바로 일본 제일은행 신화(백동화)의 무이자 보급단으로서 카와카미의 하수인이 되는 것.

김광제, 민족의무 최고도 발산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서상돈과 함께 대구 대동광문회에서 국채보상취지서를 발기한 인물이면서도 국민된 의무를 저버리고 수수방관의 길을 걸은 서상돈과는 달리 노동운동․민족교육 등 민족운동의 길을 함께 걸음으로써 1920년 제2의 3․1운동 거사를 전개, 항일투쟁-국권회복을 전면에서 지휘하다 경남 마산에서 순국한 인물의 행적을 보게 된다. 김광제 회장의 역정은 민족의무의 최고도 발산이었다.

1906년 1월 대구에서 광문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여 대구를 중심으로 일제 침략으로부터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대한제국이 일본의 차관부터 모두 갚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국채보상운동 전개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아울러 대한자강회․대한협회․교남교육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김광제는 1906년 2월 대구광문회에서 설립한 사립보통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대구부에서 설립한 달명의숙에서 부교장 겸 강사로도 활동하였을 뿐 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통치하에서 민중계몽과 강연활동이 어렵게 되자, 국내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5년 6월 압록강 대안 흥경동묘자현에서 일신학교를 설립하고 1916년에 흥동학교로 교명을 개명하였다. 이때의 교과목이 국어독본․국문독본․유년필독․수신․초등수학독본․대한지지․대한역사․산술․한문독본․중국어독본․동삼성지지 등이었음을 볼 때 그가 민족교육에 철저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20년 재일본 동경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 1주년을 맞이하여 제2의 3․1운동 거사를 계획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김광제는 이 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국내에서 격문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제2의 3․1운동거사를 계획하고 노동단(勞動團)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 후에도 김광제는 조선노동대회 전국연합회 회장 및 경성본부장으로 노동운동에 매진하다가 1920년 7월 24일 경남 마산에서 순국하였다.

김광제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한말 격동기에 태어나 관리로 편안한 일생을 보낼 수도 있었으나, 일제의 침략간계와 친일파의 횡포에 대해 애국충정의 절박한 충정으로 상소를 올리고 그로 인해 유배되었다. 그러나 유배된 지 2개월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과감하게 관직을 버리고 의병운동에 참가하고 신학문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김광제는 그가 남긴 수많은 글과 강연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생애와 활동을 살펴볼 때 폭넓게 활동한 민족운동가, 현장을 외면하지 않은 실천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전 대통령 박정희와 대구성벽을 파괴한 박중양, 국채보상운동을 주창했으면서도 무이자 대부단에 참여하느라 중도에 포기한 서상돈, 1920년 제2의 3․1운동 거사를 계획하는 등 항일․민족운동을 지향한 김광제 사이에 어떤 구별․차이를 보게 될 수 있을까?

그 가장 큰 차이는 다음과 같다.

박중양 : 대구성벽 파괴=대구지역 조기 식민화를,
서상돈 : 국채보상운동 주창 및 중단=민족경제권 조기 파괴를,
김광제 : 제2의 항일․노동․민족운동 전개=웅비에 찬 민족 활동무대 마련.

특히 대구사범을 졸업한 후 문경소학교 훈도로 근무하다 만주육사에 입교하여 임관한 뒤 중국 민족진영 토벌에 종사한 박정희의 행적을 따르는 것은
(1)박중양의 대구성벽 파괴를 답습, 대구지역 조기 식민화의 토대를 닦는 길이 되며,
(2)서상돈과 같이 국채보상운동이란 금세 이룰 것 같은 한때 꿈에 각오를 새롭게 하지만 현실을 떠날 수 없는 절박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다가오는 후회감에 젖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박정희는 김광제와 같이 민족의 당면 과제를 직시하고, 민족의 내일을 예측하며, 그에 맞게 다방면의 준비를 한 인물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보면 그렇다.

(3)김광제가 걸어온 길-항일운동․노동운동․탈식민주의운동․민족운동․세계화운동-은 박정희가 선택한 조건․환경과 다르다.
(4)박정희가 선택한 조건․환경은 일본민족지상주의 바로 그것이고, 특히 일본 정치세력 가운데 특정 지역 세력인 군부-국가의 정상에 자리 잡고 강력한 장기 계엄령을 행사하는 체제-인데, 이것은 한국의 역사적 성장과정, 지향점과는 매우 다르다.
박정희는 다시 말해 "외부세력"인데 그 세력이 현재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고 있다.

   
▲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2012.11.23.대구 농수산물도매시장)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박정희 세력"은 유신독재, 군사쿠데타, 언론탄압, 삼성 사카린 밀수 등 불법차관 도입으로 대표된다. 인권․민주화와도 "민청학련", "인혁당 희생자"와 관계에서 드러났듯이 "막가는 관계"를 형성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궁정동 안가"의 추억은 새롭기까지 하다. 오죽하면 같은 구미(선산) 출신이자 후배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사필귀정"이란 이름을 붙인 것을 가리켜 "그 나름의 정리"라고 평가했을까?

한 마디로 "박정희 세력"에겐 내부적 일치성(계급적 단결성)도, 외부적(지역적) 확장성도, 범민족적성도, 꿈꿀 이상도, 남겨진 미래도 없음을 보게 된다. 다만 공작정치, 타도해야 할 계급, 억압해야 할 성분, 차별해야 할 지역이 있을 뿐이다.

박근혜의 현 주소

박정희의 공작정치라고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이 최준과 최해청 선생으로 대변되는 해방공간 건국운동이다. 대구대학․청구대학 설립운동인 셈이데 1960년대 중반 박정희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두 대학 이사로 내세워 영남학원 이사진을 형성시킨 다음 자신을 "교주"로 추대하게 한다. 부일장학회를 빼앗아 만든 "정수장학회" 경우도 마찬가지.

"정수장학회 이사장 박근혜"

정수장학회 하면 "장물" 장학회를 먼저 떠오르게 된다. 그만큼 "장물"은 태생적, 원초적이기까지 한데 그것은 "장물"을 박정희가 자신의 사물(私物)로 인식해 왔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리고 그것이 "장물" 장학회에 얽힌 속성인데, 문제는 부산일보사와 정수장학회의 관계 한가운데에 "이사장 박근혜"가 있고, 박근혜와 정수장학회 사이에 최필립이 있다는 것. 박근혜는 정수장학회 책임을 자신이 지지 않으려 하고 있고, 최필립은 책임을 박근혜에게 떠넘기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두환 신군부 체제 아래서 벌어진 일로, "진실게임" 같지만 정수장학회 문제는 박근혜 책임과 관련이 있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면서 박근혜가 통제는 하는(이사진을 임명은 하는) 관계를 국민들은 과연 모르고 있다는 말인지? 그리고 그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생명력은 얼마나 간다는 것인지?

"영남학원 박근혜 이사장"

"영남학원 박근혜 이사장" 하면 생경하기까지 하다. 그만큼 대구지역 두 메이저 일간신문(매일신문․영남일보)이 이 사실을 거의 보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구․경북지역 독자들에게, 그리고 지상파(공중파 방송) 시청자들에게 "영남학원 박근혜 이사장"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런 말이 있었나?"

"영남학원 박근혜 이사장"도 전두환 신군부 체제 아래 만들어졌다. 1980년대 전반의 일이었다, 당시 박근혜 이사장은 20대 후반. 그런 그녀가 영남학원 이사장을 맡다니!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는 "교주 박근혜"로서 자신의 입지를 이미 지역사회에 드러내고 있었다. 1990년 봄 당시 김기동 영남대 총장을 영남대 본관에서 만나 영남일보노동조합 출범행사를 가지게 하도록 해준데 대해 감사인사를 하려는 필자에게 김기동 총장은 뒷방으로 필자를 안내, 대화를 하도록 했다.

그때 본 장면. 세로로 내려 쓴 붓글씨엔 「교주 박근혜」란 글귀가 씌어 있었다.
이때가 1990년 봄. 박근혜가 국정감사를 받은 1987~88년은 그야말로 박근혜 전성시대에 해당한다. 당시 "영남학원 이사장 박근혜"는 교내 재정관리 부정과 입시부정에 연루돼 "이사"를 선언하도록 압력을 요구받고 있었다. 물론 국정감사위원들로부터는 "출연금을 한 푼도 출연하지 않았다!"는 재단 관계자들의 답변을 듣고 있었다. 

"영남학원 박근혜 이사장"의 한계

"영남학원 박근혜 이사장"은 정수장학회 이사장 박근혜(최필립)와 거의 근원이 같은 한계를 가진다. 우선 이사장 명칭을 위임한 것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현행 재단이사장은 박근혜의 위임 범위 아래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권한의 진정한 실제 인물은 박근혜로 봐야 한다.

다음으로, "영남학원 박근혜 이사장"을 자임하는 것을 차단하는 것은 박근혜 자신이다. 독자와 언론매체, 시청자와 방송매체를 차단하는 것은 결코 자의적인 결과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영남학원은 박정희, 새마을대학원 등과 관련해서는 영남학원이 박정희의 영향력 아래 있는 재단임을 알리고 있다. 이런 경우는 이렇게 하고, 저런 경우는 저렇게 하는 것이 과연 공인으로서 취할 정당한 처신일까?

   
▲ 영남대 '박정희정책새마을대학원' 홈페이지

이제 영남학원은 최준 대구대학, 최해청 청구대학으로 재단계보를 재정리하라! 그리고 이들 대학이 대구지역 사립대학의 근간임을 인정하라!

이제 박근혜의 유산을 분석하는 것으로 이글을 마감하기로 한다.
"영남학원 이사장 박근혜"라고 말은 하지만 그 정체성은 모호하다. 그리고 그 유산 중에는 아버지 박정희가 물려받은 것이 요지부동이다. 생각해보라! 정수장학회 이사장, 영남학원 이사장. 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데도 마치 해결할 의사가 있는 듯이 제스처를 취하는 박근혜!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대목들은 국민들이 하게 하라! 박근혜에게서 구하지 말자! 자율과 협력, 창조와 비전, 생태와 함께 하는 공존, 그리고 우리들의 미래를!

   





[평화뉴스 - 미디어 창 211]
여은경 / 대구경북민주언론시민협의회 사무처장. 전 대구일보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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