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다지도 민주주의에 무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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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 칼럼] "대통령 당선인, 철탑 위 노동자를 직접 찾아가라"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 그는 왜 자결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국민행복을 약속한 대통령'이 가져다 줄 행복을 기다려야 했었는데.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의 절망의 깊이는 어디까지일까? 경제 부자 인재 성공 성장 경쟁력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대중의 차가운 무관심이 그의 절망의 깊이였을까? 사람을 몰아치며 이룬 산업화의 전략 말고 국가경쟁력을 확보할 길이 없다고 그 대중을 설득하는 지도자들의 야만성이 그를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했을까? 

아침에 일어나 일터에 가고 저녁이면 이웃과 세상 이야기하는 하루, 그 일상이면 두루 함께 살아가는데 모자람이 없다. 그 일상에서 맞이하는 이별의 슬픔과 만남의 기쁨, 그 슬픔과 기쁨의 힘이면 지적 도덕적 능력을 발전시키기에 충분하다. 앎을 갈무리하는 '공부'가 일과 이야기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앎을 갈무리하는 일상의 삶이라면, 종교도 민족도 계급도 지역도 그 어떤 것도 다른 사람을 내치는 명분이 되지 않을 것이며 차라리 관용의 인격을 연마하는 매체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런 개인과 사회의 공동체적 관계 방식에 붙인 이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일하고 이야기하는 능력과 태도를 기르는 교육 없이는 발전하지 못한다. 교육은 일상의 삶에 내재해 있는 공부를 '드러내어' 체계적으로 조직한 공부 기획이다. 요컨대 교육은 공부의 목적을 아이들의 학습능력 신장이라고 명확하게 표명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을 강구하는 제도적 활동이라는 것이다. 교육은 공부의 성과를 관리하기 보다는 공부의 과정을 관리하는, 말하자면 모든 아이를 학습의 장에 초대하는 '공'교육의 제도로 정착되었다. 아무튼 교육의 핵심 가치는 공부(혹은 학습)이다.

'공'교육의 체제를 운영하는 교육기관인 학교가 교육의 과정을 기획하고 그리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진다. 학교 밖의 모든 세력은 그 전문성에 신뢰를 보낸다. 그 때 학교는 교사의 일터가 되고 교사는 아이들의 지적 도덕적 성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공성을 대표하는 기관의 기획과 책임이 '공화'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저녁이 있는 삶이라고 했다. 저녁이 있다는 것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일하려 나가는 아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하게도 저녁의 삶과 아침의 삶이 없는 일상을 살고 있다. 
우리는 일상이 없는 전술을 구사하는 비상한 삶을 살아 왔고 살고 있다.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경쟁력은 개인의 유능과 성실에서 온다고 믿게 되었다. 유능과 상실은 남에게 보여주는 형체를 가진 실체라고 또한 믿게 되었다. 당연히 유능과 성실은 성과를 관리하는 처세술을 동반하게 되었다. 성공 인재 경쟁력 경제성장 성적 수월 같은 용어로 개인과 사회를 인식하게 되었다.

'고졸이 행복한 나라'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12년의 교육의 과정을 잘 관리하면 일하고 이야기하는 삶의 방식을 능히 선택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민주주의 사회발전 프로그램의 다른 표현이다. 국가 혹은 산업화 세력에 기대지 말고, 우리가 스스로 나서서 12년의 교육과정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운영하도록 교사들에게 간청하고 지원하고 압력을 넣자는 것이다. 등달아 사회분위기를 그렇게 몰아가자는 것이다. 한편 그들은 더 배우려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대학에 가는 것이 잘 못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학에 가는 선택은 '그'의 것이기에 그에게 맡긴다.  

행복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뒤쳐진 사람들에게 일하고 이야기하는 일상의 삶을 허락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일상의 삶은 일터와 친구가 있을 때 가능하다. 일하는 일터를 가지고 있지 않고 이야기 하는 친구도 없다면 그는 일상의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행동할 수 없고 공교육을 생각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일상의 삶에서 체험되고 반성되어 숙성되기에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에게는 경험을 뛰어 넘는 상상력의 힘이 있다. 그 상상력의 힘으로 인간 삶에 내재한 공부를 불러낼 수 있다.

원칙을 가지고 약속을 지킨다고 위상을 설정했으니 그 위상을 지속가능케 하기 위해서라도, 대통령 당선자의 상상력과 더 큰 공부를 기다린다. 일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철탑 위 노동자를 직접 찾아 가기를 간청한다. 서민 찾아 나서기는 조금 마음을 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지금하지 않아도 된다.

새해를 맞이한다. 엊그제 같이 마음을 나누었던 젊은 친구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이기고 지는 거야 인생사이니, 진 것에 애써 태연한척 할 필요 없고 그렇다고 진 것에 애통해할 것도 없습니다. 질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타난다고 하니 우리 자주 만나 잘 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김민남 칼럼 26]
김민남 / 교육학자. 경북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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