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 등 따시고 배부르면 다 오케이!"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13.01.17 17: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트럭 행상 아저씨 / 새벽 3시에 물건 떼..."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싱싱한 고구마, 감자, 고추, 계란, 사과 있어요. 고등어, 미주구리도 있어요" 한적한 주택 골목길이 트럭 확성기 소리로 요란하다. 야채, 과일, 생선이 실린 트럭 뒤로 주민들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반짝 한파가 찾아온 17일 오전. 대구 수성구 파동 일대에는 진눈깨비까지 내렸다. 이곳에서 13년 동안 야채, 과일, 생선을 팔아온 행상 최모(53.북구 칠성동) 아저씨는 이날도 1톤 트럭을 몰고 파동 골목길 곳곳을 누볐다. 오전 10시 30분, 트럭 확성기에서 아저씨가 녹음해 놓은 목소리가 울리자 동네 주민과 가게 주인들이 문을 열고 나와 아저씨 트럭을 따라왔다.  

파동에서 13년째 트럭 행상을 하고 있는 최모 아저씨(2013.1.17)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파동에서 13년째 트럭 행상을 하고 있는 최모 아저씨(2013.1.17)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백미러로 손님을 확인한 아저씨는 확성기 소리를 낮추고 트럭에서 내려 손님을 맞았다. 떡집 주인은 시래기 한 묶음, 40대 아주머니는 고등어 한 손, 산책하던 주민은 귤 한 봉지. 아저씨는 "금방 드릴게요"라고 말하고 봉지를 꺼내 귤을 담았다. 고등어를 손질하기 위해 장갑을 끼고 도마와 칼을 꺼내 순식간에 고등어 2마리 머리와 꼬리, 지느러미도 잘랐다. 시래기는 직접 떡집까지 배달했다.

아저씨는 "어제까지 덜 추웠는데 자고 일어나니 더 추워졌다"며 "겨울 날씨는 너무 변덕스럽다"고 코를 훌쩍거렸다. 흐르는 콧물을 소매로 정리하던 아저씨는 "매일 밖으로 돌아다녀서 웬만한 추위에는 끄떡도 없는데 나이 드니까 몸이 약해진 건지 말을 잘 안듣는다. 뜨뜻한 국물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귤을 봉지에 담고 있는 최모 아저씨와 값을 지불하는 손님(2013.1.17)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귤을 봉지에 담고 있는 최모 아저씨와 값을 지불하는 손님(2013.1.17)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퉤'하고 손에 침을 뱉은 아저씨는 바지 주머니에 있던 꼬깃꼬깃한 1천원, 5천원, 1만원짜리를 정리해 모두 2만1천원을 점퍼 앞주머니에 넣었다. 손바닥으로 한 번 더 주머니를 확인하고 고정시키듯 2번 '탁탁' 두드렸다. 트럭으로 돌아온 아저씨는 고등어 찌꺼기를 봉지에 버리고 잔돈으로 거슬러줄 지폐와 동전도 확인했다. 아저씨는 다시 확성기 소리를 높이고 느린 속도로 골목길 깊숙이 차를 몰았다.

아저씨의 하루는 매일 새벽 3시 북구 매천시장에서 시작된다. 이날도 아저씨는 새벽 3시 매천시장을 찾아 도라지, 고구마, 고추, 사과, 고등어, 미주구리(물가자미), 동태 등 이날 팔 물건들을 실어왔다. 국방색 천막으로 개조한 트럭 짐칸은 250만원 상당의 식재료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아저씨는 "한겨울 새벽 공기는 오줌도 얼릴 정도"라며 "모닥불에 서 담배도 피우고 하다 보니 겉옷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물건을 싣고 나면 새벽 6시쯤 집에 돌아와 부인과 아침 식사를 하고 그날 팔 물건 목록을 정리해 확성기에 틀 테이프를 녹음한다. 그리고, 다시 트럭을 몰고 식당에서 주문한 물건을 배달하고 오전 9시-10시쯤 파동에서 장사를 시작한다. 10년 넘게 한 동에서만 장사를 하다 보니 고정적으로 아저씨와 거래하는 식당도 생겼고 단골도 많아졌다. 때문에, 물건을 사지 않는 주민도 인사를 하곤 했다.

손님에게 거슬러 줄 잔돈을 준비하는 최모 아저씨(2013.1.17)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손님에게 거슬러 줄 잔돈을 준비하는 최모 아저씨(2013.1.17)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아저씨는 90년대 후반까지 식재료 도매장사를 했다. 물류창고에 번듯한 가게까지 있었다. 그러나, 경영 실수로 3억원 상당의 식재료가 모두 썩어 가게를 접게 됐다. 몇 달 동안 회사에서도 일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뒀다. 그때 스트레스로 아저씨는 당뇨병과 위염까지 얻었다. 아저씨는 "집사람은 나만 보고, 아들이랑 딸내미는 한참 클 때고...나 믿고 사는 가족들이 있는데 쉴 수 없었다"며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자영업 밖에 남은 답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트럭 행상은 그렇게 해서 접어들게 됐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아저씨는 "적성에 맞았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말렸던 가족들도 가장의 선택을 응원해줬다. 하루에 100만원 어치를 팔면 손에 30만원은 남았다. "살 길이 열렸었다"고 아저씨는 당시를 기억했다.

그러나, 여름철에는 더위 때문에 재고가 썩어 나갔고, 겨울철에는 폭설 때문에 아예 장사를 하지도 못했다. 또, 화물차, 택시와 연달아 교통사고가 나 배상금을 물기도 했으며, 동네마다 들어선 대형마트는 하루 수입을 절반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아저씨는 오후 2시만 되면 손해를 보더라도 재고품을 떨이로 싸게 판다. 그래도 재고가 남으면 저녁 늦게까지 장사를 이어간다. 이렇게 해서 한 달에 150-200만원정도 손에 쥔다.

최모 아저씨의 외상 장부(2013.1.17)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최모 아저씨의 외상 장부(2013.1.17)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대부분 물건 값으로 나가고, 트럭 기름 값도 한 달에 60-70만원을 쓴다. 점심 식비와 유일한 낙인 담배 값도 만만치 않다. 아저씨는 "손님이 하루에 100명 와도 수중에 10만원도 안남는다. 경기가 어려워 지갑을 안연다"며 "외상 장부만 길어지고 갈수록 어렵다. 하루 벌어 하루 산다"고 씁쓸히 말했다.

다행히, 두 자녀가 모두 출가해 예전보다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부담은 줄었지만 아저씨는 지병이 걱정이다. "두 달째 금주도 하고 쌀밥도 피하는데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다. 하루 종일 트럭에서 지내고 담배를 펴서 그런가..."라고 혼잣말하던 아저씨는 어두운 표정으로 담배를 피웠다. 그래도, "할 일이 있고, 먹고 살 수 있어 다행"이라며 "가족들만 등 따시고 배부르면 다 오케이!"라고 밝게 웃음 지었다.

[평화뉴스 - 길 위에 서민 5 (전체 보기)]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