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전단지 돌리는 동성로 할머니들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13.01.07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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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급 2천원~5천원 / "잘 받아주지도 않고...이거라도 해야 연탄이라도 사지"


"전단지 받아가세요. 고맙습니다"


길에서 불쑥 종이를 든 손이 다가왔다. 전단지 돌리는 할머니들이다. 받아주는 사람도 있고 받지 않는 사람도 있고 받자마자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할머니들은 몇 시간이고 길에 서서 묵묵히 전단지를 돌렸다.    

김모(80.남구 이천동) 할머니는 4년째 전단지 돌리는 일을 했다. 노래방, 오락실, 미용실, 식당, 학원, 유흥주점 등 해보지 않은 가게가 없다. 6일 저녁 대구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에서도 김 할머니는 1천장의 간장게장 음식점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이날 한파는 수그러들었지만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김 할머니는 마스크, 목도리, 모자, 양말 3켤레, 장갑 2장에 윗도리만 5겹을 걸쳐 입었다. 그래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김 할머니는 한파와 폭설 때문에 감기에 걸려 마스크 위로 흐르는 콧물을 계속해서 닦았다. 하늘색 마스크가 콧물 때문에 짙은 파란색으로 변했다.

동성로에서 전단지를 돌리는 김모 할머니(2013.1.6)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동성로에서 전단지를 돌리는 김모 할머니(2013.1.6)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김 할머니는 오후 1시부터 8시까지 전단지를 돌렸다. 가게 주인이 전단지를 돌릴 장소를 정해 준 뒤 전단지를 주면 바로 일이 시작된다. 모든 전단지를 돌리고 가게로 가면 일당을 받는다. 이날 김 할머니의 시급은 2천원. 7시간을 서서 일하고 일당 1만4천원을 벌었다.

원래 김 할머니는 봉제공장에서 ‘미싱일’을 했다. 초등학교만 졸업해 중학교 문턱은 밟지 못했다. 공장에서 남편을 만나 18살에 결혼해 3남1녀를 낳았다. 넉넉하지 않았지만 맞벌이로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40대 중반에 남편과 사별하고 생계가 어려워져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식당, 세차장, 병원 등에서 서빙을 하고 청소도 했다. 폐지와 고물을 팔기도 했다. 결혼한 자식들은 모두 품을 떠났고 지금은 할머니 혼자 살고 있다.   

전단지 돌리는 일은 옆집 할머니가 소개시켜줬다. 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식들이 가끔 부치는 용돈에만 기대 살수 없었다. 김 할머니는 "손이 저릿저릿하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이 나이에 받아주는 데가 어딨노. 이거라도 해야 연탄 1장이라도 사지"라고 말했다.

또, "자식들은 '어무이 웬만하면 그 일 하지마소'라고 말려도 지들 새끼 키우느라 코가 석잔데 어떻게 맨날 용돈만 받아 쓰겠냐"며 "그카면 내가 짐이제. 나이 들어도 사지 멀쩡한데 뭐라도 해야 안되겠나"고 웃으며 말했다.

로데오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는 박모 할머니(2013.1.6)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로데오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는 박모 할머니(2013.1.6)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대구백화점 주변 로데오거리에서도 2명의 할머니들이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박모(72.남구 남산동) 할머니는 한우전문점, 최모(63.서구 평리동) 할머니는 노래방 전단지를 돌렸다. 박 할머니는 "오늘 날씨는 그래도 따뜻한 편이어서 다행"이라며 "눈 내리고 비오면 얼마나 힘든지...종이도 젖고 사람들이 잘 받아주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배운게 없으니 이거라도 해야 먹고 산다"며 "어디 받아 줄데도 없다"고 씁쓸히 말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자 박 할머니는 느린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전단지를 내밀었다. 그러나, 한 사람도 받지 않자 머쓱하게 손을 빼고 남은 종이를 셌다. 400백여장이나 남았다. 박 할머니는 "많이 남았다"며 "유난히 잘 받아주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단지를 돌리던 최 할머니를 불러 "화장실에 잠깐 다녀온다"고 말하고 전단지를 최 할머니에게 맡겼다.

이들은 7-8시간씩 일하는 동안 식사를 할 수 없다. 일을 마쳐야 허기를 채울 수 있다. 화장실도 주변 음식점이나 카페를 이용해야 한다. 그때가 유일한 휴식시간이다. 잠시 앉아 쉬고 싶어도 주인들이 감시를 나오기 때문에 쪼그려 앉을 수도 없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박 할머니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양손에 전단지를 나눠 쥐고 일의 속도를 올렸다.

함께 전단지를 돌리는 최모 할머니와 박모 할머니(2013.1.6)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함께 전단지를 돌리는 최모 할머니와 박모 할머니(2013.1.6)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그때, 최 할머니가 박 할머니에게 다가와 "저 우에 사람 더 많다. 거기서 하자"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최 할머니는 "전단지 받아가라고 말해서 목소리가 갈라졌다"며 "마스크 껴도 소용도 없다"고 털어놨다. 또, "여기는 아는 사람들도 많아 챙피하다"며 "가려도 알아보는 사람은 알아보니 장소를 옮길 수 밖에..."라고 말끝을 흘렸다.

그나마, 두 할머니 시급은 5천원이었다. 대구백화점 주변에서 하던 김 할머니의 2배였다. 한 팀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도 더 자주 들어왔다. 많이 벌 때는 80만원 가까이 번적도 있다. 그러나, 평균 40-50만원 선을 넘기는 힘들다. 

최 할머니는 "누가 2천원을 받고 일하냐"며 "평균이 5천원"이라고 했다. "아마 할매가 나이가 많아서 속은 것 같다"며 "정말 안타깝다"고 혀를 찼다. "갈데 없는 노인들이 이 일 많이 하니까 가끔 그렇게 짜게 주는 데가 있다"며 "천벌 받을 사람들"이라고 화를 냈다. 이어, 박 할머니는 "전단지 돌리는 사람 구하는데 없냐"며 "10명 정도는 모을 수 있으니 가게 좀 소개시켜 달라"고 진지하게 부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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