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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의에 빠진 국채보상ㆍ문화인 보도
<매일><영남> 서상돈ㆍ박태준 '친일' 침묵...이쾌대 '창조ㆍ민족성' 새겨야
2013년 02월 12일 (화) 14:12:03 평화뉴스 pnnews@pn.or.kr

보도와 선전의 차이는 뭘까. 객관성과 주관성? 사실과 왜곡? 아니면 균형과 정파성? 적어도 우리지역 메이저 신문들이 독자들의 문화 향유와 역사 교육을 위해 동원하는 지난 세대 인물들에 대한 보도의 원칙은 정말 의아스럽다. 인물과 시대 배경·맥락을 제거한 눈먼 지역주의,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매일신문은 지난 5일과 7일 화가 이쾌대와 국채보상운동의 두 주역 김광제·서상돈에 대해 각각 다뤘다. 이쾌대는 「탄생 100주년 ‘미완의 화가’이쾌대 <상>인생역정」이란 눈을 붙이고 「조선신미술가協 결성해 일제에 저항…좌익 몰리자 월북」이란 제목을 붙였다.(22면 문화). 김광제·서상돈은 「대구사랑 대구자랑」이란 기획의도가 엿보이는 눈을 붙이고 ‘국채보상운동’ 편에 「나라의 위기 때마다 똘똘 뭉친 우국충정의 본향」이란 제목을 붙여 다뤘다.(14면 특집).

   
▲ <매일신문> 2013년 2월 7일자 14면(특집)

미ㆍ일 '밀약'-거액 차관 제공 배경 외면

국채보상운동의 두 주역 보도가 무엇을 부각했고 무엇을 가렸는지 먼저 보기로 하자.
대한제국시기, ‘정한론’(征韓論)으로 한국을 정복하기로 한 일제가 노렸던 것은 당연히 한국의 수족을 꽁꽁 묶어 일제의 조종에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일제는 크게 봐서 침략노선을 밟았다. 하나는 군사·외교적 노선이고 하나는 경제적 노선. 군사·외교적으로 채택한 길은 미국과 식민지 갈라먹기 협정 체결이었다.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는 것을 일본이 인정하는 대신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는 것을 역시 미국이 인정하는 것, 이른바 태프트(Taft)-카츠라(桂) 비밀협약이다. 미국 대통령 데오도어 루즈벨트의 특사인 국무장관 태프트와 일본의 수상 카츠라가 비밀협상을 벌이고 1905년 7월 체결한 협정이면서도 공개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비밀협약’으로 불린다.

일제는 만주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점령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각오였기 때문에 그것을 뒷받침할 군사적 배경과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제는 미국과의 묵계 아래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고, 전쟁이 미국의 중재 아래 끝나자 일제는 러시아와 치른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한국이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문명한 대국 일본과 미국이 한국과 필리핀을 집어 삼키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다른 한편으로 일제는 한국에 선심 쓰듯 대거 차관공세(차관액 1,300만원)를 벌이고는 채권국이 빚쟁이를 어떻게 다루는 지를 자본주의 논리를 내세운 열강의 식민지 경쟁 분위기 아래 한국에서 시범을 보였다. 태프트-카츠라 밀약이 체결되자 일제는 숨 쉴 겨를도 없이 식민지의 틀인 ‘을사조약’을 강행했고 이어서 한국경제를 일제의 침략아래 예속시켰다. 이것이 국채보상운동의 시대적 배경이다. 우리 민족에겐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 국채보상기성회취지서 /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7일자 3면 사설

국채보상운동의 두 주역에 대해 필자는 ‘미디어창’에서 이미 다룬 바 있지만 일제와 그 하수인들이 한국에서, 또는 범위를 좁혀 대구에서 어떤 놀음을 했는지를 보기 위해서 다시 살펴본다.  

일본인들과 백동화 보급, 폭리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한 1907년 당시 대구지방에는 일본인 재무감독국장 카와카미 츠네로오(川上常郞)가 재무보좌관으로(1911) 취임을 준비 중이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한 바 있는 카와카미는 처음 재정감찰관으로서 대구에 왔을 때 재무감독국이 잠시 설치된 적이 있었다. 카와카미는 재무감독국장이 되었는데, 감독국은 경상남북도 두 도의 재무를 지휘, 감독하고 은행․금융조합의 감독, 통화를 정리하여 엽전의 회수, 신화(新貨-일본 제일은행권을 가리킴) 및 국유지의 정리, 재원조사 등 사무범위가 자못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 카와카미는 대구재무감독국장이 된 인물인데, 대구의 왕년 사교계 황태자였다.

김광제·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당시 서상돈이 사용한 일본 제일은행권 보급 방법은 독특했다. 바로 민족경제 역량을 밑바탕으로부터 무너뜨리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제 서상돈이 사용한 일본 돈 백동화 보급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무이자로 대부받아 고리 취해


카와카미의 백동화 보급 방법은 탁월했다. 바로 무이자 대부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인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자.카와카미는 먼저 국채보상운동 주창자 서상돈(徐相敦), 정재학(鄭在學), 정해붕(鄭海鵬) 그리고 이와세 시즈카(岩瀨 靜)를 일단으로 하는 무이자 대부단을 구성한다. 카와카미가 사용한 방식은 5전 짜리 백동화 30만원을 무이자로 대부하는 것. 자본금 10만원의 익명 조합에 백동화 20만원을 무이자로 대부했다.

   
▲ 국채보상지론 / <대한매일신보> 제475호. 1907년 3월 31일자 부록 2면.

한국 돈 사용 원천 차단

무이자 대부를 받는 대상은 이와세 만이 아니었다. 다른 대상자들에게도 2만~3만원을 융통받는 길이 열렸다. 대부의 조건은 이러했다. 그 백동화가 한인(韓人)들에게 흘러들어가기만 하면 좋고, 돈이 대부되면 되고, 물품을 구입하게 되어 대한제국 화폐인 엽전 대신에 백동화가 사용되면 되는 것.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가능했고 이익을 내는 일이 적지 않았다. 대구묘포용지 2만평의 매수, 공소원 부지, 재판소관사 용지 매수에는 대부분의 한인에게 신화(新貨)가 지불되었다. 이리하여 무이자로 대부된 신화(新貨)는 만 2년 만에 회수되었다.

1년 만에 이자를 원금의 2〜3배로 늘여

그러면 일제의 경제침략 앞잡이인 이들은 어떤 경로를 이용했으며 누린 이익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 1900년 초 이미 대구를 쥐락펴락한 카와이 아사오(河井 朝雄)가 쓴 『대구이야기』(大邱物語) 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카와이 아사오는 일제 침략 당시 대구 일인 사회의 거물이자 한인들의 배후인물로서 「조선민보」란 대구 유일의 일본 신문 발행인이었다.


대구농공은행-명치 39년(1906년) 3월에 한국은행조례가 발포되어 경성에는 한일(韓一)은행이 설립됐다. 동시에 농공은행조례도 나와 전도 추요지 11개소에  농공은행이 설립되게 됐다. 자본금 30만원의 대구농공은행을 설립한 것은 그해 6월 이었다. 농공은행의 주식은 일본인은 가지지 않았다. 만약 일본인이 가져도 작명은 한인을 위장하고 있었다. 이와세 시즈카(岩瀨 靜)) 군이 상당한 대주(大株)를 가지고 있었지만 서정돈(徐正敦)이라고 하는 이름에 감추어져 있던 것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기타 일본인에 다수의 주주가 있었지만 모두 같은 모양이었다. 예를 들면 「카와이 아사오 방 최영옥」(河井朝雄 方 崔榮玉)이라고 부른 방식으로 나도 10주를 가지고 있었다.…
市金의 계산법-이른바 고리대의 이식(利息)은 최저가 월 4부(100원에 하루 이자 3부 强)로, 최고는 월 1할2푼이라고 하는 방식이었던 『시금』이라고 하는 것은 시일(市日)마다 이식을 지불하고, 원금을 감하여 가는 방식으로 대개 10관문(貫文)을 한도로 하고 그 범위 안에서 시 상인이 융통하는 것이다. 가령 1관문을 대부하여(주고) 매 시일(市日)에 20문씩의 이식을 취하면 월 6회의 市에 120문의 이자가 발생한다. 이율은 즉 1할2푼에 상당하다. 일본에는 옛날 까마귀돈(烏金)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까마귀가 까-까-하고 울 때 마다 이식이 가산된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믿을 수 없지만 한국의 시금(市金)은 도처에 있었다. 10원의 원금이 1년을 경과하면 중리(重利)로 계산하면 25〜26원이 된다. 교묘(巧智)한 돈놀이(金貸)가 (큰돈으로) 불렸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서상돈, 국채보상운동 발기 끝내자 손 떼

10원이 1년 사이에 25〜26원이 되는 수탈적인 돈놀이가 바로 일본 돈 백동화 보급 과정이었다고 카와이 아사오는 말한다. 외국인 금융기관 침투를 막기 위한 규정을 무시하고 한국인 이름과 주소를 빌리는 방식으로 대구농공은행의 대주주가 되기도 했다. 카와이 아사오가 빌린 이름 서정돈(徐正敦)은 누구를 떠올리는가? 한국 돈 엽전의 유통을 차단하고 일본 돈 백동화를 무이자로 대부받아 거액의 폭리를 취하면서 보급한 이와세-서상돈-정재학-정해붕 일당이나 그 외 침략주의적 일인들의 한국인 수탈은 이랬다.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 발기를 마치자 이내 이 운동에서 손을 뗀다. 자기 사업과 종교 생활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카와이 아사오가 밝혔듯이 일본 돈 백동화를 한국인을 상대로 유통시켜 수탈적 폭리를 취한 것이 실상이었다. 서상돈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서상돈 명예불명'/ <공립신보> 제66호. 융희2년(1908년) 1월 22일자

이와는 달리 1906년 대구에서 광문사를 창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한 김광제는 서상돈과 함께 대구 대동광문회에서 국채보상취지서를 발기한 인물이면서도, 국민 된 의무를 저버리고 수수방관의 길을 걸은 서상돈과는 달리 교남교육회 등에서 학교를 세우고 교재를 출판해 보급하는 한편 노동운동․민족교육 등 민족운동, 국권회복의 길을 함께 걸음으로써 1920년 제2의 3·1운동 거사를 전개, 항일투쟁-국권회복을 전면에서 지휘하다 1920년 7월 24일 경남 마산에서 순국했다.

진실 관련 배경ㆍ맥락 빼버려

매일신문은 국채보상운동이란 민족사로 볼 때 기념비적인-비록 일제의 탄압과 간섭으로 실패했지만-운동을 부각하려 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배경과 맥락이 앞에서 보듯 빠졌다. 이 부분은 진실문제와 관련이 있는 대목이다. 매일신문이 지역주의에 빠진 것은 국채보상운동이 애당초 대구가 아닌 동래(부산상무소)에서 시작된 사실을 눈감고 있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 사실은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7일자 기사와 1907년 3월 31일자 부록에서 확인된다. 학자들도 이 사실을 인정한다. 민족경제 수호, 나라 지키기 차원에서 선각자들이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을 진실과 관련 있는 배경과 맥락을 빠뜨린 채  보도하고, 그 것도 「대구사랑 대구자랑」에만 머문다면 ‘우국충정에 똘똘 뭉친’ 「대구사랑 대구자랑」의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쾌대, 민족·미술 순수성 위해 뛰어

우리나라 격동기를 미술운동으로 살다 간 이쾌대에 대한 기사는 자못 흥미진진하다. ‘이인성과 함께 수창초교 동기/“뛰어난 데생력 미술 권유받아/인물화 등 새로운 양식 개척/부인이 남편 작품 소중히 지켜」란 작은 제목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 기사도 이쾌대의 미술운동 인생의 배경과 맥락을 빠뜨리기는 매 한 가지다.

   
▲ <매일신문> 2013년 2월 5일자 22면(문화)

「조선신미술가協 결성해 일제에 저항…좌익 몰리자 월북」이란 제목으로 강조했듯이 ‘1934년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했고, ‘1941년 조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일제의 침략전쟁 동원 분위기 아래서도 신미술가협회는 ‘(권력 앞에서는 납작 엎드리는) 지식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고작이다.

한 마디로 이쾌대가 친일의 암흑 속에서 민족과 미술의 순수성을 지키려 한 활동, 그림과 미술운동으로 보여준 봉건적인 사상 타파, 민족미술, 미군의 독도폭격(1948. 6.)으로 어민들이 수도 없이 죽어갔고 이에 따라 국민이 분노하는 데도 유야무야 하는 미군의 만행이 해방공간에서도 버젓이 자행되는 데서 드러나는 약소민족의 비애, 그리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몸부림친 해방공간 이쾌대의 미술 삶은 외면했다.

   
▲ 이쾌대, 군상Ⅳ
새로운 창조기법으로 시사성, 풍부한 표정, 인물의 역동적 동체를 묘사한 「군상Ⅳ」(1948)이나, 그 선구적 작품으로, 봉건적이고 부조리하며 암울한 세태에 과감하게 그러나 미래를 내다보며 응전하는 「상황」은 이쾌대가 서양화의 수용자 수준을 넘어 민족과 민중의 고민을 독창적으로 완성도 높게 표현하고 있는 독보적 작품이 아닐 수 없는데도 말이다.

배경과 맥락에 눈감는 것은 이쾌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이점은 매일신문이 문화 관련 보도에서 중요하게 등장시키는 인물에서 항용 찾아볼 수 있다.

이인성을 포함한 해방공간 미술인 이력

먼저 이쾌대, 미술운동의 배경과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이인성의 해방공간 미술운동 이력을 대강 정리하면 이렇다. 이쾌대는 1946년 11월 10일 창립된 조선미술동맹의(위원장 윤희순)의 서양화부 회원이었다. 부위원장은 이인성, 오지호. 이인성은 당일에 창립된 조선미술동맹 서울지부(위원장 길진섭)의 집행위원으로서 미술 대중화운동을 주도했다. 이쾌대는 이에 앞서 1946년 2월 28일 창립됐다가 조선미술가동맹(위원장 김주경·박문원)과 합동하여 조선미술동맹으로 개편된 조선조형예술동맹(위원장 윤희순·길진섭)에서 김기창 등과 함께 회화부 위원이기도 했다. 회원 중에는 이중섭도 보인다. 이 무렵 대구에서도 경북미술연구협회가 발전적으로 해소되고 미술동맹 대구지부가 결성됐다(1947. 6. 18) 이들 단체의 강령을 보면 ‘제국주의적 봉건적 잔재를 숙청하고, 건실한 신미술을 수립할 것’ 등을 한 결 같이 강조하고 있어 해방공간 미술인들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쾌대의 월북과 관련해 매일신문은 1949년 이승만 정부가 이쾌대를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키고 반공포스터를 그리도록 강요한 사실, 어머니 병환으로 미처 피란하지 못한 이쾌대가 혼란에 빠진 사실 등을 다뤘다. 이쾌대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빠져나왔고 곧 국군에 체포됐으며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1953년 휴전이 되자 북을 선택해 갔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이쾌대는 부산 100수용소에 수용돼 있었고 수용소장의 배려로 부산에 그림 재료를 구입하러 나오기도 했다. 1950년 11월 11일에는 그의 아내(유갑봉) 앞으로 편지를 보내 가족들을 사랑하는 애틋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매일신문은 이런 내용을 1995년 김진송이 펴낸 『이쾌대』를 주로 인용해 다뤘다.

'지역성'은 분위기만…
 
그러나 이쾌대의 미술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이뿐이었을까? 1942년 ‘조선신미술문화 창정대평의’(토론회. 잡지 『춘추』 기획)는 어떤가. 1945년 덕수궁 미술관에서 개최한 ‘해방기념 미술전람회’ 역시 다룰 만하지 않았을까. 이 미술전람회는 이쾌대와 그의 형 이여성(이명건), 화가 겸 미술평론가 김용준 등이 함께 출품했고 대구의 지역성·그림·경향파라는 공통점으로 연결될 수 있어 주목받은 전람회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쾌대 <상>편은 ‘지역성’이란 분위기만 잡았을 뿐이다. 그림의 특색, 화풍 변화 등과 관련해 <하>편 기획에서 이쾌대가 강조한 그림, 미술운동의 핵심과 관련해 충실도가 보강되기를 바란다. 

반성하지 않는 친일…독자들은 뭔가

신문의 사명은 균형 있는 비판이다. 그것은 사실에 바탕을 둬야 한다. 매일신문이 지면에 등장시킨 사라진 대구의 문화인 보도 경향에서 보듯 출세와 유명세가 전부인양 한다면(이 점에서는 영남일보도 마찬가지다. 매일신문, 2011년 9월 27일자 25면(문화) 「“대구 국제음악제” 능력 충분」 , 영남일보, 2011년 9월 29일자 19면(문화), 「대구음악의 역사적 가치 제대로 알리자」) 그것은 대구의 문화지형도를 왜곡할 뿐이다.

   
▲ <매일신문> 2011년 9월 27일자 25면(문화)
   
▲ <영남일보> 2011년 9월 29일자 19면(문화)

무엇이 ‘역사적 가치’란 말인가. 이민족의 지배라는 참혹한 역사(생활)를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미디어창’에서 ‘부동의 일제 관제음악가’인 현제명과 박태준의 친일 이력을 들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한 예로 춘원 이광수가 가사를 쓰고 박태준이 작곡한 「지원병장행가」(志願兵壯行歌)는 조선청년들을 일제의 총알받이로 내몬 ‘작품’. 이런 ‘작품 활동’은 이 시대 문화계를 주도한 현제명이나 박태준 등이 일본정신으로 무장한 일제의 하수인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배신행위였다.

   
▲ 박태준의 지원병장행가

그런데도 우리 대구의 매일신문, 영남일보 등 메이저 신문은 그런 점에 착안하려 하지 않았다. 이미 고인이 된 본인들이 친일(민족배신)을 반성하지 않았는데 언론마저 이 사실을 외면한다면 독자들(문화향수자-국민)은 그럼 뭐란 말인가?

눈먼 지역주의, 균형 잃은 신문보도를 보는 독자들-국민의 시선은 차가울 뿐이다.

   





[평화뉴스 - 미디어 창 220]
여은경 / 대구경북민주언론시민협의회 사무처장. 전 대구일보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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