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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맥락과 편향
[매일신문] '서상돈 주도' [TBC] '대구에서 시작'...사실은?
2013년 02월 26일 (화) 08:54:52 평화뉴스 pnnews@pn.or.kr

기자가 보도하면 독자들은 사실로 여기던 시대가 있었다. 기자가 진실보도를 하리라 여기던 시대엔 그랬다. 지금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운 독자·시청자들은 ‘확인하기 어려움’ 때문에 보도에 맡겨둘 뿐이다. 그만큼 기자의 사실 확인보도의 책무-사실보도, 공정보도, 균형보도-는 더 커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때 독자-시청자들은 으레 사실인 것으로 확인하지 않은 타성의 그늘 속에서 ‘사실 아님’-오해·착각의 그늘 속에 자신도 모르게 파묻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확산될 때 한 지역은 통째로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같은 잘못됨, 편향됨, 반쪽만 전달하기가 반복될 때 지역주의로 고착된다. 대구지역 언론의 국채보상운동 보도-‘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대구국채보상운동은 서상돈 주도’의 잘못된 보도 틀-가 그렇다. 

   
▲ <매일신문> 2월 23일자 18면(종교)

○○○○의 할아버지인 정재문 선생의 검소함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살아있는 본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평생의 좌표가 되었다고 했다. 정재문 선생은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서상돈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대고, 교육 및 자선 사업에 투자하는 돈은 아끼지 않았다.(매일신문 2월 23일자 18면 「“할아버지 교훈 따라 한평생 나눔 실천”」

'그늘 많은' 서상돈이 중심 인물?

매일신문이 지난 2월 23일 대구지역 천주교 모 인사의 동정을 보도한 한 토막이다. 매일신문은 이 보도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서상돈 선생’이라고 했는데 독자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서상돈 선생’은 ‘반의 반쪽의 사실이다. 왜 그런가 하면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서 그렇고, 서상돈은 대구국채보상운동 발기취지서를 발표한 여러 인물 중 한 사람이라서 그렇고, 대구국채보상운동 발기인이면서도 곧 국채보상운동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다.

   
▲ '서상돈 명예불명'/ <공립신보> 제66호. 융희2년(1908년) 1월 22일자

서상돈이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 등 여러 인사들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발기(1907. 2.)할 무렵 카와카미 츠네로오(川上常郞, 1907. 1. 대구재무보좌관 취임. 그는 대구재무감독국장이 되었는데 재무감독국은 경상남북도 두 도의 재무를 지휘, 감독하고 은행과 금융조합의 감독, 통화를 정리하여 대한제국 화폐인 엽전의 회수, 신화(新貨-일본 제일은행권을 가리킴) 및 대한제국 국유지의 정리, 재원조사 등 식민지화  준비 사무가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 아래 백동화 무이자 대부 익명조합(대표 이와세 시즈카)을 꾸려 일본 제일은행 발행 백동전을 무이자로 대부받아 대한제국의 화폐경제를 일본 화폐로 ’정리‘, 일본경제에 예속시키는 활동을 이와세 시즈카(岩瀨 靜) 등 대구 일본인 거류민회 유지들, 정재학·정해붕 등과 함께 대구지역에서 벌인 사실을 당시 대구 일본거류민회 간부가 회고록(『대구물어』)에 자세히 적고 있는 대목에 이르면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서상돈 선생’ 보도와 관련해서 기자의 책무는 사실 확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을 독자-시청자들은 제기하게 된다.

   
▲ <매일신문> 2013년 2월 7일자 14면(특집)

김광제 등 주도인사 역할 외면

대구국채보상운동 보도에서 대구의 언론들은 유독 ‘서상돈’만 집중 보도한다. 국채보상운동취지서를 함께 발표한 다른 인사들, 심지어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에 대한 보도는 ‘들러리’가 아닐까 할 정도다(매일신문 2월 7일 14면  「대구사랑 대구자랑」). 국채보상운동 당시 서상돈 외의 인사들의 역할이 거기에만 머물렀을까? (김광제는 국채보상운동 이후 국민교육·노동운동을 전개하며 항일투쟁을 했고 제2의 3·1운동을 전개하다 1920년 7월 24일 경남 마산에서 순국했다.)

기자가 다루면 기사가 되고 다루지 않으면 (독자-시청자가 모르므로) 기사가 되지 않는 셈인데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됐다’는 대구언론의 보도흐름도 그 하나이다.

대구에서 시작했다?


   
▲ TBC 아침뉴스 2013.2.20

지난 2월 20일 TBC 보도.


국채보상운동의 의미 되새긴다

구한말 일본에게 진 나라 빚을 갚아 주권을 되찾겠다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됐는데요
올해로써 106주년을 맞이하는 국채보상운동의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 ○기자입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천3백만원을 갚아 주권을 되찾자며 시작됐습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하는 전시회가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오는 24일까지 계속되는 전시회에는 국권 회복을 위해 국민들이 벌인 다양한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자료 50여 점이 전시됐습니다. 국채보상운동 영수증과 취지서, 모집금 조사표, 신문에 실린 국채보상기성회의금 광고와 논설 등 입니다.

(장재선/대구시 대명동) "(이런 운동이) 계속됐으면 좋겠습니다. 대구에서 일어나서 뿌듯하구요."
전국으로 퍼져나간 국채보상운동은 3.1운동으로 번졌고 이 정신은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진형/대구흥사단 부장) "청소년들 올바른 국가관과 역사관을 심어주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없이 온 국민이 참여한 국채보상운동 106주년 기념식은 모레(내일) 오전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 열립니다. (스탠딩) "106년 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나라가 어려울 때 모두 힘을 합쳐 국난을 극복하는 민족정신의 바탕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TBC ○ ○입니다."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짚고 이 운동이 그 뒤 어떻게 계승, 발전돼 왔는가를 다룸으로써 그 의미를 현대에 계승하자는 보도인데 대구 국채보상운동 관련 자료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전시하는 것을 계기로 다룬 보도다. 대구의 어제와 내일을 조감한다는 점에서도 짧지만 눈길을 모았다.

하지만 기자의 ‘무심결 보도’는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바로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됐는데요’ 대목. 과연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됐’던가?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된 것으로 (신문·방송이 보도해서 그런 줄로) 알아 왔던 독자-시청자들로서는 당혹스럽겠지만 국채보상운동이 대구 아닌 다른 지역에서 시작됐다는 보도는 대한제국 당시부터 있었다. 이제 그 보도 몇몇을 보자.

   
▲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7일자 3면(잡보) '국채보상기성회취지서'

동래에서 시작, 대구에서 취지서 작성

“다행히 지금 영남의 동래, 대구 등처에서 여러 군자가 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자는 논의를 제창하여 발기한지 며칠 되지 않아 헌금을 내는 사람이 잇따라 우리 인민의 애국심이 내 집 일 같음을 보여주니”(…今幸嶺南之東萊大丘等處에 諸君子가 創止煙報債之論ㅎㆍ야 發起 不幾日에 捐輸者가 日至ㅎㆍ니 可以見我人民에 愛國如家ㅎㆍ니…)라고 하고 있다.(<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7일자 3면 잡보 「국채보상기성회취지서」


   
▲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31일자 부록 2면 '국채보상지론'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31일 부록 2면 광고에도 “국채보상논의가 부산에서 시작하여 이에 대구에 미치고 전국에 두루 퍼져 기성회와 의무소는 곳곳에 흥기하고 취지서와 권고문은 집집마다 울려 퍼져…”(國債報償之論이 始自 釜山으로 爰及大丘허고 輪布全國ㅎㆍ야 期成會와 義務所ㄴㆍㄴ 處處 興起ㅎㆍ고 趣旨書와 勸告文은 家?鼓動허여…”)라고 하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이 동래(부산상무회의소)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은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0일 4면 광고, <황성신문> 1907년 3월 11일 4면 광고에서도 확인된다.

   
▲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10일자 4면(광고) '동래부국채보상일심회취지서'

그러면 국채보상운동 전개 양상에 대해 당시 우리지역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2일 1면에 실린 ‘발기인 리승희 배우홍’ 명의의 「경북성주군의무소국채보상취지서」 는 국채보상운동 전개 양상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오호 담배를 끊어 (일본에 진) 국채를 갚자는 의논은 동래에서 발의하고 대구에서 문장을 만들어 서울(경성)에 도달하고 전국 각도에서 외쳤다…’(…嗚呼 禁煙상債之議 口於萊港文於達府達于경城聲于列省…)


   
▲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2일자 1면 '경북성주군의무소국채보상취지서'

국채보상운동이 이런 경로를 거쳐 전국적 항일 저항운동으로 전개된 사실은 블라디보스톡(해삼위)에서도 알려져 이 도시에 몰려 있던 우리 한민족 항일 애국지사들이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블라디보스톡의 국채보상운동은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됐는데(1907년 5월 15일 1면) 이 역시 국채보상운동이 동래에서 먼저 전개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해삼위에  주재한 한국인사 등이 조국사상으로 국채
보상금을 모집하야 본사에 전치하고 취지서가 여좌함


…담배를 끊어 국채를 보상하자는 논의가 동래에서 시작하여 대구에서 소리를 높였고 경성에 퍼져…(…止烟償債之論이 始於東萊港ㅎㆍ야 聲於達府ㅎㆍ며 張于京城ㅎㆍ야…)

   
▲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15일자 1면

민족적 저항·각성운동…넓은 시각에서 다뤄야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시대 일본이 차관제공이란 명목 하에 대한제국을 정치경제적으로 속국-식민지화하려는 침략에 맞서 대한제국 국민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전개한 민족적 저항이자, 특정 관료세력들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정책을 자신들의 이해득실 판단에 따라 대책 없이 주도한 국가(대한제국)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민(民)이 나설 수밖에 없음을 느끼고 행동으로 옮긴 민족각성운동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그러한 배경아래 부산 동래에서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한 인사들(부산상무소 회원들)이 시작했고 이 운동을 대구에서 이어받아 취지서를 작성했으며 마침내 서울과 전국 각도로 확산된 것이다.

이런 경로를 거쳤는데도 유독 ‘대구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에 맞선 민족적 항일 저항운동의 배경과 취지를 왜곡하거나 옹색하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미국에서 안창호 등이 발행한 공립신보는 국채보상운동 발기취지서를 싣는 등 김광제·서상돈에 대해 처음에는 우호적인 보도를 했지만 그 후 서상돈에 대해서는 「명예불명」 제목으로 비판적인 보도를 했다.)

국채보상운동 보도에서 특정인을 강조하는 매일신문이나 국채보상운동의 맥락을 잃은 TBC 보도에서 문제되는 것은 언론보도를 기정사실화 하거나 진실로 믿는 항간의 경향에 비추어 편향적이거나 사실을 잘못 다루는데 따른 잘못된 보도의 영향이 결코 작은 것일 수 없다는 점이다.

'지역주의' 고질…'운동' 취지 살려 사실보도를


더욱 문제인 것은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시작됐다’는 보도가 대구지역주의의 하나로 보인다는 것이다. 대구지역주의 보도는 이미 일부 대구언론의 고질로 지적되고 있지만 민족 정체성과 관련해서 똬리를 튼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국채보상운동이 한말 국가적,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각한 국민들이 전국에서 전개한 운동이므로 그 운동의 취지를 살려서-민족적 저항이므로 폭 넓은 시각에서-사실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언론의 정도가 아닐까. 대구언론이므로 관심의 거리에 비추어 대구를 크게 다루는 것은 좋지만 사실과 어긋나거나 균형을 잃은 보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습관성 보도’는 ‘그게 사실이냐’는 독자·시청자들의 질책 앞에 설 자리가 없다.

   





[평화뉴스 - 미디어 창 222]
여은경 / 대구경북민주언론시민협의회 사무처장. 전 대구일보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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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211.XXX.XXX.8)
2013-02-26 12:03:35
매운 기자의 눈
미디어 창을 통해, 언제나 냉철한 기자의식을 읽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할께요.
전체기사의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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