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사유와 인문적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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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절대 잊지말아야 할 정언명령, '사람을 근본으로 여기라'


물화의 문제가 갈수록 심각하다. 사람들이 갈수록 물질의 노예로 전락해 가는 상황이다. 이런 현실에서 인문정신이 매우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세속적으로 표현하면 현실을 좀 더 인간미 혹은 인정미 넘치는 세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현 정권의 국정지표 ‘창조경제’도 물화와 무관하지 않다. 창조경제만 강조하면 뭔가 천박해 보이는지 그 대구로 ‘문화융성’을 끼워 넣었다. 물질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는 권력의 자기정당화이다. 필자는 이 관계를 과학적 사유와 인문적 사유로 구별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신화가 현실이 되는 과학기술시대에 살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창조한 신이다. 그는 지상으로 내려와 흙으로 인간을 빚은 후에 자신의 창조물에게 여러 동물의 특성을 불어넣고 친구인 아테네로 하여금 이성을 불어넣게 해서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한 뒤, 마침내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창조한 것이다.

오늘날 최첨단 과학기술로 무장한 이성적 인간은 스스로 프로메테우스가 되어가고 있다. 신화 속의 마법과 주술을 이성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축출한 현대의 과학기술은 새로운 신화를 준비하고 있다. 단지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가 현대에서는 과학기술자들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현대의 과학기술자들은 생명공학, 나노공학, 로봇공학과 같은 첨단 과학기술을 통해 새로운 인간 탄생을 기획하면서 하나같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기술’을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기술은 인간의 권력’이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기술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말이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기술과 탐구, 또 모든 행동과 추구는 어떤 선을 목표로 삼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선이란 모든 것이 목표로 삼는 것이라고 한 주장은 옳은 것이라고 하겠다.”는 통찰을 자신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밝힌 바 있지만 현대인은 그 혜안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권력으로서의 기술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기술권력은 인간에게 자유의 힘을 부여하는 동시에 특정한 방식으로 삶을 주조한다. 기술에 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것은 이 역설적 이중성 때문이다. 과학적 사유의 한계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과학적 사유의 출발점은 정태적 관점 혹은 구체적인 사물이다. 이러한 과학적 사유가 적용되는 곳은 실험실이다. 실험실에서 인간은 특정한 환경, 예컨대 일정한 온도나 습도를 조성한 후에 반복적으로 실험을 한다. 실패하면 거듭해서 실험을 하여, 마침내 특정한 가설을 제기하고 법칙을 도출해내는 선형적 사유방법이다.

반면에 인문적 사유는 과학적 사유와 다르다. 인문적 사유는 생동하는 사람 혹은 사람의 일로부터 출발하는 동태적인 비선형적 사유방법이다. 인간의 활동은 주어진 사물의 격리성과 다르다. 인간의 역사가 반복된 적이 없는 이유다. 단지 비슷한 점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전진한 것으로서 절대로 격리시키거나 실험실에서처럼 고정된 작업환경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태적인 것을 고립시켜 각종 간섭을 배제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과학적 사유와 동태적인 것으로서 고립시킬 수 없으며, 반드시 전체 환경 속에서 살펴보아야 하는 인문적 사유의 차이를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인문적 사유의 또 다른 특징은 과학적 사유의 작위성과 다른 무작위성이다. 무작위성은 곧 임의성 혹은 개연성이다. 말하자면 무작위성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 처해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이 모습이지만, 갑자기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오늘날의 과학기술시대를 지배해 온 사유가 과학적 사유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바로 저 인문적 사유, 즉 동태성과 무작위성이다. 지난 100년 이래 우리는 과학적 사유에 포획되어 인간의 문제를 인문적 사유로 해결하는 것을 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과학적 사유로 문학, 역사, 철학, 언어, 예술 등을 연구함으로써 과거에는 얻지 못했던 비교적 분명한 연구 성과를 얻기도 했지만 동시에 여러 문제점이 야기되었다. 원래 총체적인 것을 분석함으로써 전면적으로 보아야 할 것을 한 측면으로만 국한시켜 보게 되었고, 그 결과 얻어낸 성과는 정확하지도 않다.

과학적 사유와 인문적 사유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선진적이고 후진적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문적 사유는 동태적이고 총체적이며, 연관적이고 무작위적이며, 종합적이라면 과학적 사유는 정태적이고 부분적이며, 비연관적이고 작위적이며, 분석적이다. 과학적 사유가 보편적 적합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인문적 사유는 개체와 개별화된 것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두 가지 사유방식은 부단한 상호접근을 필요로 하는 상호보완적 관계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현실에서 과학적 사유나 인문적 사유가 쉽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과학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과학적 사유에 깊게 배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적인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천박함이 인문적 사유를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두 가지 사유방식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핵심적 정언명령은 ‘사람을 근본으로 여기라.’는 것이다.






[이재성 칼럼 49]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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