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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라, 그것이 창조다. 창조하라, 그것이 저항이다
[이재성 칼럼] "민주주의, 우리가 지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거부하라"
2013년 07월 01일 (월) 00:22:27 평화뉴스 pnnews@pn.or.kr

얼마 전 한 학회 발표에서 모 대학의 교수가 구 권력 말기에 ‘녹색성장’에 부합하는 교재개발 프로젝트를 수주해서 공을 들여 교재를 개발했는데,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녹색’이 들어가는 모든 표현을 삭제하고 ‘창조’로 바꾸라는 지시를 갑자기 내렸는지 자신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한탄을 들었다. 물론 하나의 특정 장면이긴 하지만 신 권력의 ‘창조경제’가 구 권력의 ‘녹색성장’을 흔적도 없이 지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항상 겪는 일이지만 새로운 권력이 등장하면 제일 먼저 하는 짓거리가 전 정권의 공과를 훼손하거나 포장하기 바쁘다.

모든 것을 창조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우스갯소리가 시중에 떠돈다. “창조경제란 경제와 관련한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것이다.” 어떤 영역이건 간에 창조만 접착제처럼 갖다 붙이면 창조가 되는 모양이다. 창조정치, 창조경영, 창조교육이라고 너도나도 떠벌린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도 정부, 기관, 전문가들조차 이 창조경제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허둥대고 있다는 데 있다. 대통령이 세 차례에 걸쳐 창조경제론을 강조했기 때문에 무조건 따른다는 수준에서 동의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두목 중심의 조폭문화와 크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현재 우리사회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저출산·고령화, 대외경제상황의 불확실성, 잠재성장률의 추락이라는 초라한 상황을 맞고 있다. 그러다보니 경제의 성장 엔진을 장착해 미래를 열어야 한다는 성장담론이 막춤을 춘다.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창조경제’는 이 용어를 주조한 존 호킨스의 ‘창조생산품의 거래’라는 정의를 넘어서 창조산업을 육성해서 경제 성장과 그로 인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낚겠다는 희망사항에서 나온 밑도 끝도 없는 성장모델이다. 사실이 이렇다보니 201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토머스 사전트 미국 뉴욕대 교수는 최근 한 사석에서 박근혜 정부가 핵심 국정과제로 추진 중인 ‘창조경제’에 대한 설명을 듣자마자 한마디로 “불쉿(Bullshit·허튼소리)”이라 했던 것이다. 전문가에게도 생소한 용어일 뿐만 아니라 구름에 뜬소리로 들렸다는 말이다.  

한데 이 창조가 자기 변주를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진 변주는 국가기관인 국정원의 선거개입이고, 이어진 여당 인사들에 의한 전직 대통령 업무관련 기록물 유출과 폭로 사건이다. 양 사건은 신구 권력의 합작품이라는 점에서 은폐된 불법권력의 맨얼굴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를 이해하는 방식은 매우 파괴적이다. 이 사건을 두고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는 “국정원 사건은 ‘워터게이트’도 아니고 ‘매카시즘’도 아니고 ‘3.15 부정선거’도 아니고 ‘위키리크스’도 아니다”며 “이 네 가지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21세기형 사이버 쿠데타”라 일갈할 정도로 파괴적이다. 그렇다, 이들은 창조를 파괴로 몰고 갔다. 

국가기관이 앞장서서 민주주의 근간을 파괴하고 입법의 주체가 불법을 저지르는 이런 사태를 두고 우리는 그들만의 창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동안 우리는 창조가 어떻게 왜곡되는지 두 눈 뻔히 뜨고 방관했던 것은 아닐까? 그나마 다행은 살아 있는 양심들이 다시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대학생, 교수, 전문가, 심지어 고등학생까지 시국선언문을 작성하고 촛불의 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렇게 한다고 해서 저 민주주의의 파괴행위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파괴자들은 새로운 파괴를 위한 그들만의 창조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해서 필자는 저 민주주의 파괴자들의 ‘창조 곧 파괴’ 논리에 반하는 ‘창조 곧 저항’의 논리를 제시하고 싶다. “저항하라, 그것이 창조다. 창조하라, 그것이 저항이다.” 얼마 전 고인이 된 프랑스의 지성 스테판 에셀이 남긴 명언이다. 그의 이 말은 우리가 지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거부하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것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지금 이대로의 우리사회를 거부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좀더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해 저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대로의 우리사회는 상인이 지배하는 사회다. 때문에 우리는 상인이 지배하는 지금의 우리사회에서 탈출할 수 있어야 한다. 상인의 지배는 곧 계산의 지배이다. 계산적인 잣대만 가지고 인간을 평가하게 되면 결코 인간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상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라는 가치는 배제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은 민주주의 안에서만 가능하다.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인간의 창조성에 호소해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계산된, 조립된 이론만 가지고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정신의 진보 내지 발전을 따라야 한다. 창조적인 사고로 고취된 현실공동체의 각성을 향해 진화해나가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진보나 발전이라는 용어는 결단코 일부 특정 지배계급이 누리는 이익의 무한 축적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가장 소외되고 가장 존중받지 못하며 가장 가진 것이 없는 우리 주변 모두의 자유와 존엄성 회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용어이다.

오래 전에 프랑스 실존주의자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뭔가 지켜야 할 것이 정말로 있다면, 나는 보수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일갈했다. 다시 묻자. 지금 여기, 우리가 진정으로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자유와 인간존엄성을 담보하는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저항을 통해서 창조되는 살아 있는 운동체나 다름없다. 결코 소수의 누군가에 의해 규격화되거나 표준화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창조성에 의해 개발되어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저항의 자양분을 먹고 산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더 외쳐보자. “저항하라, 그것이 창조다. 창조하라, 그것이 저항이다.”

   





[이재성 칼럼 44]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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