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열풍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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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인문학의 본질은 사람됨과 사랑, 그 방향에 서 있는가?


지난 1월 필자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실천하며 살아가기”라는 제목으로 2013년 새해 첫 칼럼을 시작했다. 필자는 대선 패배로 인한 당시의 충격적 상황을 ‘멘붕’으로 표현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인문학 공부와 그 실천을 제안했었다. 이런 제안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가 인문학의 공부와 실천을 제안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파시즘의 유혹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명박 정부 5년간 공권력 운용의 폭력성과 언론・표현의 자유 억압을 충분히 겪었고, 그것이 지금은 새로운 보수 정권의 탄생과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지난 10개월 동안 똑똑히 확인하고 있다. 급기야 최근에는 ‘박정희 신화’를 곁들이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파시즘 체제의 완성을 위한 속도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10개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있는 반면에, 많은 변화를 동반한 것이 있다. 전자는 ‘대통령 부정선거 정국’으로, 후자는 ‘인문학 열풍’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자의 상황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문제는 후자다. 어제도 지역신문에서는 ‘인문학 열풍 현장’이라는 주제의 특집을 1-2면에 기사화했다. 최근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의 현상에 대한 보고서인 셈이다. 필자도 이런 현상과 관련해서 한마디 거들었다.

<영남일보> 2013년 11월 22일자 2면(기획)
<영남일보> 2013년 11월 22일자 2면(기획)

그런데 한번 물어보자. 과연 인문학 열풍인가? 인문학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대학은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제일 먼저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인문학 관련 학과를 꼽는다.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대학사회에서 내세운 이유는 소비자인 학생이 기피하니 생산자인 대학은 상품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는 학과를 추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려 깊게 들여다 볼 필요도 없다. 대학의 인문학 추방에 대한 정당성 논거에서 가장 약한 고리는 ‘인간’이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학생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생은 다만 인문학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일 뿐이다. 인간이 없으니 인격도 없다. 따라서 아무런 도덕적 정당성이 없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간다.

인문학이 무엇인가. 사상과 문화,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인문학은 인간을 추방하고 인격이 매몰된 현실에 대한 반성이 없다. 이런 상황을 두고 인문학 열풍이라니 참으로 역설적이다.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시장의 논리에 따라 소비되는 문화적 현상에 다름 아니다. 시장이 새롭게 창조한 소비시장 말이다.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소비시장이 힘과 지혜를 모아 문화를 유행의 논리로 지배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소비시장의 논리에 따라 인문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시장의 인문학, 동네 인문학, CEO 인문학, 퇴근길 인문학, 점심 인문학, 아이폰 인문학 등등, 말 그대로 ‘~ 인문학’ 상품이 홍수다. 소비시장이 만든 인문학 대유행의 시대다. 유행이 유혹하고 문화가 소비된다. 학교에서 배제되고 추방당한 인문학이 백화점에서, 지자체에서, 그리고 도서관에서 유행병처럼 소비된다. 겉으로 보기에 인문학의 열풍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도하지 않다.

겉은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안은 어떨까. 인문학이 사람을 위한 학문,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학문이고 사람으로 교양인으로 만드는 학문이며 사람을 분별력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학문이라면 그것은 곧 사람에 대한 학문, 사람을 주제로 한 학문을 의미한다. 문학이 사람의 정서를, 역사가 사람의 삶을, 철학이 사람의 사상을 다루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은 바로 사람을 이해하기 학문이다. 사람이 가진 각각의 무늬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문학이 사회의 실천적 구조와의 대결을 회피하고, 단지 인간 의식 속의 모험을 서술하고 탐험하는 일에만 열중한다면, 그리고 사람과 사람됨을 회복하기 위해 묘사하는 인간 정신이 현실적 삶의 숨 막히는 구조에서 도피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과연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문학이 적어도 인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인정하는 학문이라면 인문학의 방향은 자기와 타자와의 연계성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인문학은 결코 사람됨의 본질 규정에서 이탈하거나 초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문학이 현실에 뿌리박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바로 이런 인문학의 방향에 서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필자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필자가 생각할 때 지금의 인문학 열풍은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효율성과 생산성, 즉 당장의 실용성 추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인문학의 근본가치인 ‘인간성 회복’과 ‘인격의 완성’은 시장의 도구로서의 광고기능에 불과할 뿐이다.

인문학은 결코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내실이 중요하다. 현상을 보지 말고 본질을 엄밀하게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다. 열풍은 인문학 소비 현상의 다른 표현이다. 소비 생활은 가벼움과 속도를 좋아한다. 소비하는 인간의 삶에서 성공의 척도는 구매량이 아니라 구매 빈도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소비 시장의 가벼움과 속도가 조장하고 촉진시키는 새로움과 다양성으로 소비자에게 판매되는 상품의 얼굴이 된다.

하지만 인문학의 안은 눈에 보이는 겉과는 다르다. 인문학은 오직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함으로써 세상과 우리 자신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인문학은 세상과 우리 자신에 관해 말하는 과정에서 인간적으로 되는 것을 배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됨’ 혹은 ‘사람됨’이라고 말한다. 인간됨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 관한 담론 안에서 달성되며, 이것은 오직 인문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상품의 얼굴이 아니라 사랑의 얼굴이다.






[이재성 칼럼 47]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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