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안전? 후꾸시마와 세월호에서 무엇을 배웠나

창비
  • 입력 2015.03.11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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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이상홍 / 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후꾸시마 핵사고 이후 선진 문명국가라고 여겨지는 나라들은 ‘진흥’ 중심의 원전 정책을 반성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원자력안전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규제 부분을 강화하는 듯 보였으나, 규제는 어디까지나 진흥의 종속변수임을 월성1호기를 두고 분명하게 선언했다. 월성1호기는 아마도 후꾸시마 핵사고 이후 세계 최초의 수명연장 원전으로 기록될 것이다.

월성원전 인근 주민들의 월성1호기 폐쇄 운동은 이처럼 핵발전의 세계사적 의미와도 연결되어 있다. 2월 26일은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월성1호기 수명연장 세번째 심의가 있는 날이었다. 새벽 세시에 일어나 상경버스에 올랐는데 아침식사로 밥이 아닌 미역 초장무침이 나왔다. 약간 당황했으나 이내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주민들은 아침식사를 근사하게 마련할 돈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월성원전 인접지역 이주대책위원회(이하 이주대책위)’는 한달 남짓 사이에 벌써 네번째 상경투쟁을 펼치고 있었다. 경주의 바닷가에서 서울까지 버스 대여료만 백만원을 지불하는 싸움을 2주에 한번씩 해온 것이다. 주민들은 작년 가을부터 월성원전 앞에서 천막농성을 이어왔고, 최근엔 원자력안전위원회 개최 날짜에 맞춰 잇달아 상경투쟁을 펼쳤다.

2월 26일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월성1호기 재가동 안건 심사 모습 / 사진. 원안위 홈페이지
2월 26일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월성1호기 재가동 안건 심사 모습 / 사진. 원안위 홈페이지

후꾸시마를 떠올리지 못하는 한국 원전 정책

미역 초장무침을 먹으며 상경한 그날, 결국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자정을 넘긴 27일 새벽 한시에 월성1호기 재가동을 결정했다. 오후에 경주로 내려간 뒤 잠 못 들며 결과를 기다리던 주민들에게 나는 아픈 소식을 전해야만 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굴하지 않고 여전히 천막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월성1호기 재가동 결정이 어이없이 통과되고 해가 뜨기 무섭게 언론사에서 전화가 왔다. ‘지역 주민들 여론이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을 여러 곳에서 받았다. 이럴 때 참 난감하다. 나는 여론조사기관도 아닐뿐더러 시민의 다양한 생각을 어디에 맞춰 전달해야 할지 혼란에 빠지곤 한다. 같은 경주시민이지만 월성원전에서 직선거리로 2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살고 있는 시내 쪽 시민과 바로 곁에서 살고 있는 인근 주민이 체감하는 위험성은 매우 다르며 이해관계도 하늘과 땅 차이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또한 정보의 차이에 따른 이해관계의 편차도 크다. 정보에 둔감한 특정 경주시민보다 정보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일부 서울시민이 월성1호기 날치기 통과에 더욱 분노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이해관계의 다양성 속에서 나는 결국 이주대책위 주민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송전탑을 반대하며 7년 넘게 싸워온 밀양 어르신들이 말한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에 빗대면, 이곳에서 ‘전기는 피눈물로 생산된다’고 얘기할 정도로 이주대책위 주민들은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

원전 주변에서 살고 있는 갑상선암 환자들이 손해배상소송을 시작하면서 불안은 더욱 커졌다. 다양한 질병과 암 발생이 방사능 때문이겠지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살아왔다. ‘좋은 대학’ 나온 한국수력원자력의 간부들이 “월성원전은 안전합니다, 방사능은 나오지 않습니다”라고 얘기할 때마다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런데 갑상선암 소송이 시작되면서 엄청난 수의 주민이 암수술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월성원전 주변에만 83명에 달하고 우리나라 평균 발병률의 네배가 넘는 마을도 나왔다. 물 좋고 공기 좋은 어촌마을에서 방사능 외에는 암 발생을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됐다. 시민단체가 접수한 통계이므로 실제 갑상선암 환자는 훨씬 많을 것이다. 주민의 불안과 궁금증은 시간이 갈수록 쌓여가지만 모든 자료를 가지고 있을 정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월성1호기 폐쇄촉구 국민선언 대구경북 기자회견'(2015.2.9.경북도청)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월성1호기 폐쇄촉구 국민선언 대구경북 기자회견'(2015.2.9.경북도청)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


주민들은 이곳에서 탈출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지 않다. 주민의 집, 건물, 논, 밭은 원전에서 약 1킬로미터까지 근접해 있다. 마당이나 옥상에서, 마을 거리에서 거대한 원전 건물이 훤히 보인다. 당연히 부동산 거래가 없고 주민이 보유한 부동산의 가치는 제로에 가깝다. 자산을 처분할 수 없으니 자력으로 탈출할 수 없게 됐다. 새벽잠을 설치고 미역 초장무침으로 아침을 때우더라도 상경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이처럼 절박한 생존의 무게가 있었다. “이주대책 없는 월성1호기 수명연장 반대한다!”

그러나 이주대책이 한번의 싸움으로 얻을 수 있는 쉬운 문제가 아니듯, 이주를 한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주민들의 피켓엔 이런 내용도 있다. ‘세월호에 승선한 나아리 주민.’ 나아리는 월성원전 행정구역이다. 세월호의 다른 이름인 월성1호기에 승선한 사람들이 어디 나아리 주민뿐이랴. 반경 30킬로미터 이내에 백만명이 넘는 시민이 살아가고 있으며 울산과 포항의 산업단지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된다. 진흥 중심의 원전 정책이 안전과 규제 중심으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 모두는 세월호 탑승객일 수밖에 없다.

꼬이고 꼬인 원전 문제를 풀 실마리를 나는 수명 끝난 월성1호기의 폐쇄로 보았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날치기 심의로 점점 물거품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주대책위의 투쟁이 더욱 소중하고, 굽힘 없는 주민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또다시 아침식사로 미역 초장무침을 먹는 날이 있더라도 감사히 먹고 힘껏 싸우겠다. 지금은 오로지 투쟁만이 희망이다. 주민들의 이주와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해.





이상홍 / 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창비주간논평] 2015.3.11 (창비 = 평화뉴스 제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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