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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부정한 권력과 성숙한 시민


민주주의는 자동적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기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유기체다. 민주주의는 갈등과 분열을 끌어안으면서 창조성으로 전환시켜 새로운 생각과 행동 양식 그리고 상호 개방적인 시민과 지도자들에 의해 작동되는 제도이다. 이 민주주의가 지금 질식사하기 일보 직전이다. 왜, 무엇 때문에?

경향신문의 기사가 그 이유를 잘 웅변해주고 있다. “박 대통령의 지난 2년 반은 국민을 ‘찢고, 가르고, 싸우게 한 통치(痛治·고통스러운 정치)’의 시간이었다. ‘두 국민 정치’ ‘분열 정치’라는 비판은 박근혜 정부의 주홍글씨가 됐다는 말도 있다.” 이 두 문장이야말로 현 정권의 실체를 가장 정확히 짚고 있다. 앞의 문장은 2년 반의 과거를, 뒤의 문장은 현재를,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예고편을 다 끌어안고 있다.

<경향신문> 2015년 6월 27일자 1면
<경향신문> 2015년 6월 27일자 1면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대면하고 있다. 사실 민주주의는 저 ‘찢고, 가르고, 싸우게 한’ 긴장과 갈등의 에너지를 끌어안기 위해 고안한 제도다. 민주주의는 긴장에서 유발되는 에너지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을 통해 그 에너지를 전환하는 기제이다. 이것이 민주주의 정치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 정치는 완전히 그 반대로 작동되고 있다.

인간사에 갈등이 없는 공공 영역이 어디 있는가? 갈등이 없는 공공 영역을 상상하는 것은 마치 죽음이 없는 삶을 염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환상이다. 바로 전체주의라는 환상 말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만 갈등은 추방된다. 그러나 이때 갈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지하로 쫓겨날 뿐이다. 대신 폭력과 억압이 강요하는 안정성의 환상이 그 자리에 들어선다. 황교안 체제가 벌써 공안정국 만들기에 분주한 것도 바로 이런 안정성의 환상을 쫓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민주주의에서는 공적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때문에 공적 갈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장려되어야 한다. 갈등을 안정으로 치환하는 것은 곧 죽은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죽어가는 민주주의 앞에서 지금 시민들은 분노하다 지쳐 마침내 비통한 마음에 빠져들고 있다. 마음이 부서지고 있다. 무관심과 포기 그리고 냉소가 만연하다. 그대로 부서지고 말 것인가. 그래선 안 된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성숙도는 시민 개개인의 마음이 얼마나 성숙한가에 달려 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다. 언어가 인간의 존재를 규정한다는 유명한 말이다. 이에 빗대어 인간의 ‘마음은 민주주의의 집’이라 표현해보자. 개인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가 민주주의의 본질을 규정한다는 말이 된다. 파커 J. 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의 질문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인간의 마음은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공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너그러울 수 있는가. 우리는 단지 생각만이 아니라 전존재로 경청할 수 있는가. 의견보다 관심을 줄 수 있는가.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용기 있게, 끊임없이,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동료 시민을 신뢰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가?”

저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을까? 나를 포함해 다른 사람에게 공정하다고, 관대하다고, 귀를 기울인다고, 신뢰한다고 말이다. 혹시 갈등하지는 않을까? 당연히 갈등해야 한다. 긴장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 있는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갈등과 긴장의 과정을 거쳐야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위한 마음이 성숙해진다. 그것은 바로 공정할 수 있는 마음, 관대할 수 있는 마음, 상대방의 주장과 의견에 귀 기울이며 경청할 수 있는 마음,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을 빚어내는 과정이다.

완전한 혹은 완성된 민주주의는 없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삶이 전개될 때 그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조형되는 절차이고 과정이다. 우리 안의 세계와 우리 바깥의 세계가 끊임없이 갈등하고 협력하면서 서로를 빚어내는 것처럼 인간의 삶도 마음의 안과 밖이 갈등하고 협력하면서 빚어내는 것이며, 민주주의는 바로 그 ‘빚어짐의 과정’이다.

성숙한 시민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비통한 마음, 즉 분노, 냉소, 증오로 똘똘 뭉쳐 시민들을 적대시하는 지금의 권력과 그 주변인들의 전략적 시나리오에 일일이 맞대응할 필요가 없다. ‘다름’에 대한 오랜 공포를 조장하는 공안정국에 대해서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서로에 대해 공정하지 못하고, 관대하지 못하며, 귀 기울이지 않고, 신뢰하지 않을 때 부정한 권력은 언제나 그 공백을 치고 들어온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의 상처를 인정하고 치유하면서 서로에게 공정하고, 관대하며, 귀 기울이고, 신뢰한다면 민주주의를 위축시키는 부정한 권력은 우리의 삶에서 추방될 것이다. 바로 그 지점이 살아 있는 민주주의가 시작되는 곳이며, 그 중심에는 성숙한 시민이 있다.






[평화뉴스 이재성 칼럼 57]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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