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교육의 강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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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우리가 일하며 살아가는 참된 가치를 위하여


지난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이 사건을 한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로 결론내리고 더 이상의 사회적 파장을 막으려고 서두르는 모양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추모 열기는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유아 살해, 총기 살해, 성적 학대와 같은 도덕적 동요를 보여주는 증상들이 두드러지고 있다. 말하자면 단일한 사건이 폭넓은 공포를 야기하는 현상에서 일정한 패턴을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은 곧 확실성이 사라지고 도덕적 혼란이 생겨났음을 말해준다.

대구 중앙로역 입구의 '서울 강남역 사건' 희생자 추모 글과 국화꽃(2016.5.20. 중앙로역) / 사진.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대구 중앙로역 입구의 '서울 강남역 사건' 희생자 추모 글과 국화꽃(2016.5.20. 중앙로역) / 사진.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이러한 공포스런 분위기를 겪으면서도 사람들은 최근까지도 우리 사회에는 더 높고 더 넓게 공유된 ‘도덕적 기준’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더 안전하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선과 확실성이 지배했던 그 황금시대가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세대가 지나면서 끝났다는 것이다. ‘좋은 시절 다 지났다’는 식의 회고적 탄식 말이다.

이런 믿음과 확신은 물론 잘못이며, 역사적 무지에서 기인한다. 그 이전 시대나 다른 장소에서는 가끔 도덕적 합의가 지속된 시기가 있었다. 주로 종교가 사상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 합의가 오래 간 적도 없었다. 도덕적 관점은 시대에 따라 변하며, 인간은 언제나 그런 사실을 크게 염려했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의 한양은 지금보다 훨씬 폭력적인 곳이었으며, 이른바 충효를 강조하는 전통 시대의 가치관으로 되돌아가려는 다양한 노력, 특히 인성교육이 전개되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범죄들이 횡행했다.

그동안 사회적 진보는 더디지만 천천히 이루어져 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는 급속하게 도덕적 공황에 시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언론과 대중매체의 역할이다. 종교적, 사회적으로 일부 주제들이 금기시되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 매체는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섬뜩한 불안을 조성하며, 그 과정에서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고 공포를 양산한다.
   
지난 20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지털플라자(DDP)에서 열린 서울디지털포럼(SDF) 기조강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스티븐 핑커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가 신문, 방송 등 미디어가 살인과 폭행 등 사람들의 폭력에 대한 인식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데이터상으로 폭력은 1950년대 이후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폭력이 과거보다 더 늘어났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렇게 현상과 인식에 괴리가 생긴 것은 미디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도덕적 혼란이 발생하는 더 큰 이유는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는 능력은 크게 증대한 데 반해 그것을 소화하고 이해하는 대중의 역량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사회의 발전 경로는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매체가 설정한 담론의 기준이 그대로 다 통용된다면 사람들은 새로이 제기되는 도덕적 요구들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내주라는 도덕, 부자가 천국에 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편이 더 쉽다는 가르침, 자신의 이웃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신에게 완전히 복종하라는 설교는 우리 사회에서 수용되고 칭찬되는 규범과 관습에 정면으로 대립되며 거의 실효성이 없다. 지금 우리가 처한 도덕적 혼란은 이런 도덕주의적 장광설이나 종교 근본주의적 언설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도덕을 가르쳐야 할 것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교양교육의 강화가 필요하다. 교양교육은 과학과 실용적 주제는 물론이고 예술과 인문학도 포함하는 교육을 의미한다. 문학, 역사, 예술 교육은 우리의 삶을 더 성찰할 수 있도록 해주며, 특히 인간 경험의 본성과 다양성에 관해 깨우치도록 해준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므로 그들의 인생관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다.

의심하고 상상하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학생들은 정말로 자기 자신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교양교육은 순응을 강요하는 권력에 도전하도록 하며, 각자 개인적, 직업적, 정치적 삶과 깊은 관련을 맺도록 한다. 관련을 맺는다는 건 단순히 첫 직장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교양교육의 참된 가치는 오히려 우리가 일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서서히 드러난다. 교양교육의 자유로운 탐구와 실험 정신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욕구와 희망을 더욱 잘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며, 자신의 믿음과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한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사회에 이바지하며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길러 준다는 점에서 교양교육은 대학 울타리 밖에서도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닌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분명 이상적일 수도 있다. 문학 작품을 읽는 사람이나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 중에는 얼마든지 나쁜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교양교육을 한다고 해서 저절로 더 나은 인간형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식의 결핍과 지혜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무지와 이기심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와 더불어 학교 교육이 주로 경제생활에 참여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면서 교양교육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에 관해서는 계속해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교양교육의 목표는 사람들의 평생 배움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방식을 가르쳐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위기는 언제든 새롭고 까다로운 양상으로 닥쳐올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도덕적 위기에 대해 사려 깊게 대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준비시킬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하면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우나 그와 유사한 사건들에서 보듯이 우리는 계속해서 도덕적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평화뉴스 이재성 칼럼 60]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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