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천직으로 삼는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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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이 패악의 시대, 철학자가 자기 천직의 이념을 기꺼이 짊어진다면"

 

요즘 인문학이 대세라고들 한다. 대학의 인문학 관련 학과가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도 인문학이라는 상품은 호황을 누리는 아이러니가 연출되고 있다. 필자는 이 두 경우를 동시에 겪고 있다. 대학 안에서 학과는 구조조정을 당해 폐과의 길로 가는 반면에 대학 밖에서는 여러 곳으로부터 인문학 강연 초대를 받고 있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청소년에서부터 노년 세대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만남의 반응도 너무 다르다. 대학 안에서의 싸늘한 반응이 대학 밖에서는 뜨겁기만 하다.

인문학이란 이름을 단 강연을 마치고 나면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필자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친다고 대답한다. 일반적인 반응은 대체로 “아, 교수님이시군요.”에서 그친다. 필자의 직업에 좀더 관심을 가진 사람은 전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철학을 가르친다고 대답한다. 가끔은 철학을 연구한다고도 말한다. 필자 나름대로 신중하게 선택한 대답이다. “나는 철학자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 나 자신을 ‘철학자’라고 하는 것은 어딘가 매우 과감한 용어선택처럼 보인다.

철학자라는 대답은 주장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 “나는 의사, 변호사, 군인, 엔니지어”라는 대답만큼 솔직담백하게 들리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 맑스, 니체 등 역사상 위대한 사상가들을 생각하면 철학자라는 직함은 마땅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제3자가 붙여야 어울리는 경칭이다. 그런 사람들이 반드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칠 필요도 없고, 사실 가르치지 않는 게 더 당연한 듯 싶다.

철학을 가르치고, 연구한다면서 철학자를 사용하지 않는 필자에게 상대방은 다음 질문을 이미 준비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무엇을 할까?”라고 사람들은 속으로 자문할 것이다. 의사나 변호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누구나 안다. ‘철학을 가르친다.’는 말에서도 ‘가르치는’ 부분까지는 뜻이 분명하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부분은 어떤가? 사주관상을 보는 것일까? 아니면 마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하루 종일 생각만 하는 것일까?

하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묻는 질문은 “어떻게 이 분야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까?”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직업을 선택하기도 하고 거꾸로 선택되기도 한다. 우리는 후자의 경우를 가리켜 흔히 ‘천직’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본래 ‘종교적인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뜻에서 비롯되어 정신적인 삶만을 강조하는 것이었지만 근대에 들어와 의료, 법률, 교육 분야의 직업도 가리키게 되어 전문직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대개의 경우 철학은 이런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려는 충동처럼 철학은 일종의 ‘절박함’에서 온다. 너무 중요하고 흥미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무엇과 견줄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현실적이고 세속적이다. 사람들이 가진 꿈과 욕망–프로 스포츠 선수, 아이돌 가수, 의사, 변호사-은 의지와 기회가 닿지 않으면 계속 꿈과 욕망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천직은 의지를 주며, 철학의 경우 기회는 누군가로부터 혹은 무엇으로부터 ‘초대’의 형식을 띈다. 그래서 철학은 의사나 변호사와 달리 전혀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 글 쓰고 생각하는 일을 전체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진지하게 여길 수 있는 일종의 특권과도 같다. 필자의 경우 그 초대장은 필자를 둘러싼 우리 시대의 아픈 상황에서 온 것이었다.

어린 시절 조부님의 조선왕조실록 이야기에서, 누나가 읽던 세계문학전집에서 문학의 가치를 깨달았고, 철학과 역사와 사랑에 빠졌으며, 가능하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꿈에 젖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세계, 특히 고전 세계에 거주할 수 있는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중학교 시절 이해하지도 못하며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미성년>, 사르트르의 <구토>,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의 작품은 지금도 생생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추구한 것은 아름다움, 이성과 이성적인 삶에 대한 존중, 사유와 감정의 자유, 신비주의와 감상주의 배제, 인문주의, 다원주의, 건전한 세계관 등과 같은 문명화된 정신의 특징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정신적으로 고상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이념을 소프로시네(sophrosyne), 즉 ‘지혜’라고 불렀다.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아는 것은 무지(무지의 지)뿐이라는 말로 대화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 말에는 깊은 통찰력이 깃들여 있다. 참된 무지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안다는 착각’이기 때문이다. 그런 착각은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다. 때문에 철학의 중요 임무 중 하나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해 알고 있다는 착각을 파고들어 그것이 잘못된 지식이거나 엉터리임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 이 깨달음의 방법은 먼저 우리의 질문을 명확히 하는데서 시작된다. 이 과정을 거치면 설령 답을 알기 어려울 경우에도 최소한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철학이 가르쳐주는 가장 귀중한 지식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사실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철학의 임무는 철학을 처음 자극하는 어린이의 호기심을 계속 유지하도록 하고 새로이 다듬는 것이다. 현대 수학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철학은 경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 철학적 사고가 모든 역할을 마쳤을 때도 그 경이는 남는다.”고 했다. 아마 소크라테스라면 이 명제에다 이렇게 한마디 더 덧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철학을 통해 도달한 그 경이는 처음의 경이보다 더 풍부해진 경이이며, 인간 정신이 가진 최고의 보물이라고.’

지금 여기 우리 세상은 저마다 안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한 순간도 조용한 날이 없다. 그렇다고 죽은 소크라테스를 불러 올 수는 없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철학자들이 자신의 일과 관련하여 가장 좋아했던 것은 과학, 정치, 예술 등 세상의 모든 지적인 사건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패악의 시대에도 철학자가 자기 천직의 이념, 즉 명료함, 원칙, 통찰력, 계몽을 기꺼이 짊어진다면 그는 인류에게 무엇인가를 기여하게 될 것이다.







[평화뉴스 이재성 칼럼 58]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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