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며 '나라다운 나라'를 그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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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렬 칼럼] 영화 <노무현입니다>, <밀정>,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고


<노무현입니다>를 봤다. 대통령의 감동적인 현충일 기념사가 방송을 타고 전국에 낭독되는 그 날.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영광스런 민주당 경선 승리의 과정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이후 시민들과 남은 자들의 회한을 멋지게 이어붙인 이 다큐멘터리의 흥행은 아마도 박근혜 당선 직후 영화 <레미제라블>에 구름 관객이 몰렸던 상황과 비견될만하다 할 것이다. 퇴영적인 수구보수 세력에게 당한 쓰디쓴 패배의 아픔을 좌절된 과거 유럽혁명사에 투영하였던 당시 상황과 비교해볼 때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는 촛불혁명으로 재개된 새로운 희망의 역사에 대한 기대를 기록한, 아직 오지 않은 역사에 대한 다큐다.

영화 속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역시 노무현이 광주 경선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노사모 시민들이 부둥켜안으며 열광하는 모습이었다. 2002년도 광주 경선에서의 노무현 승리는 굴종과 차별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주권자로서 시민들의 열정적이고도 조직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쓰려는 염원을 현실화시키려는 첫 걸음이었다.

영화는 “한 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그날이 오면>)을 꿀 수 있었던 15년 전, 그 날의 승리에 대한 기억을 불러냈다. 바다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을 예고하는 여명의 역사적 시간은 미래의 비전을 담고 있는 시적 순간들이며 시민들의 정치적 열망이 뜨겁게 타오르는 혁명의 시간이기도 했다.


지금은 다시 촛불로 어둠이 물러간 여명의 시간이다. 대통령은 광주의 불빛이 밝혀준 “주먹밥과 헌혈”의 정신을 표지 삼아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향해 한걸음씩 움직여왔다고도 했고, 파독 광부와 청계 피복 공장 여공들의 희생과 헌신이 바로 애국이라고도 했다. 아직 오지 않은 역사에 대한 비전을 대통령은 시적 정치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촛불 시심을 연설문에 담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언급한 주먹밥과 헌혈은 나눔의 정신에 바탕한 시민의 자치 능력을 표상한다. 계엄군이 도청에서 퇴각한 1980년 5월 22일 이후 5월 26일까지 5일 간 단 한 건의 도난, 폭력 사건도 없이 전기, 수도, 전화, 통신 등 도시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은 것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긍지”(황석영,<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속에 시민 자치 능력은 여전히 살아있다. 시민들에 대한 압제자로서의 국가가 물러갔을 때 시민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정치적 능력이 있는 그대로 발현되었던 역사적 경험이 “주먹밥과 헌혈”이라는 말 속에 녹아있다.

아울러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광주의 항쟁 주체들과 파독 광부들, 청계 피복 공장 여공들이 우리의 역사를 이끌어온 역사의 주체들임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배제되어온 바로 그 계층들이라는 점이다. 이 시점에서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80년 광주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며 이른바 산업화와 민주화의 주체들로서 희생과 소외를 강요받은 여러 주체들이 대통령에 의해 호명된 이 시점에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국가에 무엇을 요구할 것인지의 질문은 꼭 정치학자들만의 논의 대상은 아닐 것이며,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느냐 옹호하느냐의 문제만도 아닐 것이다.

영화 두 편을 떠올린다. 김지운의 <밀정>과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두 편의 영화는 공통적으로 국가를 잃어버린 민족이 국가를 되찾기 위한 싸움을 그리고 있지만, 독립 운동과 투쟁을 그리는 방식은 크게 다르며, 그 차이 속에는 어떤 국가를 만들기 위한 싸움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전의 차이가 내장되어 있다는 점에 내 관심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김지운의 <밀정>에는 두 사람의 밀정이 등장한다. 의열단과 일본경찰 사이의 양극을 어지럽게 움직이며 이중첩자 역할을 하는 이정출과 일제에 포섭되 의열단 내에서 암약하는 조회령이라는 인물이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이정출을 종국에 조선총독부 관리들과 부역자들이 모인 연회장을 폭파시키는 대단원의 결말로 이끄는 결정적인 모티브는 결국 일제의 잔악함에 희생되는 우리 민족의 무력함에 대한 자각이다. 일본 경찰의 총격에 절단된 친구의 발가락과 고문과 탄압에 단식으로 맞서다 죽음을 맞이한 여성 의열단원의 말라버린 시신을 마주하며 이정출은 도덕적, 정치적 회심의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말하자면, 일제라는 외부의 강한 적과 그에 맞서는 더 강력한 민족의식의 각성이라는 단순 대립구조가 일본이라는 강력한 제국의 힘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위에 언급한 연회장의 폭파 장면의 배경음악은 라벨의 발레곡 <볼레로>다. 같은 음조의 무한반복을 통해 끝을 향해 갈수록 장엄하고 웅장해지는 음향의 스케일이 압도적인 라벨의 발레곡을 매개로 관객은 일본 제국주의의 힘을 느끼게 되지만, 풀샷으로 담긴 건물의 폭파 장면은 <볼레로>의 웅장한 음율에 맞춰 칼을 휘두르며 난장을 벌이는 이 곡이 처음 연주될 당시의 발레 무대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 힘은 고스란히 일본 제국주의를 패망시키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강한 독립군의 위세로 연결된다. 그렇게 상상된다.

영화 말미에서 관객들은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설계한 의열단장, 정채산의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전진해야 한다. 더 높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 해석해보자면, 영화의 여러 장면에서 묘사되듯, 일제의 힘에 밀려 패배하고 철창에 갇히고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끝내 더 강해져 독립된 국가를 세워보자는 말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의미의 희생자인 조회령은 영화 속 의열단장의 저 “실패” 안에 내포되어있을까? 이 영화는 의열단 내부의 밀정이었던 조회령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말이 없다. 그는 의열단 행동대장인 김우진과 고향 친구로 묘사된다. 그는 시골서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던 청년으로서 먹고살기 어려워지자 의열단에 들어가지만 음성적인 방식의 싸움을 통해 일제에 대한 힘의 열세를 극복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회의론자다. 내부 배신자는 처단한다는 의열단 법규 제10조에 따라 김우진은 친구를 즉결 처형한다. 의열단 전체의 안위를 해칠 수 있는 밀정 행위 자체는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영화는 정의의 사도인 김우진이 친구를 처단한 이후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더 높은 곳으로 전진”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수행할 뿐 조회령의 존재는 완전히 잊혀져버린다. 조회령의 죽음은 영화서사에서 “실패”라는 말로도 규명할 수 없는 우리 내부의 실패자일 뿐이다. 조회령은 <볼레로>의 웅장한 선율로 기념될 강한 민족국가 건설 과정에 이름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크리스 라일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등장하는 아일랜드 공화군(IRA) 소속 전사지만 영국 식민관리의 위협을 이기지 못하고 동료들의 은신처를 밀고한 것이 드러나자 마을 친구인 데미안에 의해 처형되는 비운의 인물이다. 마치 조회령처럼. 그러나 이 영화가 <밀정>과 결정적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이 바로 이 대목이다. IRA의 규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크리스는 처형되지만, 그 순간부터 데미언은 친구를 죽이면서까지 세우려는 국가는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한다. 주인집 축사를 치며 머슴살이를 하던 친구 크리스에 대한 아픈 기억은 그를 내부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자가 없는 국가를 지향하게 만든다. 거기에 비해 그의 형 테디는 영국군과의 고투 속에 용맹함을 보여주지만, 국가의 생존 여부는 철저히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아 더 강한 세력과의 관계 속에서만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려 한다.

이런 규정 속에서 테디는 국가 조직과 그 조직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본가와 권력자의 힘에 우선적 가치를 두는 반면 데미안은 친구나 동료 같은 구체적인 인간관계에 기초한, 적어도 그런 관계를 훼손시키지 않는 국가조직을 원한다. 이런 원리 위에 성립하는 국민 주권은 자연스럽게 국토 내의 모든 자연자원에 대한 공동의 사용권까지 포함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이 같은 정치적 메시지는 아일랜드 공화군 지배 하의 혁명재판부 판결 장면, 1921년 아일랜드 자유 자치령 선포를 배경으로 한 아일랜드 공화군 구성원들 간의 찬반 토론 장면, 마침내 아일랜드 자치령 장교가 된 형 테디와 반란군 포로가 된 동생 데미안 사이의 최후의 설득 장면 등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현 정부는 사드 철수, 사대강 보 해체, 원자력 발전소 폐쇄, 대기업 규제 등 산적한 현안을 앞두고 몇 가지 신중하고도 계산된 것으로 보이는 정책적 발걸음을 선보이고 있는 중이다. 결국 정권의 성공 여부는 지금까지 국가가 배제하고 억압해왔던 소외 계층과 자연을 더 이상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보지 않고 얼마나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보호하고 돌보는 정책을 선보이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기대와 희망, 그리고 우려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주권자들의 시선을 깊이 응시하길 바란다. 






[이승렬 칼럼 5]
이승렬 / 영남대 영문학과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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