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애환 싣고 달린 31년, 대구 여성 시내버스 기사 '마지막 운행'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23.08.24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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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교통 김분임(63)씨 정년 일주일 앞 '706번' 동승
만19세 택시, 92년 "여자 안돼" 편견 깨고 대형운전대
지구 30바퀴·3백만명 운송..."첫차·막차 서민과 함께"
준공영·노선 전문가→"시 행정 0점, 현장반영·완전공영"


새벽 첫차와 심야 막차로 밤낮을 여닫은 31년. 여성 대구 시내버스 기사가 마지막 운행에 나선다. 

대구 시내버스 업체 우주교통(주)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는 김분임(63.대구 달서구)씨는 오는 31일 오후 11시를 끝으로 지난 31년 동안 운행한 시내버스 운전대를 놓는다. 대구지역 시내버스 업계의 맏언니로 가장 오래 일하고 정년 퇴직까지하는 최초의 여성 대구 시내버스 기사인 셈이다. 
 
31년 만에 정년 퇴직하는 김분임 대구 시내버스 기사(2023.8.2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31년 만에 정년 퇴직하는 김분임 대구 시내버스 기사(2023.8.2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아쉬운 정년을 일주일 앞둔 24일 오후 대구시 북구 관음수소충전소 버스차고지에서 그를 만나 706번 시내버스에 동승했다. 706번은 북구, 중구, 남구, 서구, 달서구 5개 동을 관통하는 장기노선이다.

김분임씨는 날카롭게 줄 잡힌 파란색 버스기사 유니폼을 입고 출근했다. 왼팔과 왼쪽 가슴에는 무사고 경력을 인증하는 모범운전자(Best Driver) 패치와 배치가 있다. 장기노선에 들어가면 화장실을 갈 수도, 먹을 수도 없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하고 오전 동료 기사와 인사를 한 뒤 버스에 오른다. 

좁은 운전석 문을 닫고 장갑을 낀다. BMS(비엠에스.버스노선과 기사들 근무 교대 차량 운행 관리 시스템)와 에코시스템(연료절감장치), 타코미터 운행기록 단말기 등을 체크하고 시동을 건다.
 
   
▲ 대구 여성 시내버스 기사로 딴 '모범운전자' 패치(2023.8.2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706번 버스로 출근하는 김분임 기사(2023;.8.2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정확한 시간을 체크하고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차고지에서 여유를 가진다. 지나가는 동료들이 말을 건다. 박태홍씨는 퇴직한 뒤 비정규직으로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그는 "분임씨 마지막 운행 나가? 정년 다 되면 대구시에 가서 노선 좀 어떻게 해봐. 현장 잘 알지 경험 많지 최고잖아"라고 했다. 퇴직하면 비정기적으로 일해달라고 붙잡는 사람, 대구시에 가서 일하라는 사람. 분임씨의 꿈은 다르다. 

"706번 우주교통 버스 운행을 시작합니다" 방송 안내 음성이 나왔다. 버스는 도심을 내달렸다. 8월 폭염의 대구 도로를 주행하는 시내버스. 운전석에서 바라보는 아스팔트 도로는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시민들은 정류장에서 고개를 빼고 버스를 기다렸다. 움직이는 에어컨을 반기는 표정이다. 
 
시내버스 운행 전 사무실에 들러 준비하는 김분임 기사(2023.8.2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시내버스 운행 전 사무실에 들러 준비하는 김분임 기사(2023.8.2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버스에 오르는 시민들은 나이, 사는 곳, 직업, 성별 다양하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탑승하며 인사하는 사람도 있고, 아무 말 없이 버스카드만 '삑' 찍고 창밖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분임씨는 5남매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맏이는 맏이라서, 첫 딸은 살림밑천이라서, 막내는 막내라서 예쁨 받고 자랐다. 틈바구니 속에 분임씨는 홀로 경쟁력을 갖춰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입학하지 못했다. 생활전선에 바로 뛰어들었다. 섬유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다 운전면허증을 땄고 만19세에 택시운전사로 일했다. 그 곳에서 남편을 만나 일찍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1985년 1종 대형면허증을 따 버스기사에 도전했다. 당시 "여자는 안된다"는 업계 보수성에 막혔다. 1992년 선배 언니가 우주교통에 취업해 편견을 깨면서 25살 나이로 본인도 뒤따라 입사했다. 언니는 그만뒀지만 분임씨는 운전대를 놓지 않았다. 지역 여성 시내버스 기사는 27명까지 늘었다. 전국적으로 300여명이 있다. 여자라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더 노력했다. 본인을 보고 놀라는 남자 승객도 있었지만, 응원하는 여성 승객도 많았다. 힘이 되고 나아갈 방향이 됐다.
 
   
▲ 관음수소충전소 버스차고기지 우주교통(2023.8.2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대구 도심을 관통하는 706번 버스를 운행하는 김분임 기사(2023.8.2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대구지하철이 개통하면서 승객이 줄었지만 가장 많을 때는 하루 평균 1,000여명을 태웠다. 30여년간 이동한 거리는 지구 30바퀴에 이르고 지금까지 대략 시민 300만명을 운송했다. 숫자에 가려진 애환은 버스기사 눈을 피할 수 없다. 사계절 변화와 도심 발전, 시민의 삶을 바라보는 관찰자다.  

버스가 채워지는 순서는 변함 없다. 새벽 인력시장 일꾼들이 가장 먼저, 그 다음은 전통시장 난전 할머니, 공장 노동자, 도시 외곽 밭일 농사꾼, 학생 순서다. 한겨울 혹한과 찜통 더위 속 첫차와 막차를 기다리는 그들의 얼굴은 늘 절박하다. 3~4초 차이로 버스가 지연되면 그들의 생계에 차질이 있어 제 시간에 맞춰 도착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시내버스는 '서민의 발'이 맞다.

연차가 쌓일수록 의문은 커졌다. 대구시 공무원들은 왜 시민 편에 서서 생각하지 않을까?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 왜 책상머리에서 현장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리고 답답한 마음에 직접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과 기록 덕후(어느 한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행동을 한다는 의미의 신조어) 자질이 합쳐져 20권이 넘는 일지를 썼다. 2006년 대구시내버스 준공영제 개혁위원회 위원을 맡았고, 2000년에는 대구시 최초 버스노선안내사이트 초석이 됐다. <대중교통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등 책도 펴냈다. '대중교통 전문가'로 목소리를 냈다.  

일주일 뒤 긴 운행에 마침표를 찍는다. 현장 경험을 살려 대중교통 개혁 목소리를 낼 예정이다. 
 
김분임 기사가 BMS를 가리키며 "대구 교통행정은 엉망"이라고 비판했다.(2023.8.2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김분임 기사가 BMS를 가리키며 "대구 교통행정은 엉망"이라고 비판했다.(2023.8.24)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김분임 기사는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데, 내가 대형 운전면허증을 딴 게 운명이었는지 여기까지 왔다"고 소회를 밝혔다. 또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과 무책임한 행정 사이에서 까칠하게 살아왔는데 이제 분노할 일이 적지 않겠냐"면서 "하루 4~5시간 자며 일하고 기록했는데, 운전대를 놓는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지난 세월이 후회되지않는다"며 "자랑스럽고 뿌듯한 면도 있다. 시민들에게도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고 작별 인사를 전했다. 

반면 대구시를 향해서는 끝까지 쓴소리를 했다. 그는 "대구시의 대중교통 행정은 0점. 형편 없다"면서 "시스템을 제대로 만들지 못해 혼란을 가중시켰으면서 기사들에게 민원을 가중시키고 점수까지 도입해 줄을 세운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현장의 요구와 목소리를 반영한 위원회를 구성해 대중교통을 개혁하고, 시민들을 위해 시내버스 완전공영제로 빨리 변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대구 토요마당(대표 최봉태 변호사)은 오는 26일 오후 2시 음악다방 세라비에서 김분임 기사 정년 퇴직 축하 행사를 연다. 그 일환으로 '기후문제와 대중교통' 특강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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