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전 KBS사장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해임처분무효 청구소송이 1심에 이어, 지난 1월 14일 서울고법에서도 승소판결을 받았다. 감사원은 2008년 ‘부실경영 · 인사전횡 · 사업위법 등에 대한 책임이 있다.’며 정연주 사장의 해임을 요구했고, 대통령은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그를 해임했다. 정 전 사장은 이에 해임처분무효를 주장하는 소송을 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러 신문을 뒤져봐도 이 항소심 판결에 대한 기사를 쉽게 찾을 수가 없다. 보도할 만한 가치가 별로 없다는 의미인 것 같다. 참으로 이상하다. 한 나라의 대표적 공영방송 사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정부에 의해 부당하게 쫓겨났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판결이 났는데, 뉴스로서의 가치가 별로 없다니…. 하긴 정권이 바뀌고 나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쫓겨나온 기관단체장들이 한 둘인가. 그 중 사법부의 판결에 의해 부당해고된 것으로 판결을 받은 전례가 여럿이다보니, 뉴스를 다루는 사람들의 감각이 둔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는 동정심이 들기는 한다.
마침 지난 1월 20일에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52년 전 간첩으로 몰려 사형된 조봉암 선생의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기사는 모든 매체가 보도했지만, 사건의 비극성과 역사적 무게에 비하면 역시 소홀히 취급된 감이 없지 않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법원이 2심 판결을 파기하고 스스로 판결을 내린 사건으로 기록된 조봉암 사건에 대해 이용훈 대법원장이 수장으로 있는 대법원이 과거에 내린 판단에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역사에서는 정치권력에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런 기록들은 사실 역사의 현장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건과 희생자들의 숫자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정연주 전 사장이나 조봉암 선생의 사건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역사의 흐름에서 발생하는 흔하고 흔한 사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학교교육에서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 같은 민족적 영웅을 기리는 정신을 배운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후손들에게 약간의 금전적 보답을 함으로써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 독립유공자 자손들의 삶은 시대조류에 영합하여 영화를 누렸던 타협주의자들의 후손에 비해 초라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렵다. 이런 세태를 알고 있는 보통사람들은 권력의 눈치를 보는데 영악하고, 어느 쪽에 이익이 있는지를 판단하여 줄서기 하는데 뒤처지기 싫어한다.
좀 어색하게도 정의와 공정이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의 세태와는 한참 다르게, 사람들은 공정이나 정의에 대해 무심하다. 오히려 ‘권력은 올바르기 어렵고, 올바른 것은 권력이 되기 어렵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의 비율이 훨씬 앞선다. 옳고 그런 것을 너무 따지지 말고, 나에게 유리한 대로 행동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가치관이 대세다. 따라서 청문회의 단골메뉴가 되는 고위공직자의 천연덕스러운 불법과 부당행위에 대해 사뭇 관대하다. “뭐 그렇게 안할 사람 어디 있나.”하는 식으로 용서해주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어쩌다 판사들의 소신 판결이 화제가 되면, 다수의 노년층들은 “좌파 판사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이 문제야”하고 이념적 편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하긴 그들의 편향성을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조차 어색하긴 하지만-.
권력자들의 독선과 편향성은 더더구나 문제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요즘 우리사회가 추구해야 할 최선의 가치가 사회통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들만은 통합의 수단인 ‘소통’에 여전히 인색하다. 그런 옹고집이 가시화한 하나의 표본이 정연주 사건이다. 역사에 나오는 수많은 권력의 악업은 까마득한 역사 속의 옛일이라고 치부하더라도, 오늘 우리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야만에 대해 무심한 것은 공범자의 태도 바로 그것이다. 정치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당한 사람과 그 가족들에 대해 아픔을 함께 하는 마음이 모자란다면 우리는 아직도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식수준과 비례한다고 했다.
[김상태 칼럼 10]
김상태 / 언론인. 전 영남일보 사장.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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