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가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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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진보 개념의 역사이론적 차별화가 필요하다"


최근 우리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단연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몰락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갑작스런 등장이다. 오시장이 한나라당 출신의 보수 정치인이라는 데는 아무런 이견이 없다. 하지만 안교수를 진보 혹은 진보주의자라고 규정하기엔 뭔가 불편함이 있다. 해서 이를 두고 혹자는 니체가 말한 인류의 미래를 만드는 ‘신인간의 도래’라는 표현에 빚대어 ‘탈근대인의 도래’라고 진단한다.

진단에 따르면, 안교수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며,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아닌 동시에 진보와 보수 혹은 좌익과 우익을 모두 아우르는 인간이다. 때문에 안교수는 근대적 이분법의 진보와 보수에 갇힌 근대인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신인간, 즉 탈근대인이라는 것이다. 안교수의 등장으로 진보와 보수 양 진영에 심각한 구멍이 뚫리고 있는 현재의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우리사회를 근대를 극복한 탈근대사회라고 한다면 일견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현재 상황을 한번 짚어보자. 이미 한나라당에서는 이전투구가 일어나고 있다. 대선 후보와 관련해서 정몽준의 박근혜 때리기, 서울 시장 후보를 두고 홍준표와 나경원의 얼굴 붉히기, 범여권 후보로 이석연 끌어들이기 등에서 낡은 권력의 해체가 가시화될만한 내부 분열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진보 진영은 아무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분열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 시장 후보로 안교수와 단일화한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범야권 시민 후보로 확정된 것 외에는 새로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진보란 무엇인가


진보대통합은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문제로 큰 내홍을 겪고 있다. 진보신당 내의 다수파(통합파)와 소수파(독자파)의 분열, 민주노동당 안에서의 당권파와 반대파의 대립은 진보 진영의 한계를 그대로 노정하고 있다. 어쨌든 필자는 이 모든 현상의 중심에 안철수라는 탈근대인이 자리하고 있으며, 모든 논란의 핵심은 진보에 대한 오해, 즉 관점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서로 관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진보는 상반된 진영에서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진영은 국가 차원이나 제국주의 이념으로, 다른 진영은 마르크스 역사철학의 중심 개념으로.

도대체 진보란 무엇이기에 이렇듯 색깔 논쟁과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가? 인간의 역사와 관련된 표현들은 대체로 각 시대마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험 영역에서 유래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진보’ 개념 역시 바로 그런 표현들 가운데 하나다. 진보는 독일어 ‘Fortschritt’를 번역한 것으로 ‘걸어가다’(Schreiten)라는 뜻을 지닌 단어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이 용어는 공간적 요소를 함의하고 있으며, 걷은 행위가 이루어짐으로 해서 시간적 요소도 함께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걸어간다는 것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는 공간적으로 여기와 저기, 시간적으로 이전과 지금 그리고 이후를 연관시키는 ‘관계’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이렇듯 관계 범주로서의 진보는 일반적으로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모든 역사적 움직임 혹은 운동에 명명될 수 있는 유연하고 중립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다양한 행위 주체들의 활동과 경험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서로 관계 맺는 상호작용 현상을 확인한다. 과거 사건의 경과나 관계를 규정하는 용어들은 다양한 역사적 변화 및 운동과 관련되어 사용되었고, 18세기에 와서야 ‘역사 자체’라는 하나의 공통된 개념에 결합될 수 있었다. 진보 개념 역시 18세기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말하자면 진보 개념과 역사 개념은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진보의 기준과 시대적 이해

진보 개념은 인간의 삶의 경험이 철저하게 변화한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진보 개념은 그것이 자리 잡기 이전의 ‘전진’, ‘진전’과 같은 표현으로는 담보할 수 없는 역동성을 담고 있는 용어다. 역사적 운동을 나타내는 현대적 의미의 진보 개념은 원래의 어원적 의미를 상실했다. 진보 이전의 전진과 진전은 자연적이고 순환적인 사건의 진행을 이해하는 개념이었다면 진보는 역사적인 어떤 사건을 개념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보는 근대에 순차적으로 혹은 동시에 나타나는 일련의 수렴과 포섭의 상황에서 구체화된다. 그래서 독일의 역사학자 코젤렉은 진보 개념의 기준을 일곱 가지로 구분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진보는 첫째,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된 보편적 인류와 관련된 개념, 즉 역사철학의 보편적 개념이 되었다. 둘째, 그렇지만 종종 개별적인 영역 혹은 구체적인 행위, 즉 시간적인 앞섬(진보)과 뒤처짐(보수)의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셋째, 역사적 운동이 스스로를 진보의 주체로 생각하듯 진보 자체가 주체적 개념이 될 수 있다. 이때 진보 개념은 이념화되고, 이데올로기 비판의 대상이 된다. 넷째, 개선을 향한 운동, 즉 거의 종교적 색채를 띤 희망의 개념이 되기도 한다. 다섯째, 고대의 연속성 모델과 달리 비순환적인 진행을 의미한다. 여섯째, 유한한 범위 내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것과 그 목표를 무한하게 연기하는 ‘사이에서’ 동요한다. 일곱째, 종종 역사적 동력에 의해 발전적이라 정의되는 특정 역사적 시기의 정당화를 위한 ‘가속화’를 뜻하기도 한다.

진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시작되어 점점 빠르게 진행된 산업화의 지표이자 구성 요소다. 진보로 이해되는 근대는 주어진 삶의 근거에서 벗어나 열린 미래를 향해 항상 새롭게 구성된다. 역사처럼 진보 개념 역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행위와 경험의 여러 영역을 이론적.실천적으로 규정하려는 근대적 개념이다. 따라서 언급된 일곱 가지 기준들은 특정한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진보 개념의 역사이론적 차별화

한국사회에서 사용되는 진보는 19세기 서구의 산업화 과정에서 분출된 정치사회적 욕구를 반영하는 개념이며, 이것이 비서구 사회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정치적.사회적 상황을 거치면서 이루어졌다. 특히 비서구 세계로의 전이는 19세기 마르크스주의 진보 개념을 통해 이루어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진보 개념을 이념적 무기, 역사철학적 공리 그리고 이론적 범주로 사용해서 가르쳤고,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는 국가나 정당에서는 진보가 계속해서 중심적인 개념이 되었다. 진보 진영에서 사용하는 진보가 보수 진영으로부터 색깔 시비와 이데올로기 비판에 노출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필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진보 진영에게 바란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말처럼 “진보 개념에서 역사이론적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필자는 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안철수 신드롬을 탈근대인의 도래라기보다는 ‘진보 개념의 역사이론적 차별화’ 현상으로 읽고 싶다. 그럴 때 진보 진영은 진보에서 그 개념의 양가적 의미뿐만 아니라 삶의 질과 관련된 성찰이 필요함을 알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진보가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재성 칼럼 30]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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