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문다. 이 시간쯤 되면 지난 시간을 되돌아 봐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기억나는 것만이라도 정확히 짚어야 한다는 강박. 어쨌거나 지난 한 해도 다사다난했다? 필자가 지난 한 해 동안 느낀 피로감의 무게로 따지면 그렇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많은 사건과 난리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필자가 기억하는 가장 큰 사건은 권력자의 ‘공정사회’에 대한 관심이었다. 사건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기억되고 기록되는지에 따라 역사 서술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지난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쫄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래야만 사건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다.
권력자가 공정사회라는 사건에 큰 관심을 드러낸 것은 지난 2010년 8·15 경축사에서였다. 그는 ‘공정사회’를 집권 후반기 국정 지표로 제시하면서 이를 위한 첫째 과제로 “부패 없는 사회”를 꼽았고, 올해 초에는 ‘공평과세’를 공정사회 구현의 중점 과제로 강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권력자가 이토록 공정한 사회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문가지다.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불공정하게 해놓고 불공정하다고 판단하는 슬픈 현실의 사건. 불공정 내지 불공평은 인류 역사에서 끊이지 않는 슬픈 현실이기도 했지만 더 슬픈 것은 ‘권력’이 언제나 이 공정성을 좌우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권력자가 공정사회를 외치는 것은 그 배면에 은폐된 불공정사회라는 똬리가 가진 또 다른 모순적 힘의 강력한 폭발성 때문이다.
공정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내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대우를 받느냐 하는 문제다. 그리고 공정성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나 조직 또는 다른 기관과 내가 맺는 관계와 그 상호작용의 측면에서 발생하는 개인적인 문제다. 따라서 공정성이란 각각의 당사자가 갖고 있는 욕구와 관심 그리고 권리를 고려해 서로 균형을 맞추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공정성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보편적 관심사이며 거의 모든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공정성의 원칙은 모든 조직 사회에 적용되는 ‘황금률’이다.
하지만 이런 공정성은 다양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종종 훼손되며, 묵시적인 사회계약은 다소 위축된 형태로 변질될 수 있다. 심각한 불공정은 권력과 부의 지나친 편재에서 비롯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빵을 얻기 위해 폭동을 일으킨다. 권력 남용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불균형은 수많은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다. 때문에 권력과 이기심의 과잉으로 빚어진 착취와 불공평의 현상은 안정되고 공정한 사회의 주요 장애 요인이다. 이미 오래전에 루소는 “한 줌밖에 안 되는 인간들이 지나친 호사를 누리는 동안, 굶주리는 인민은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현실”에 경악하지 않았던가.
우리 사회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국민권익위원회(위원장 김영란)가 지난 10월26일부터 11월24일까지 국민(1400명) 공무원(1400명) 기업인(700명) 전문가(630명) 외국인(400명)을 대상으로 ‘부패인식과 경험’을 조사한 결과 일반국민의 65.4%가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부패했다”고 답했다. 2010년 51.6%에 비해 무려 13.8%나 급증한 것이다. 부패인식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이후 감소세를 보이다가 올해 들어 급증했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후반기 들어 공정사회를 외치면서 오히려 부패지수는 급증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구체적인 사례는 현 정부에서 벌어지는 인사 행태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출범 초기 ‘강부자’ ‘고소영’으로 대표되던 코드인사와 회전문 인사는 정권 말기로 넘어가면서 ‘자리 챙겨주기’와 ‘올드맨들의 귀환’으로 확대·심화되며 공정사회를 부르짖는 현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남기고 있다.
결과는 어떤가? 부패문제 해결이 시급한 분야를 꼽으라는 질문에 국민의 54.2%는 정치권을 꼽았다. 그 뒤를 행정기관과 사법, 공기업, 언론분야가 이었다. 국민은 공정사회를 외친 정치권이 가장 부패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며칠 전 오락 프로에서 본 장면이 기억난다. 제도 교육에 무관심한 남자 고등학생과 아이돌 여가수의 대화 장면이었다. 아이돌 여가수가 남자 고등학생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국회의원이라고 했다. 그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걸작이었다. “그냥 놀고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 학생의 답변을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의 희화화가 가능하다면 정치권의 부패가 얼마나 심한지는 미루어 짐작 가능한 것 아닌가. 또한 국민들은 정부의 부패방지 노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정부의 부패방지 노력이 부족하다”는 답이 지난해 42.7%에서 올해 53.8%로 11.1% 급증했다. “부패가 늘어날 것”이라는 응답도 17.0%에서 27.3%로 늘어났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부패에 대한 비관적인 응답이 많았다.
비단 정치권력뿐인가, 경제권력은 어떤가? 우유부터 시작해 디스플레이, 에어컨, 유리, 정유 등 여러 산업에서 담합으로 수천억의 초과이윤을 뽑아내는 자본가들은 ‘물가조작’, ‘뇌물’, ‘비자금’, ‘노조 말살’, ‘불법파견’, ‘조합원 사찰’, ‘용역깡패’ 등 온갖 경제학에도 없는 것들을 동원해 세상을 더럽히고 있다. 민중에게 물가폭등 고통을 떠넘기는 자본가들의 담합은 그들의 ‘경제학’이 가르쳐준 ‘기업 활동’이 되지만, 그들의 이윤을 조금이라도 위협하는 것은 ‘반시장적 정책’이 된다. 현 권력은 그런 자본가들의 범죄행위와 촘촘하게 결합되어 자본가들의 이윤을 조금이라도 훼손시킬 수 있는 정책은 대통령의 ‘공정사회’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사이비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사이비 공정사회의 이데올로기의 몰염치 아닌가.
저 권력의 몰염치를 그대로 두고 볼 것인가? 필자는 이 지점에서 작지만 매우 강력한 원칙을 제시하고 싶다. 모든 사회관계에서 그리고 모든 안정된 인간 사회에서 필수적인 원칙은 ‘정직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속임수, 거짓말, 사기, 절도, 그 외에 상대방에게 은연중에 해를 끼치는 모든 행위는 모두 불공정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불공정은 궁극적으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사회계약을 파괴하고, 우리 모두가 의존하는 상호주의 사회관계도 무너뜨린다. “인간이 하등동물과 다른 것은 무엇보다 도덕관념이나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 도덕관념이야말로 인간의 특성 중에서 가장 고귀하다.”는 다윈의 말처럼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이 지점에서 우리 각자는 자신의 내면에 밀쳐 둔 양심이라는 도덕관념을 긴급히 소환해야 한다. 그래야만 새해에 커다란 변화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뉴스 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이재성 칼럼 32]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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