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은 시민의 일원으로서 당선된 것입니다. 시민의 분노, 지혜, 행동, 대안이 하나의 거대한 물결을 이뤄내 승리한 것입니다. 시민이 시장이라는 정신은 온전히 실현되었습니다. 시민 여러분께서 돈이 없는 제게 자금을 만들어 주셨고, 조직이 없는 제게 시스템이 되어주셨고, 공격을 당하는 제게 미디어가 되어주셨고, 책상 위의 정책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1995년 시민의 손으로 서울시장을 직접 뽑은 이래 26년 만에 드디어 이번 선거에서 ‘시민이 시장입니다’라는 민주주의의 정신을 완성한 것입니다.” 서울 시민들께 드리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 인사말의 일부다.
대구는 왜 안 될까? 우라질!!(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대왕 세종이 사용하는 표현을 빌렸음) 대구에는 시민의 분노, 지혜, 행동, 대안이 없나? 서울을 부러워하며 열심히 씨부렁거리고 있는데 툭 튀어나온 말이 ‘혁명적 지역주의’였다. 얼마 전 필자의 지인이 했던 표현이다. 그는 아주 단호하게 혁명적 지역주의를 꿈꾼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필자의 가슴은 쿵덕쿵덕 뛰기 시작했다. 혁명,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표현인가. 지금도 그 여운이 남아 있다. 혁명적 지역주의, 너무 멋진 표현 아닌가? 지역주의의 온갖 어두운 면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대구라는 로컬에서 다시 지역주의를 주장한다고? 그것도 혁명적으로.
자유경쟁에 근거한 시장의 기능이 강화되는 글로벌 시대에 로컬 공간의 자율성에 기반한 시민사회의 기능이 강화되는 로컬 시대를 필자는 꿈꾼다. 로컬이야말로 시민사회의 공공영역을 심화‧확대시키는 공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운용되고 있는 중앙정부의 지방지배는 지방의 발전을 저해해 온 주요 요인이었다. 중앙정부는 지방을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으로 지배함으로써 지방민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그들 스스로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지방자치’라는 로컬 공간의 자율성 확보에 중대한 걸림돌이 되었다.
그렇다면 로컬 공간의 자율성 확보는 어떻게 가능한가? 만일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바로 이러한 물음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근본적으로 ‘글로벌과 로컬의 대립’에 있다고 생각한다. 로컬 개념은 주로 글로벌 개념과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때문에 글로벌과 로컬의 대립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선 ‘로컬’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정확히 되짚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글로벌과 로컬의 대립이 구체적으로 노정된 장소로서의 로컬 문제를 분명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로컬’(local)이라는 형용사의 사전적 의미는 ‘당신이 살고 있는 특정한 장소나 지역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정의는 문화적, 역사적으로 다양한 책임을 띤 ‘지역의’라는 의미와, 각자가 활동하는 ‘현장의’라는 이중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로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각의 인간이 살고 있는 ‘지역성’과 ‘현장성’이다. 개념적으로 표현하면, 특정 장소 혹은 국부를 지칭하기도 하는가 하면, 삶의 공간인 거기(장소)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하기도 하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또한 로컬은 그 지방(지역), 로컬적인 것, 로컬의 특성, 로컬 정체성, 아니면 로컬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로컬리티(locality)의 뜻과 일정하게 중첩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로컬 개념은 글로벌의 대타적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로컬을 자체적으로 규정하는 절대 규모와 절대 인구수가 존재하지 않고, 로컬을 단위규모나 인구수로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잠정적이고 임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로컬 개념은 글로벌 시대로의 이행으로 인해 국민국가의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에 따라 국민국가의 영토, 인종, 언어의 경계마저 약화되거나 사라지고, 동시에 파편적 로컬들이 단위적 통일체로서의 국민국가를 대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때의 로컬을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근대 국민국가에 대한 성찰의 기제로 작동하는 공간을, 다른 한편으로는 글로벌화의 흐름 내에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물론 양 공간을 견고하게 관통하고 있는 작동논리는 중심과 주변, 중앙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이다. 때문에 로컬에 대한 문제제기는 중심과 주변, 중앙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새롭게 사유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심과 주변, 중앙과 지방이라는 고착된 경계선을 비판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정형화되고 화석화된 로컬 규정에서 벗어나 새로운 로컬, 로컬리티의 의미를 구상해야 한다. 예컨대 공시적 관점에서 기존의 전통적 의미의 지역, 지방으로서의 로컬 개념을 정치경제적 용어로 재사유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로컬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중심에서 주변으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분산되어 나아가는 절차적 과정으로서의 ‘지역성’과 ‘현장성’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함축한다. 말하자면 중앙 권력이 지방에 개입하거나 간섭하는 것을 차단하고 지역의 풀뿌리 주체들이나 결사체들의 직접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지방의 발전을 이루고, 그 발전의 결실을 결집함으로써 국가의 발전을 이룩해 나간다는 상향식의 지역성과 현장성을 함축한 로컬이다.
그래야만 유연한 주체성의 지대로서 로컬의 관점이 구성되고, 그것에 따라 지역 풀뿌리들의 주체적인 참여를 실현하는 구체적 장소로서의 로컬리티가 구축될 수 있다. 필자는 이것이 바로 ‘혁명적 지역주의’라고 생각한다. 지인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내년에는 대구라는 로컬에서도 서울이라는 로컬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해보자.
[이재성 칼럼 31]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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