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지는 '사림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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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제설ㆍ제빙 공무원 나섰다", TBC "행정력 집중" / MBC "뒤늦은 제빙"


온통 흰 눈을 뒤집어 쓴 산과 들판, 얼어붙은 강. 도로 곁 밭 인삼포에도 눈이 한 가득했다. 지난 토요일 부석사, 소수서원 역사기행을 하면서 눈에 띈 현장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서 바라다 뵈는 안양루 저 넘어 풍경은 유홍준과 최순우가 독자들 마음  속에 아로새긴 이미지와는 별개로 우리 동네 옛 정경으로 살아 있었다. 지금은 변형되고 잃어버린 옛 정경….

박정희, 봉정사 극락전 엉터리 복원 충격

변형되고 망가지고 잃어버린 것은 초가집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두엄 옆에서 자라던 개똥수박이 사라진 우리 동네 옛 정경만이 아니다. 한겨레는 국내 최고 목조건물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이 엉터리로 복원됐을 가능성을 지적해 충격을 줬다(“국내 최고 목조건물 봉정사 극락전 엉터리 복원됐다”, 1월 11일, 24면, 문화). 1960년대 촬영된 안동 봉정사 극락전 사진과 복원된 후의 현재 모습(문화재청 사진)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차라리 망가뜨렸다고 해야 바른 표현일 것이다.

<한겨레> 2013년 1월 11일자 24면(문화)
<한겨레> 2013년 1월 11일자 24면(문화)

극락전 복원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사실을 논문으로 밝힌 건축사학계 권위자 주남철 교수는 박정희 정부가 “1972년 고증 없이 해체 복원하며/ 띠살창호·툇마루·단청 등 5가지/원형도 모른 채 중국풍으로 복원”했다고 했다. 민족문화재의 우수성이 강조된 것은 1972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선포한 것과 관련이 깊다. 건축사가 김봉렬 교수는 “극락전 복원은 박정희 통치시대의 강압적 분위기에서 국내최고건축물이란 명분만 내세워 무리하게 중국건축물 위주로 원형을 창안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했다.

강압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헌정질서를 파괴한 박정희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 강압분위기에 물을 타서 국민적 관심을 돌릴 ‘한 건’이었다. 박정희는 그것을 ‘최고의 민족문화재 봉정사 극락전 복원’으로 결정했다. 독재권력에 의지하는 강압적인 분위기는 특정한 소수 세력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뿐이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그럴듯하게 민주적인 모양새를 풍기도록 치장된다. 마치 조선시대 양반관료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태민안’이란 명분으로 ‘사림공론’을 주장했듯이 말이다. 이 때 사림공론은 소수 특권적인 양반관료들에 의해 만들어진 사림공론일 뿐이다.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사림공론은 ‘국태민안’도 ‘봉정사 극락전 복원’도 속마음에 품지 않는다.

'만들어진 공론'

그런데 요즘 언론이, ‘만들어진 사림공론’을 다시 만드는 작업을 폈다. 주민들이 엉덩방아 찧고 팔·다리를 무수히 부러뜨린 한참 뒤에 제설·제빙에 공무원들이 나선 것을 부각한 것. 그것도 ‘보도’란 이름으로.

「‘제설·제빙’ 공무원 모두 나섰다」 -매일신문이 지난 11일 1면 머리로 보도한 기사제목이다. 김범일 대구시장의 얼음제거 사진, 동구청 공무원을 비롯한 공공근로자들이 벌이는 작업 사진을 곁들인 보도였다. 1면 절반을 넘게 차지했다. 

<매일신문> 2013년 1월 11일자 1면
<매일신문> 2013년 1월 11일자 1면

이날 TBC도 메인뉴스 첫 보도로 「시도 대대적 빙판길 얼음 제거」를 보도했다. 경북도내 23개 시군 공무원 2만2천명이 이면도로를 포함한 얼어붙은 도로에서 얼음 제거 작업에 나섰다는 내용이다. 「빙판길 제거 행정력 집중」이란 눈도 붙였다. 하지만 매일신문 보도와 마찬가지로 “긴급 제빙작업을 벌이며 주민 불편 최소화에 힘을 쏟고 있”는 현장을 다뤘다. 왜 ‘긴급 제빙작업인지’ 맥락은 생략했다. ‘행정력을 왜 뒤늦게 집중했는지’ 그건 시청자들이 알아서 챙기라는 것이다.

대구MBC, 주민피해 초점…비판보도

대구MBC도 같은 날 메인뉴스에서 공무원들이 얼음제거작업에 나선 것을 「뒤늦은 제빙작업, 효과도 호응도 기대 이하」 제목으로 다뤘다. 그런데 건설업계 고질적 비리 관련 고발 기획기사를 머리로 내보내고 두 번째 기사로 다뤘으며 “주민들의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라고 비판적으로 다뤘다. "눈이 온 지 이주일이나 지나 주민 불편이 극에 달한 시점에 뒤늦게 시작한 제빙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들이 공무원들의 뒤늦은 제빙·제설작업을 곱지 않게 봤다고 했다. 대구MBC는 “이번 겨울 눈으로 생긴 낙상사고가 경북에만 천800 여 건이 넘”었다고 했다.


경북도,뒤늦은 제빙작업 (대구MBC / 뉴스데스크 2013-01-11)

◀ANC▶
이면도로나 골목길 걸어다시다보면 얼음 때문에 짜증 좀 나실겁니다. 실제로 다치는 분들도 적지 않은데요..
경북지역 자치단체들이 오늘 일제히 제빙 작업에 나섰는데, 주민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이상원 기자가 보도합니다.
◀VCR▶
원룸이 밀집해 있는 경산시의 주택가 이면도로.
공무원,경찰,소방대원 등 수 백명이 드릴, 쟁기, 삽 등 각종 장비를 이용해 도로를 뒤덮고 있는 얼음을 깨고 있습니다. 얼음이 워낙 단단해서 굴착기에 대형화물차까지 동원됐습니다.
오늘 경북도내 23개 시,군에서 일제히 실시된 제빙작업에 모두 2만 2천 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S/U) "하지만 주민들은 눈이 온 지 이주일이나 지나 주민 불편이 극에 달한 시점에 시작된 제빙작업에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집 앞의 눈은 주민이 자발적으로 치운다 하더라도 주택가 이면도로는 행정당국이 진작에 치워줬어야 했다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INT▶ 장달선/경산시 임당동
"아저씨들도 자전거 타다가 넘어지고, 어르신들이 이 동네에 많으니까 넘어지고, 다치셨어요.우리도 넘어지고,(뒤늦게?) 네,뒤늦게, 너무 늦게 오셨죠"
◀INT▶ 조용제/경산시 충효동
"눈 올때 바로바로 치웠으면 별일도 없었을 텐데 지금 와서 이러니까 좀 그렇죠' 이번 겨울 눈으로 생긴 낙상사고가 경북에만 천 800 여 건이 넘습니다.
◀INT▶ 이재춘 건설도시방재국장/경상북도
"대설특보가 5번이나 있었습니다. 5차례 많은 눈이 왔기 때문에 치우고나면 또 오고, 또 오고 하기 때문에"
대구 경북도 더이상 눈이 귀한 지역이 아닌 만큼 주민들을 위한 철저한 제설 제빙 대책이 마련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MBC NEWS 이상원 입니다.


 KBS대구는 아예 단신(‘간추린 소식’-‘얼어붙은 눈 일제히 제거’)으로 다뤘을 뿐이었다. 한 마디로 관심을 끌 만한 소식이 아니란 판단이었다.

주민피해 '계속'

제설·제빙‘에 공무원들이 나선 것은 보기 따라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이번 겨울 눈으로 생긴 낙상사고가 경북에만 천800 여 건이 넘는 주민 불편·피해를 보도의 초점으로 삼는다면 그건 언론에 맡겨진 기능을 제대로 한 보도다. 그러나 매일신문이나 TBC처럼 시장과 고위 공무원들이 기획 하고 언론에 통지하는 틀을 짠 다음 제빙·제설을 하는 것은 퍼포먼스도 아닌 쇼일 뿐이다. 거기에 주민피해는 중심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누구보다 실상을 먼저, 그리고 잘 알게 마련인 언론이 정작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 할 주민 불편·피해는 안중에 두지 않다가 공무원들이 여론에 떠밀려 거리로 나오면서 언론플레이를 벌이자 톱기사·머리기사로 짝짜꿍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만들어진 사림공론’이 아니고 무엇인가. 국민은 뒷전인….

‘만들어진 사림공론’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짝짜꿍언론이 명맥을 유지하는 한 ‘사림공론’은 계속해서 만들어질 것이고 돌이킬 수 없는 국민피해는 계속 반복될 것이다. 경북 안동 봉정사 극락전처럼.

골목여론 생활여론에 생기를…
 
‘만들어지는 사림공론’을 근절할 방안---그동안 권력이 실속 없이 망가뜨린 우리 동네 옛 정경을 되살리듯 절실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골목여론 생활여론을 두려워하도록 생기를 불어넣는 것. 권력에 복종하는 언론, 눈치 보며 대기업의 나팔을 부는 언론이 할 수 없는….






[평화뉴스 - 미디어 창 216]
여은경 / 대구경북민주언론시민협의회 사무처장. 전 대구일보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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