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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보', 양반관료 이해만 대변...2012 대선, '박근혜' 중심 보도


일개 유생도 조정공론 알게 한 조보

조선시대를 폐쇄사회로 알면 대단한 착각이다. 유교(주자학) 이념을 초기부터 대갓집 부녀들은 물론 백성들에게 그림을 곁들여 교육, 보급하기는 했지만 조선왕조는 고려부터, 아니 신라 때부터 기원한다는 신문-조보를 가지고 있었고 발전시켜 왔다. 그래서 서울에 살던 양반관료들은 물론이고 시골에 살던 일개 유생도 조정공론을 알고 임금의 동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면 조보는 과연 조선사회를 개방시켰는가? 역설적인 물음이 아닐 수 없다.

명종 때 문신 임보신(任輔臣)이 쓴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의 기사 가운데는 조보가 양반관료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던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선비들의 신망을 받던 정광필과 중종 때 권신 김안로에 관한 대목이다. 영남으로 귀양 갔던 정광필에게 종들이 하루는 밤중에 귀양지로 급히 달려왔다. 발이 부르트고 입이 말라 쓰러진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정광필의 자제들이 놀라고 당황해서 주머니를 뒤져 보니 김안로가 쫓겨났다는 조보가 있었다.

승정원에서 발행된 조보는 국왕의 동정, 왕실행사, 관료들의 인사이동, 지방관이 올려 보낸 장계, 기상이변 등 많고 많은 내용을 다뤘다. 위 글처럼 양반사족에 대한 정치적 서사에 국한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영조·정조대 최고의 기록가라고 할 만한 황윤석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세상에 전하기를 정승 정태화가 젊은 시절 산방에서 독서하다가 어떤 서생을 만났는데, … 또 이끌어 한 작은 집에 이르러서는 “이곳은 조선의  조보를 쌓아두는 곳입니다. 내 비록 은둔하여 여기로 왔지만 또한 부모의 나라이니 모름지기 소식을 접해야 하겠기에 날마다 구입하여 이처럼 되었습니다.” 하였다.


참봉 박상규가 순릉에서 수직을 마치고 어제 저녁 사창동으로 들어왔다고 하기에, 의영고의 역인으로 조보를 가지고 왕래하는 자에게 작은 편지를 붙여 (박상규에게) 보내고, 또 조보를 그에게로 전하지 말라고 분부하였다.

맨 앞의 글은 세상을 등지고 함경도 섬으로 들어간 젊은 서생조차 조보만큼은 구해 읽는다는 양반층의 일상을, 뒷글은 18세기 서울에 살던 양반관료들에게 조보는 이미 일상생활의 필수품이 된 사실을 보여준다. 조보는 조지, 기별지, 저지, 저보, 난보, 경보, 경기, 한경지, 저장 등으로도 불렸는데 세종 때에 저보, 문종 때에 조보란 용어가 처음 보인다. 왕조실록에서는 중종 때 조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다.

앞에서 제기한 물음을 다시 제기해보자. 조보는 과연 조선사회를 개방, 발전시켰는가?

조보, 조선사회 개방 못 시켰다


아니다. 왜?
조선왕조는 틀이 엄격한 법 규범 국가, 양반관료국가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군역이나 세금 등 공역은 양반관료만 면제 받는 철저한 신분제 국가였다. 전국을 메우다시피 했던 서원·사우에는 부림당하는 노비들이 득시글했고, 하다못해 지방 향교의 학생들조차 (부실한) 유학을 배운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역 등 공역을 면제받기 위해 60세까지 향교에 적을 올려두는 일이 많았다. 군역을 면제받을 정도면 수많은 자잘한 신분적인 장애야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향교 학생부에 적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들은 양인들 위에 서서 호령하던 서리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보는 폐쇄적인 조선왕조 사회를 개방사회로 이끌어내는 결정적 계기를 맞았다. 바로 민간에 의한 활자 인쇄 발행(민간인행)이 그것. 하지만 민간인행은 곧 실패한다.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 경연일기, 그리고 이를 인용한 선조실록(선조10년)에는 그 전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선조 억지, 조보민간인행 탄압만


2월 전에 서울의 직업 없는 사람들이 중국에서 통보를 모두 인쇄 발행한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본떠서 조보를 인쇄하여 팔아서 생활을 하려고 하여 의정부에 문서를 올려 조보를 인쇄하여 각 관청에서 값을 받아 생활할 것을 청하니 의정부에서 허락하여 사헌부에 품의하니 사헌부에서도 허락하였다. 그 사람들이 이에 활자를 새기고 조보를 인쇄하여 각 관청과 지방의 저리에게 파니 사대부로서 보는 자가 모두 이를 편리하게 여겼다. 두어 달을 실행하였는데 선조가 우연히 보고 진노 심하여 이르기를 조보를 간행하는 것은 사국(史局)을 사설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만일 타국에 유전된다면 이것은 나라의 잘못을 선전하는 것이다 하면서 대신들에게 묻기를 누가 이일을 주장하였느냐 하니 대신들이 황공하여 말하기를 명백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보를 간행한 사람들을 의금부에 가두고 심문하여 반드시 그 의논을 주장한 사람을 추궁하였다. 그 사람들은 이것으로써 생활하려는 것에 불과하고 사실상 의논을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 매를 여러 차례 맞아서 거의 죽게 되니 대간이 형을 정지하자고 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대신이 계청한 뒤에야 이를 법대로 처리하되 부도지율(不道之律-부도한 십악의 죄를 범한 사람에게 내리던 대죄)로 결정하라 하였다. 의금부에서 과중하다고 아뢰니 처음에 흔쾌히 따르지 않다가 다시 다음 율을 적용하여 모두 먼 곳으로 정배 보냈다.

서울에서 일간으로 인쇄해 석 달 가까이 발행, 판매한 민간인쇄조보의 관계자들(유식한 민간인, 즉 양반)은 죽음 직전에서 겨우 살아나 먼 곳으로 유배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조보인행 사업은 물론 세계적인 신문발행사업이었지만 다음과 같이 조선사회를 개방할 수 있었다.

세계신문사상 최초 '일간인쇄신문' 됐을 수도

①기별서리들이 한문과 이두를 섞어가며 조보체라는 읽기 어려운 서체로 베끼던 조보를 인쇄함으로써 활판인쇄술을 통하여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②일간으로 발행하면서 지방 양반들에게 판매를 함으로써 신문사업의 기업화를 다질 수 있었다.
③민간의 활자 사용을 더욱 촉진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조보 민간인행을 망친 것은 결국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조선왕조는 국왕이 통치하는 왕국이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국왕은 중국처럼 정복왕조의 황제가 누리던 절대적 통치권을 갖지는 못했다. 양반들의 수장 정도였고 세도정치시대에는 그들의 기세에 눌리기조차 했다. 그런데도 이미 의정부, 사헌부의 허가를 받아 민간인행을 시작한 조보는 대신(의정부), 언관(대간-사헌부) 관리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에 죽음 직전까지 갔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관료들의 책임회피는 조선왕조 시대나 18대 대선을 치른 현재나 다를 바 없음을 보게 된다. 문제성 있는 최시중·김재철·이길영 씨 등을 방송 관련 정책 결정자로 발탁한 피해는 국민이 볼 뿐이니까.

언론고위직 책임회피 예나 지금이나...직필정신 찾아볼 수 없어

그러면 선조대 조보 민간인행 사실은 누가 기록했나?
선조대 조보 민간인행 사실은 바로 사관이 기록했다. 이것이야말로 언론, 언론인과 관련해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대목을 2013년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천명해준다. 사관의 생명은 직필정신이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국왕도, 대신도 그에게는 두려울 바가 아니었다. 박정희가 일으킨 언론윤리파동에 맞선 기자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정치바람을 탄 대간, 대관 등 언관과 다른 대목이다.

MBC 뉴스데스크(2012.11.20) / 언론노조는 이 뉴스를 '최악의 대선 보도' 중 하나로 선정했다.
MBC 뉴스데스크(2012.11.20) / 언론노조는 이 뉴스를 '최악의 대선 보도' 중 하나로 선정했다.

지난 18대 대선에서 일부 신문을 제외한 조중동 등 보수신문, 지방신문들은 박근혜 후보의 대변지임을 자처하다시피 했다. 어디에도 두 후보의 정책을 비판적, 중립적으로 분석해서 보도한 것은 없었다. 방송은 더 가관이었다. KBS·MBC·SBS 보도는 대선 때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책보도를 외면한 이들 방송은 박근혜 후보 중심으로 동정보도에는 열성을 바쳤다. MBN·YTN의 진행은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비웃고 얕잡는 상말 투성이였다.

조선왕조 사회를 얼마든지 근대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역사적 뿌리를 가진 조보가 국왕의 한 마디와 양반관료들의 책임회피로 주저앉은 반면에 양반관료들은 군역, 세금 등 특권이란 특권은 모두 누렸다. 다시 말해 일반 평민(양인)이나 천민들은 조보는 물론 상소 등 제도권언론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그들에게 허용된 것은 정치적인 언사를 배제한 채 사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신문고 정도가 고작이었다.

평민들, 차별받을 때 '동요' 불러...민생·반봉건·반외세는 근대화 활화산

그러면 피지배 양인들은 어떤 언론을 활용했는가?
양인들은 지배층이 자신들을 짓누르고 속이고 할 때마다 눈을 감거나 귀를 막지 않았다. 동요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양반들의 짓누름과 차별, 속임을 나름대로 분석, 비판해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다산 정약용은 양인들 사이에 이런 언론이 100% 확산돼 있다고 『목민심서』에서 밝히고 있다. 인내의 한계점에 달했을 때 양인들은 1862년 진주에서, 1894년 고부에서 전국적인 언론을 전개했다. 그것은 비제도권 언론이었고 양인·천민들의 몫이었다. 민생이 도화선이 돼 3남을 휩쓴 진주민란, 반봉건·반외세 기치를 날리며 양반관료 지배층과 일본 침략 세력에 맞선 동학혁명/갑오농민전쟁이 그것이다. 그것은 이 땅, 우리 민족 근대화의 활화산-시작이었다.

직필정신과 담 쌓은 기자가 만드는 언론

18대 대선은 끝났다. 그러나 20대든, 50대든, 누구든 국민이면 임기 말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새로움’이 과연 살리는 ‘변화’였느냐, 죽이는 ‘칼’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점은 마치 「발행인 박근혜」에 의해 발행되는 듯한 편향적 보도를 일삼아온 매일신문, 영남일보, 말도 안 되는 지지율 보도를 일삼아온 조중동 등 보수 신문, 손발이 묶인 듯 일사불란하게 입을 다물어버린 공중파 방송과 같다. 아무리 언론이 권력을 만든다지만 직필정신과 담 쌓은 기자들이 만드는 이런 낡은 매체는 이젠 큰 틀에서 맞서 다루고 멀리서 봐야 한다.

이런 신문·방송은 비록 ‘공론’을 내세웠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분주했고 자신들의 교제 마당만 마련한 조선왕조 시대 조보와 다르지 않다. 충신이 잇달았다 해도 대다수 관료들이 앞에서 백성을 수탈하고 뒤로 일제와 손을 잡지 않고서야 어떻게 대한제국이 망할 수 있었을까?

대다수 국민을 죽일지도 살릴지도 모를 얼마 안 되는 양반관료들을 위해 존재했고 권력자 한 사람에게 휘둘린 ‘조보 언로’와는 이젠 거리를 두자. 중산층 3명 중 2명은 저소득층으로 내려앉았다는 보도가 지금 나오고 있지 않는가?

특권층 밝히고 거짓말 하지 않는 언로 선택을

지금 대다수 국민들이 선택할 언로-
우리 안에 의도적으로 숨어든 특권층을 드러내고, 거짓말 하지 않는 것. 교회든, 방송이든, 교육이든…. 밖으로 잠그고 안으로 짓누르는 보수언로는 대안이 될 수 없다.
  





[평화뉴스 - 미디어 창 214]
여은경 / 대구경북민주언론시민협의회 사무처장. 전 대구일보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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