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 아랑곳 않고 녹슨 고철 리어카에...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13.01.2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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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철더미 앞 일흔 할아버지 / 공사장서 다쳐 이 길로..."할망구한테는 나 뿐이야"


겨울비 사이로 리어카 한 대가 고물상으로 들어왔다. 허리까지 쌓인 고철이 굵은 고무줄에 묶여 있었다. 리어카가 멈추자 빗물과 함께 녹물이 흘렀다. 비를 흠뻑 맞은 노인이 줄을 풀고 고철을 내려놨다.

21일 아침 7시 30분. 10년째 고철을 주워 팔고 있는 이모(70.중구 동인동) 할아버지는 아침식사를 하자마자 리어카를 끌고 중구 동인동과 북구 칠성동 일대 거리로 나섰다. 몸이 좋지 않은 할머니가 "비가 온다. 그치면 나가라"고 말렸지만 할아버지는 "어제 하루 쉬었다"며 할머니 만류를 뿌리쳤다. 그 길로 할아버지는 우산도, 우비도 없이 3시간 가까이 비를 맞으며 고철을 찾아다녔다.

먼저 할아버지는 칠성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리어카를 끄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게 30분쯤 돌아다닌 할아버지는 칠성시장 고가도로 아래에서 버려진 컴퓨터 모니터 3대와 의자 2개를 발견했다. 리어카를 세워놓고 고철 상태를 살핀 뒤 줍기 시작했다. 옆에 버려진 박스도 주웠다. 비에 젖어 너덜너덜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무줄로 3번 감고 다시 리어카를 끌었다.

리어카를 끌고 고철더미 앞에 선 이모 할아버지(2013.1.21.대구 중구 동인동)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리어카를 끌고 고철더미 앞에 선 이모 할아버지(2013.1.21.대구 중구 동인동)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들한테 쓰레기여도 나한테는 안 그래. 할망구 약값도 대고 가스비도 내고...얼마나 고맙다고. 도둑질 안하고 정직하게 돈 벌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말했다. 신천교를 넘은 할아버지는 아파트촌과 상가 주변을 돌았다. 가게 앞에 녹슨 철근과 알루미늄 커튼 봉, 블라인드가 버려져 있었다. 뛰어가 품 안에 그것을 안았다. 빗물이 옷으로 흘러 들어왔지만 할아버지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두 번 정도 나눠 담은 할아버지는 "운이 좋네.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다. 그제"라고 말했다.

오전 9시 30분까지 할아버지는 신천동, 칠성동, 동인동 등 모두 3개 동을 돌아다니며 벽에 붙은 불법 광고물부터 페트병, 캔, 유리병, 냄비, 숟가락, 국자까지 주워 담았다. 원래, 고철만 취급했지만 고철 값이 폭락한 6년 전부터 어쩔 수 없이 폐지도 함께 모아야 했다. 

시간이 지나자 할아버지는 "춥긴 춥다"며 눈에 띄게 떨기 시작했다. 털모자에 고무 코팅이 된 장갑을 두 겹이나 끼고 옷도 6겹이나 껴입었지만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막진 못했다. 리어카에 고철들이 쌓인 만큼 할아버지 옷도 많이 젖었다. 걸음이 느려진 할아버지는 진한 입김을 뿜으며 "추워서 못하겠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다"고 말했다.

이날 할아버지가 입은 옷들은 한겨울 내내 할아버지가 입었던 작업복이었다. 모두 누가 버린 헌 옷들로 고철을 줍다 발견한 것들이다. "할망구는 버리라 카는데 멀쩡한 옷을 버리면 되나. 뜨시면 그만이지..." 그렇게 할아버지는 신발, 모자, 장갑 등을 주워 집에 가져갔다. "집에 자꾸 쌓이니께 할망구가 스트레스 받드라고. 그래서 개중에 이쁜건 이웃주고 대부분 고물상에 갖다 줬다"고 털어놨다. 

불법 광고물을 리어카에 싣는 이모 할아버지(2012.1.2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불법 광고물을 리어카에 싣는 이모 할아버지(2012.1.2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오전 10시가 돼서야 할아버지는 동인동에 있는 한 고물상에 도착했다. 고물상 일꾼들이 리어카의 고철을 내려놓는 동안 할아버지는 젖은 옷가지를 벗어 털기 시작했다. 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훑어 내리며 "할망구는 우산 가지고 나온 줄 알텐데. 알면 큰일 난다"고 웃음 지었다. 그리고, 주머니 깊은 곳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며 고철더미를 바라봤다. 얼굴과 상체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90년대 초반까지 할아버지는 용접 일을 하던 건설노동자였다. 한 곳에 정착 하지 않고 전국을 다니며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던 중 떨어지는 철근에 맞아 팔과 다리를 다쳤고 그 때 후유증으로 용접을 할 수 없게 됐다. 기계만 잡으면 손이 떨렸고, 오랫동안 앉지도 못하게 됐다. 산업재해로 인정받지도 못해 벌어놓은 돈은 모두 치료비에 썼다.

고향 대구에 왔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모든 게 싫었다. 몸 보다 마음의 병이 깊었다"고 할아버지는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할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 할아버지는 달라졌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고철을 발견했다. 그리고 곧장 리어카를 장만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쓰러지면 할망구도 살고 싶지 않을 텐데 내가 열심히 살아야지"라며 "내가 사는 이유도 할망군디. 같이 힘내서 오래 살게 고철 열심히 주워야지"라고 진심을 다해 고백했다.     

고물상 찾은 폐지 줍는 할머니들(2013.1.2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고물상 찾은 폐지 줍는 할머니들(2013.1.21)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고물상 일꾼들이 고철들을 종류별로 나누기 시작하자 할아버지도 따라 나섰다. 이들은 "고철, 스댕(스테인리스), 파지(폐지), 물랭이(물렁한 플라스틱), 생철, 따데기(딱딱한 플라스틱)"를 외치며 빠른 속도로 분류 잡업을 시작했다. 고물상에 산처럼 쌓여있던 고철들이 높이를 더 했다. 모든 작업을 마친 할아버지는 손에서 녹물을 닦은 뒤 고물상 주인에게서 30kg에 해당하는 고철 값 3,500원을 받았다. 고철은 1kg에 100원, 파지는 60원. 

10년 전만 하더라도 고철 줍는 일로 1백만원 가까이 벌었지만 고철 값이 계속 떨어져 할아버지 수입도 80만원에서 70만원, 60만원에서 50만원으로 점차 줄어들었다. 특히, 올 겨울에는 눈까지 많이 내려 며칠 일을 하지 못해 지난 한 달 동안 36만원 밖에 벌지 못했다. 또, 고철 줍는 사람도 늘어나 빨리 나오거나 늦게 들어가지 않은 날은 허탕만 쳤다. 한 달에 20-30만원 드는 할머니 약값과 병원비, 각종 공과금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돈을 받은 할아버지는 흥정도 않고 바지 속에 있던 줄을 당겨 복주머니를 꺼낸 뒤 돈을 넣었다. "여기 사장도 힘들다. 다른데 보다 많이 주니까 알아서 여기 왔지. 그래도 담뱃값은 벌었네"하며 씁쓸히 말했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번 돈을 생활비 명목으로 모두 할머니에게 준다고 했다. 뒤에 있던 일꾼들이 야유를 보내자 "돈을 벌었으면 갖다 줘야지. 지아비가 됐으면 먹여 살려야제. 우린 자슥도 없어. 할망구한테는 나 뿐이야. 고생만 하는데 이 재미라도 있어야지"라고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옷을 입은 할아버지는 "더 돌고 집에 가야 겠다"고 말한 뒤 리어카를 끌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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