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생태계의 반동성 이대로 좋은가?

평화뉴스
  • 입력 2013.05.2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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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기자의 양심과 사회적 책임감, 최소한 견지해야 할 윤리"


오래 전 EBS는 '괴벨스의 입'을 방송한 적이 있다. 방송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여론 선동이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히틀러의 참모이자 뛰어난 연설가였던 나치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언론 장악과 여론 몰이의 수단으로 전 국민에게 라디오를 공급하며 자신들의 거짓과 비이성적 사상을 주입시킨 인물이다. 라디오의 일방성은 ‘반복’이라는 수단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이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복만큼 세뇌에 좋은 수단은 없다. 권력자들의 일방적인 반복은 대중의 생각과 비판의 폭을 제한한다. 그 결과 대중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반복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괴벨스는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는 괴변을 주장하면서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정보를 반복 제공해 인간의 사상과 의식 그리고 태도 및 신념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우리는 지난 수십년간 괴벨스의 충직한 추종자들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의 충견들이 우리사회의 미디어 생태계를 지배하고 있다면 착각일까.

최근 우리는 괴벨스의 충견들에 의해 해괴한 경험을 했다. 북한군의 5·18 민주화운동 투입설과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성추행 사건의 종북세력 개입설을 주장하는 극우보수 세력의 역사 왜곡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5·18 민주화운동을 그 역사적 실체 규명과 평가가 끝난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극우보수 세력은 이 상식마저 거칠게 부정하고 있다. 이들의 거침없는 만용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극단적인 이들의 역사적 일탈의 배경은 무엇일까.

극우보수 세력의 근거 없는 음모론의 형태를 띤 이 주장들은 우리사회의 미디어 생태계가 얼마나 철저하게 훼손되어 있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극우보수 세력의 존재 과시 욕구와 상업주의가 끈적끈적하게 결합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생존과,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유지라는 은밀한 커넥션 말이다. 특히 TV조선과 채널A가 탈북자 증언의 형식으로 내놓은 5·18 당시 북한군 개입설의 선정성과 사자 명예훼손 행위는 일종의 '정치 포르노'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5월 18일 광주에서 거행된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장은 정치 포르노의 구체화라 해도 될 것이다. 정치 포르노를 생산한 미디어의 직격탄을 맞은 형국 아니었던가. 미디어를 통한 극우보수 세력의 딴죽걸기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기념식 행사는 반 토막이 났다. 행사 전 보훈처장의 망언으로 한바탕 소동이 있었던 터라 행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 것임은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다. 대통령이 참석하였으나 기념식장에서 TV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수행 경호원들이었을 만큼 기념식장은 썰렁했다. 망언의 후속조치였던지 마지막에 급조된 듯한 '임을 위한 행진곡'의 합창 역시 김빠지긴 마찬가지였다. 5·18 민주화운동의 기념은 앙상한 형식만 남긴 채 아무런 내용도 채우지 못한 공허함 그 자체였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미디어에 종속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미디어는 우리의 '인식'과 '행동'을 조종하고 조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미디어를 통제하기는커녕 그것이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조차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맹목적으로 끌려 다니기 바쁘다. 말하자면 우리는 미디어가 주도하는 일방성에 우리의 삶을 내팽개쳐둔 채 넋을 놓고 있는데, 가히 노예적 삶이다. 극우보수 세력이 비집고 들어온 틈이 여기다. 그들에게 역사 왜곡이 가능했던 지점이었던 셈이다. 하여 미디어의 일방적 선동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 구절처럼,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 존재이고자 한다면 미디어가 지배하는 시대에 미디어를 둘러싼 '진리'를 정확히 인식해야만 한다.

미디어는 기자의 양심, 사회적인 책임감, 그리고 돈벌이라는 자본의 논리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공공성의 영역이다. 해서 이 문제는 명확하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디어가 마땅히 가져야 할 지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미디어의 역할인 공공성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올바른 미디어를 지향하는 양심적인 기자, 민주사회에서 미디어가 최소한 견지해야 할 윤리, 기존 미디어의 대안이 될 새로운 미디어를 진정으로 고민할 수 있어야 비로소 미디어 생태계의 반동성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재성 칼럼 43]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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