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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파시즘의 준동이 가능한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대통령 선거 이후, 필자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소위 ‘멘붕’에 빠졌다. 처음에는 부정하다가 곧이어 분노로 그리고는 타협과 우울을 거치면서 종국에는 수용하는 마치 죽음에 이르는 말기 암 환자의 심리적 단계를 보여주는 듯 했다. 그리곤 곳곳에서 대선 패배 분석과 장래 전망이 이어졌다. 민주당의 자중지란에서부터 불법선거에 이르기까지 ‘멘붕’ 현상의 근거는 생각보다 다양했고 심각했다. 필자가 ‘심각’이라는 표현에 담은 뜻은 다 이긴 게임을 잃었다는 허무의 정서다. 말하자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궁극적으로 죽음이라는 문턱 앞에서 운명적으로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독일 철학자 니체의 소극적 허무주의가 그대로 재현되었다는 의미다. 과도한 표현인가.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길다. 한 달이 넘은 지금도 멘붕을 입에 담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제 승리 아니면 패배라는 우리의 허무적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이 지점에서 니체가 말하는 적극적 허무주의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말하자면 소극적 허무주의와 현실의 허무함을 깨닫고 그 허무함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강자의 허무주의를.

다행히 여기저기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공부를 하자는 사람, 사람을 키우자는 사람,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사람 등등. 무엇인가 새로운 방법과 행위조건을 기획하고 모색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최근 서울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대안언론 협동조합 씨알”이나 “직접민주주의연구원” 같은 경우도 그런 사례이다. 조심스럽지만 긍정적인 점이 있다면 이들의 키워드가 ‘협동’ ‘나눔’ ‘공존’ ‘평화’ 등이라는 것이다. 기존의 진보담론이 ‘평등’ ‘자유’에 너무 강하게 집중되어 있었다면 지금은 좀 더 다양한 가치들의 조합이 가능한 길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평등과 자유는 이미 인간 존재의 선험적 전제라 할 만큼 보편적인 것이라면 그것이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드러나게 하는 실행조건은 협동, 나눔, 공존, 평화와 같은 가치들이 아니겠는가.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가능한 이유를 2013년 현재의 한국 상황에서 찾고 싶다. 권력이 이양되는 지금도 가진 자, 갖지 못한 자 모두가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마치 지금의 한국 상황은 과거 파시즘의 발흥을 보았던 여러 사회와 많은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국정 담당자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파시즘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지난 5년간 이명박 정부의 공권력 운용과 언론・표현의 자유 억압이 과거 어느 파시즘 국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수준에 이미 도달해 있음을 경험했다. 이제 여기에다 ‘박정희 신화’만 곁들이면 파시즘 체제는 완성된다. 만일 파시즘 체제가 세워지면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많은 문제들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위기감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파시즘은 계급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자본가의 지배를 주장하는 자본주의에도 노동자의 지배를 추구하는 공산주의에도 반대하는 ‘제3의 길’을 제시하면서 권력을 쟁취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운동 초기에 무솔리니가 “우익의 반동성과 좌익의 파괴성”을 모두 배척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동일한 정치적 전략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파시즘의 준동이 가능한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는 인문학, 좁게는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다. 해서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지금껏 인문학은 사회의 실천적 구조와의 대결을 회피하고, 대신에 의식 속의 모험을 서술하고 탐험하는 일에 열중해 왔다. 문제는 이 모험이 사회질서의 혁신과는 무관해 보인다는 데 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인문학이 묘사하는 인간 정신은 현실적 삶의 숨 막히는 구조에서 도피한다. 그리고는 구체적인 문맥에서 벗어나고, 정신을 결여한 일상과 반복의 세계를 각성시키려는 의도나 의지도 없이 그저 부유할 뿐이다.

인문학이 적어도 인간의 현재와 미래를 인정하는 학문이라면 인문학의 방향은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문학이 자기 긍정과 타자와의 연계성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달려 있다. 해서 필자는 인문학이 인간성의 본질 규정에서 이탈하거나 초월하지 않으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하는 것으로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밝힌다.

첫째, 현실의 조건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사상, 조류를 연구하고, 사회문화적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정신과 구조가 벌이는 투쟁을 철저하게 추적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인문학은 이념이나 이상이 제도와 관행 속에 어떻게 동화되며, 동화된 이후에 어떻게 약화되고 교정되고 변형되어 체제의 이데올로기가 되는지를 드러내고 폭로해야 할 것이다.

셋째, 인문학은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박탈된 자유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상상하고 재구성할 자유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넷째, 기존의 질서와 현실의 경험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 타인의 지혜를 활용하고,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렸거나 아직 제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 즉 호모사케르들이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미시적인 것에서 거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감성에서 이성에 이르기까지 우리 경험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 밖의 유한성에 맞서 우리 안의 무한성의 반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재성 칼럼 41]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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