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신랑 신부가 되기로 약속한 젊은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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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 칼럼] "늘 해오던 일, 오늘 새롭게 그 일에 임하는 일상의 삶"


늘 해오던 일, 오늘 새롭게 그 일에 임하는 일상의 삶, 그것만이 인간의 것임을 마음에 새기도록, 그 인간의 것을 놓치지 않고 늘 오늘 해내도록, 여기 오신 모든 분들과 함께, 우리 신부 신랑에게 간곡하게 당부하는 주례사입니다.
인간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은 하늘에 돌려주는 지혜, 살면서 때로 그 삶을 멀찌감치 떼어 놓고 바라보는 여유를 부려야 겨우 얻는 지혜일 것입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세상을 탕진하는 야만, 그 야만의 삶이 교만의 극치인줄 모른다면야 그 죄를 어찌 감당하려는지. 모르고 짓는 죄가 알고 짓는 죄보다 더 사악하다는 불타의 가르침을 빌려오지 않아도, 삶을 공부하지 않는 게으름은 살아있어도 죽은 목숨인 것을, 하늘로 머리 둔 ‘생각하는’ 사람은 다 안다. 인간의 뜻대로 뭐든 할 수 있다고, 거기에 권세와 돈이 보태지면 불로장생마저도 못할게 뭐냐고, 호기 부리는 자들의 죄악을 누가 모르겠는가.

생각한다는 것은 ‘인 것’과 ‘아닌 것’을 갈라내는 분별심이 작용한다는 것이고, 그 분별심이야말로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인데, 그런데 특권이라고 하지만 얼마나 성가신 특권인지.
버릴 수 없는 욕망을 달고 살아야 하기에, 그 욕망과 짝을 이루어 때로 욕망을 도전의 힘이 되게 하고 때로 욕망을 용서로 대체하는, 욕망에 버금가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기에, 요컨대 삶을 정돈할 필요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분별력을 짓고 지어야 한다.

욕망과 분별력을 넘나드는, 죄 짓고 용서 구하고, 그 단조로운 일상을 군말 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 삶의 본래 모습이라고, 나이가 들면 다 받아들인다.
 
욕망하고 그리고 뒷수습하고, 이 아이러니를 인간의 것이라고 유머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유머는커녕, 제 맘에 들지 않는다고 ‘돼먹지 않았어’라고 일도양단하고, ‘두고 봐 이것들’이라고 남을 시험에 들게 하기 일쑤이니.

‘어머니’ 라고 부르는 ‘우리 말’을 다듬어 쓰는 것, 그것만이 영혼의 상처를 치유한다.

아이들은 열두 번 다시 태어난다고, 강한 것을 만날수록 내가 연약해지라고, 사랑의 가족일수록 다툼이 잦은 법이라고, 예리한 칼날 같은 말일랑 아예 속에 담지 말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물러설 수 없는 곳으로 몰아가지 말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뭇사람을 품을 수 있다고.

이 빛나는 어머니 말을 살려 쓰려면, 먼저 어머니께 효를 다하는 눈에 보이는 행동을 늘 오늘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우리 신랑 신부에게, 효를 세상 보는 눈이 되게, 욕망과 분별심을 하나로 뭉친 어머니 말을 공부하도록, 이 나이에도 그 공부가 턱없이 부족해서 마음에 한을 남기고 사는 주례의 아픔으로, 간청한다.
뜻을 세우고 그 뜻을 표적으로 점찍고 그 쪽으로 낭비 없이 내달리는, 일상이 아닌 비상한 삶일랑 잠시 내려놓는 것이 어떠냐고 덧붙여 간청한다.

용서의 끈을 쥐고 있는 일상, 그 일상을 영위한다. 열정 없이는, 늘 해오던 일을 오늘 새롭게 시작하는 일상을 살지 못한다. 그 열정을 두고 행복이라는 말을 만들지 않았을까.  야망 때문에 자신을 단속하고 남을 경계하는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휴식 같은 것을 두고 행복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욕심을 버린다니 마음을 비운다니, 그런 당찮은 말 같지 않은 말을 아예 하지 않는다. 욕심은 인간의 것인데,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 된다. 다만 기꺼이 욕심의 죄 값을 치루면 된다. ‘당신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고 탄식하는 연약함을 고백하는 죄 값이면 충분하다.
차이를 용인하고 차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내심의 약속이면 충분하다.

당신을 초대하여 대화하는 권능, 그 카리스마라면 하늘과도 이야기 나눈다. 그럴 바에야 주저하고 점잔뺄 이유가 없다. 화를 내어야 할 때 화를 내고, 싸워야 할 때 싸우면 된다. 떠들썩한 한 판의 말놀이, 사건을 저지르는 한판의 말놀이가 모여 세상을 혁명한다.
욕심을 부려도 될 만한 부모가 없다고, 학력이 미치지 못한다고, 불평하지 말자. 다시 늘 해오던 일을 오늘 새롭게 시작하는 열정이 없음을 탄식한다. 그것이면 족하다.

번민 가운데서 안식하는 일상이기를,
누가 어떤 자리에서 보아도 아름답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소박한 일상이기를,
여기에 계시는 모두와 함께 빈다.

나이든 사람이면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주례사이다. 그만큼 오래 살아왔다면 누군들 젊은 세대에게 당부할 말이 없겠는가.
죄를 짓은 사람도, 다만 용서를 구하는 심정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면 주례사를 쓸 수 있다.
어떤 이는 냉소한다. ‘너는 뭐 그리 잘 났느냐’고. ‘너는 뭐 그리 정의롭냐’고.
대꾸한다. ‘꼭 잘 나야 하나.’ ‘도대체 잘 나는 게 뭔데, 정의가 뭔데, 당신은 알고 있소.’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짓고 살아왔다고 고백할 지언정, 그래도 나는 기꺼이 주례사를 쓴다. 이즈음 유행하는 문자로 그만한 힐링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례사를 쓴다. 유증서를 쓰게 하는 인문학 프로그램도 있던데.             






[김민남 칼럼 27]
김민남 / 교육학자. 경북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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