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을 탁월하게 하는 자가 진정 탁월한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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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 칼럼] "박 대통령, 끝내 원칙을 지키는 지도자로 기억되기를 희망한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겠다는 약속이다. 투명하다는 것은 누구와도 대화할 용의를 표명하는 것이다. 적과도 만나서 풀겠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나라를 투명하게 운영하겠다는 것, 권력을 전횡하지 않는다는 대국민 약속이다.

박대통령의 ‘원칙을 지키는’ 포지션 설정은, 임기응변에 능하고 나대기 좋아는 자를 지도자로 모시는 것에 진력이 난 국민들에게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국민들은 원칙지킴이 단지 입장표명이 아니라 그의 삶의 자세라고 믿기에, 그 믿음이 깨지지 않는 한 그에게 보내는 지지도 견고하리라고 나는 본다. 전에 대쪽을 포지션으로 설정했지만 도저히 대쪽 같지 않은 삶의 내력이 드러나며 오히려 망신살이 뻗친 예를 잘 알고 있기에, 대통령은 아마도 끝내 원칙을 지키는 자세를 흐트리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원칙을 지켜낼까?
임기응변에 능하고 나대기 좋아하고....그건 아니라는 것을 반면교사들 통해 알았을 터이고,  이미지 관리에 치중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추가하여 알았으면 한다. 안 되는 것을 알았으니, 해야 하는 것은 뭘까?
말을 대담하게 하는 것이다. 말하는 자신을 향한 비수 같은 말을 하면 된다. 그 말은 구체적이고 명쾌하다.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말이 아니며 단칼에 자르는 단언도 아니다. 두고두고 의미를 새기는 맥락이 되는 말을 한다. 
누구와도 말을 섞을 용의가 있음을 어느 사안 어느 자리 누구를 만나는 맥락을 구성한다. 거기서 나누는 말은 스스로 책임질 용의를 표명하는 말이다.
책임진다는 것, 당신의 원망에 응답하겠다는 것이다.
원칙이 살아 있는 말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숙고하는 것, 외면하지 않고 일일이 응대하는 품격이다.
그 때 주변이 살아서 움직인다. 비로소 주변을 살리는 지도자가 탄생한다. 지도자는 자신이 탁월하다고 해서 전혀 자랑할 것이 못 된다. 당연히 탁월해야 하기에 그렇다. 카리스마를 세운다든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은 애초부터 지도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것과 같은 짓이다.

한국의 민중은 늘 향수에 젓는다. 향수는 혈혈 단신 뼈 빠지게 일을 하며 가족을 지켜온 민중이 위안을 얻는 방식이었다. 향수가 그들의 안식이었다. 향수는 한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한국인의 한은 삶의 곡절을 거쳐 사람다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힘, 능력이었다(박경리 선생이 어느 자리에서 풀어낸 한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향수에 젓는 민중은 건강하다.
한편 역사적으로 그 향수는 그들에게 거짓과 고통을 안겨주기만 하는 권력엘리트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민중의 향수는 난관에 처한 삶에 희망을 주는 말 한마디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다. 그들의 희망의 원천은 자식에게 삶을 인도해주는 말이었다. 그들에게 지도자는 그 말을 본이 되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 지도자는 삶을 앎으로 갈무리하는 내공을 쌓는 사람이었다.

민중은 언제나 내공이 깊은 가르치는 사람을 기다리는 자세로 서있다. 그것이 한국인을 일본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닌 천상 한국인으로 만들었다.
한국인 속에 도사린 민중적 정서는 ‘가르치는 사람’이 된 지도자를 향한 향수 형태로 나타난다.

박정희향수를 진하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고 그 향수를 수구보수의 퇴행이라고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찌 되었건 가르치는 자가 풍기는 기품 같은 것이 박정희 향수의 실체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민족에게 어떻게 작용했던지 간에.
김대중의 공부하는 자세도 마찬가지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도 그의 공부하는 자세에 대해 외경심을 보내고 있다.

신문에서 박 대통령이 하는 말을 들었다.
야당의 천막농성에 대해, ‘지난 선거에 국정원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야당대표와의 만남에 대해, ‘내가 거부당하고 있어요.’ 그렇게 잘라 말했으리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아무튼 신문대로 라면, 대통령의 말은 맥락이라고는 한 치도 없는 생갱하기 짝이 없는 원칙 언급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듣고 말을 섞을 여지라고는 없다.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직접 도움을 받은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지금 시위를 하는 항의자들도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은 난관을 뚫는 품격은 아니다. 일방적 통고 일방적 지시의 말이다.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공포감 조성이다.
향수, 향기를 맡을 수가 없다. 

삶을 버거워 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말을 대신해주는 지도자를 기다린다. 그들의 삶을 말하는 것은 추상이 아니다. 아주 구체적이어야 한다.
철탑 위 노동자를 향해 직설적으로 그들에게 ‘응답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그들은 다른 누구보다 정직하다. 그들은 민중적 건강한 향수의 정서를 간직하고 있다.
 
원칙 책임 응답, 그것이면 된다. 당장의 해결책을 정답 같이 말하는 것은 오히려 실망만 남긴다.

주변이 설치고 있다. 이석기라는 자의 치기도 우습고 그를 향해 돌진하는 새누리당 어느 국회의원의 치기도 마찬가지로 우습다. 153명 전원 명의 이석기 제명안 제출, 전원이 똑 같은 입을 가지고 똑 같이 말한다. 우습다.

야당과 시민사회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 국정원개혁 같은 것이 대중에게 매력이 있을까? 국가의 직접적 폭력이 난무할 때는 대중의 반응을 쉬이 끌어낸다.
국민의 매력을 끌만한 것이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묘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통령에게 표를 주지는 않았지만, 끝내 원칙을 지키는 지도자로 기억되기를 희망한다.






[김민남 칼럼 29]
김민남 / 교육학자. 경북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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