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으로 증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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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 칼럼] "갈구하여 얻은 민주주의를 죽이고 있습니다"


벽을 마주 보고                                             
주먹질이라도 하십시오.
갈구하여 얻은 민주주의를 죽이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전직 대통령이 행동하기를 간청하며 던진 말입니다.

‘그래 지금 독재라도 한다는 거냐,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 그만하면 민주주의 됐어. 북한, 무상급식, 다 포플리즘이야. 경제가 나아져야지. 전라도에 몰아주던 것을 이제 경상도 여기 대구로 돌리고 있잖아.’ 나이가 지긋하고 배울 만큼 배운 저의 동료 한 분이 해대는 민망하기 그지없는 말입니다.
대구에 부동산 값이 들썩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 대구분들 아주 신이 났습니다.

저는 국정원 선거개입이니 기록물공개니 하는 정치적 만행보다 그것을 옹호하는 정치인들의 논리도 없고 윤리도 없는 ‘막말’에 더 화를 내고 있습니다. 신문이 편집해준 기사를 약간 윤색하여 마치 자기말인양 마구 떠들어대는 저의 동료 한 분의 철없는 언동에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려니 하면서도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심사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화는 모르긴 해도 가슴에 흔적을 남길 터이고 그만큼 우리자신을 거칠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냉소 허무 같은 건강하지 못한 심성에 이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야 차라리 저들처럼 경망스러운 말을 아무렇게나 내지르는 편이 났겠다 싶습니다.

벽을 보고 주먹질이라도 하라고, 그게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한 까닭을 이제사 알 것 같습니다. 그렇게라도 행동해야 거칠어지지는 심성을 보호할 수 있을 테니까요.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했다가 그 분도 참 많이도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행동하는 욕심이라고 희화한 모욕도 감내해야 했습니다.

말 같지 않는 말을 퍼붙기 하는 저들에게, ‘도대체 당신의 양심은 무어냐고, 양심은 놔두고 당신의 욕망은 뭐냐’고 묻고자 합니다. 당신의 욕망은 무엇인지, 당신의 양심은 무엇인지, 당신의 행동을 가지고 증거해보라고 요청합니다. 당신은 무엇에 그렇게 배고파하며 기를 쓰고 채우려 하는지, 부동산인지, 권세인지, 학력인지, 그것을 드러내어 당신의 욕망이 이런 것이라고 ‘정직하게’ 말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당신은 무엇에 눌려 그렇게 챙기려고 애쓰는 것을 다소간 절제하는지, 가족인지, 조직인지, 민족인지, 공존인지, 고통 받는 이웃인지, 그것을 솔직히 털어내어 당신의 양심이 이런 것이라고 고백하도록 요청합니다.
욕망과 양심을 그럴듯한 언사로 포장하지 말고 행동으로 드러내면 당신의 욕망과 양심을 기꺼이 존중하겠습니다. 행동은 정직하니까요. 정직의 덕목마저도 없을 바에야 도대체 누구하고 소통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행동을 가지고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양심을 들어내어 스스로 살펴야 하겠습니다. 채우려고 애쓰는 것과 절제하려는 것, 그것을 공개하여 불이익을 당한다고 해도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욕망도 행동의 근원이고 양심도 마찬가지로 행동의 근거입니다. 도덕적으로 순화된 욕망을 양심이라고 할 터이고, 도덕적 순화는 인간의 가치를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는 선택(행동)방식을 익힌다는 것이겠지요.

행동하는 사람만이 욕망을 양심으로 격을 높일 수 있습니다. 행동이 먼저입니다. 행동해야 비로소 자기를 의식할 수 있으며 자기를 의식하는 것은 타자의 시선이 된 자아를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자아를 발견하는 인간화의 길은 순탄치 않습니다. 자기를 설득하는 언어 없이는 절제의 행동(선택), 다시말해 자신을 낮은 자리에 배치할 수 없습니다. 그 언어는 앞으로 나서는 행동을 정돈하면서 세련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면 앞 뒤 가리지 않고 나서게 되어 있다고 보는, 측은지심은 오늘도 유효한 인간심성 개념일 것입니다.
이럴까 저럴까 재보는 생각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81년 언제쯤이라고 기억합니다. 전두환을 당 공식 대통령후보로 확정한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전당대회 결과를 보고하려, ‘수락해야 할 터인데...’라고, 태산 같은 걱정을 안고 청와대로 가는 보무도 당당한 고위 당직자들의 사진을 곁들여 보도한 신문 기사를 대하고, 저들은 국민을 ‘지적 장애인’으로 취급한다고 단정한 기억이 있습니다. 아무리 위를 보고 보신하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게까지 철판 얼굴일 수는 없다고 봤거든요.
지도층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의 철판 얼굴은 지금도 조금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말은 인간고유의 것이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은 그의 삶을 대변하는 사상입니다. 저들의 심성을 부드럽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저들에게 당신의 욕망은 무어냐고 양심은 뭐냐고, 행동으로 증거하라고 대들어야 하겠습니다.

저들에게 대드는 것만큼 우리자신도,
냉소와 허무에서 발하는 욕설 같은 말로 세상을 처리하지 않고 욕망과 행동의 역동에서 오는 주먹질로 오늘을 말하는 일상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자기를 향한 사랑도 있고 타자의 시선으로 자기를 들여다보는 일도 있습니다. 둘 사이의 긴장이 있는 일상에서 생기는 말을 즐겨야 하겠습니다.
 
부디 이미지를 보고 속단해버리지 맙시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속을 물어야 하겠습니다.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김민남 칼럼 28]
김민남 / 교육학자. 경북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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