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와 폭력, 그리고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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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현 칼럼] 국가지도자, 최소한 그 덕목에 대한 고려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중학교 3학년 때, 남해안의 항구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그때는 학교폭력이 난무한 시절이었다. 힘 쎈 학생들이 약한 학생들을 괴롭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학생 간부가 일반 학생을 폭력으로 다스리는 것을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교사들은 회초리가 아닌 몽둥이를 공공연하게 들고 다녔고, 지금은 군대에서조차 금지되고 있다는 얼차려와 단체기합이 일상이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게 없었던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교사의 통제만 따를 뿐이었고, 대화와 소통을 시도하는 교사는 우습게 여겼다.

  그 와중에 한 번도 학생에게 큰소리를 내지 않았던 선생님이 있었다. 국사 과목을 담당하던 교사였다. 체구도 작고 목소리도 작았던 그분은 당연히 우리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서 연합고사를 준비하던 시절, 여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에 국사 과목의 진도는 현대사 부분으로 접어들어 가고 있었다. 수업을 진행하시던 선생님은 갑자기 교과서를 덮고 더 이상 강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의아하기는 했지만 그 부분은 입시에 잘 나오지 않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수업을 할 필요가 없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가을이 무르익어갈 즈음에 일어난 사건이 없었으면 아마도 아직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건은 이른바 ‘부마사태’였고, 그 항구도시가 바로 지금은 창원으로 통합된 경남 마산이었다. 그해가 1979년이었다.

  죄송하게도 지금은 성함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돌이켜 보면 그분이야말로 학생들을 인격으로 대해주던 드문 교사 중의 한 분이었던 것 같다. 그러한 교육 방식에 무시로 응답했던 우리들의 태도는 단지 그때 어렸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권위주의적 가부장문화와 폭력적 군사문화에 찌들었던 시대의 분위기가 낳은 결과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시대의 풍경으로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과연 이제는 그러한 문화 환경을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최근에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수업시간을 이용하여 체벌의 필요성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을 때, 어느 정도의 체벌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에 혼자 경악한 적이 있었던 기억에 미뤄보면 지금도 그 인식이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다른 대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존대를 하는 것을 어색하게 여기거나, 수업시간에 딴 짓하는 학생들을 엄하게 다루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학생들이 여전한 것을 보면 다르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우리는 폭력에 의한 권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폭력에 의한 권위와 기능에 의한 권위

  권위라는 것은 기능에 의해서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특정한 영역에서 특출난 능력을 가지는 것이 권위가 아닐까.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그 일을 잘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고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다. 그러니 권위라는 것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인정해주는 것이다.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스스로 권위를 세우려고 한다거나 심지어 남들보다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잘 한다고 우기면서 기능이 아니라 경험이나 연령으로 권위를 주장하는 것을 권위주의라고 할 수 있다.

  권위주의는 폭력을 수반한다. 기능적으로 열등한 이가 우수한 이를 통제하려니 폭력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 과도하게 조성된 선후배 간의 서열이 그중의 하나이다. 도대체 집단에 약간 먼저 들어오고 약간 늦게 들어온 것이 무슨 큰 차이인 것인가. 물론 먼저 들어온 사람이 조금의 경험이 있기에 새로 들어온 사람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미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마다 학습능력은 차이가 있고, 서로의 영역이 다른 경우도 있다. 그 경우에까지 선배라는 이유로 후배에게 강압과 지시를 일삼는 것은 폭력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그 집단이 학습과정이라면, 말하자면 학교 같은 조직이라면 더욱 더 문제이다. 학습과정을 누가 더 빨리 이수해내느냐가 중요하지 누가 더 먼저 시작했느냐가 무슨 상관이랴. 주로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선배라는 권위, 말하자면 폭력에 의해서 통제하려 든다. 자신보다 집단에 늦게 들어온 사람이 자신보다 더 중요한 직책을 맡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갖는다. 그래서 어린 사람을 상급자로 모시는 것이 부담스럽고, 여성이 남성의 상사가 되는 것이 껄끄럽다. 또는 과거에 동등하게 지냈거나 우습게 보이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자신이 속한 집단의 지도자 역할로 부상할 때 강한 거부감을 갖는다.

  흔히들 지도자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신에게 받은 특별한 은총이라는 어원을 가진 이 카리스마라는 용어는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힘을 뜻한다. 그래서 카리스마를 가진 이는 크고 작은 집단의 지도가가 되기 쉽고, 선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카리스마는 키워나가는 능력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카리스마에 의한 통솔은 합리적이거나 민주적이지 않다. 그저 납득할 만한 원인이나 뚜렷한 인과관계가 없이 대중의 추앙을 받을 뿐이기 때문이다. 카리스마를 갖고 능력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카리스마가 그렇게 쉽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카리스마만 가진 채 기능적 역할을 할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말하자면 단지 카리스마만이 리더의 요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카리스마만으로 권력을 가지게 되면 그야말로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카리스만 가진 채 능력이 없는 지도자보다는 카리스마는 부족하더라도 역할을 수행할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더 낫다. 특히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면서 구성원과 소통해야 하는 민주적 집단에서 카리스마는 오히려 지도자가 가져서는 안 될 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카리스마를 가지지 못한 채 흉내를 내려고 들면 폭력이 동원되지 않을 수 없다.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작게는 몇 명이 모인 계 모임에서부터 크게는 국가 사회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에는 마땅한 지도자의 자질을 가진 이가 없다고 한탄한다. 물론 능력도 없는 주제에 독선과 아집만 내세우는 이가 지도자가 되는 것 만한 불행도 없고, 그러한 지도자 밑에서 고생을 했거나 하고 있는 경험을 갖고 있기에 자질없는 지도자가 권력을 다시 갖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다. 그런데 혹시 그러한 진단은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에 의한 것이 아닐까. 지도자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고, 그래서 지도자가 될 사람은 원래부터 정해져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다양한 주장에 귀를 기울이며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질고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사람을 경멸하고,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이 역할을 수행하면서 성취해 나가는 것을 질시하고 폄하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카리스마를 가진 이가 폭력과 강압을 휘두르며 나타나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기능과 소통에 의한 리더십

  과연 우리가 민주적인 지도자를 가질 만한 준비가 되어 있을까. 자신이 상대방을 대우해 주면 상대방도 자신을 대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과연 유효할까. 자신의 손해를 보면 상대방이 약간은 양보해 주리라는 믿음은 또 어떤가.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안다고 했던가. 자신을 낮추는 지도자가 있으면 그만큼 그의 노력과 의지를 인정해 주기는커녕 지도력 없는 지도자로 낙인찍기 바쁘다.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강력한 리더십이란 것이 무엇일까. 집단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이견을 보이지 않고 추종하도록 하는 힘이라고 할까. 그런데 집단의 구성원은 다양하고 그들의 요구는 더욱 더 다양하다. 그러니 구성원 한 개인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당장 소통이 부족한 지도자가 된다. 그런데 구성원 개개인의 요구를 들어주다보면 통솔력이 부족한 지도자가 된다. 통솔력과 폭력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발 폭력을 휘두르는 교사를 무서워하면서 말 잘 듣는 학생이 아니라 인격으로 대우하는 교사를 존경하는 학생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눈을 부라리며 욕설을 퍼붓는 사람보다는 온화하게 잘못을 감싸주는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폭력과 강압에 의한 리더십이 아니라 기능과 소통에 의한 리더십이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총선이 끝나고 어느 새 정치권은 대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총선 결과에 따라 대통령 후보자로 손꼽히던 정치인들에 대한 하마평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아직 20대 국회의 회기가 시작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권 인사들의 몰락이나 야권 인사들의 부상 등을 언급하고, 현재 여야 지도부의 리더십에 대해서 평가하고, 대선 주자의 자질에 대해서 설왕설래한다. 물론 아직 구체적인 모습은 오리무중이다. 연정이나 통합의 가능성도 있고, 상상을 초월하는 정계 개편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전망이나 예상은 여전히 정치공학적이다. 지역기반이 어떻니 진영논리가 어떻니 하면서 과연 누가 높은 득표율로 당선가능성에 근접하느냐는 것이다. 그러한 계산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국가 지도자로서의 덕목에 대한 고려가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국가 지도자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져 기습처럼 나타나는 인물이 아니라, 역할을 기능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바탕으로 민주적 과정에 의해 선출되는 인물이라는 인식 정도는 공유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합리와 공정을 외치던 민주적 지도자가 나락으로 떨어지던 아픈 경험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권오현 칼럼 3]
권오현 /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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