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연민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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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현 칼럼] "나를 해고하는 법안에 내가 서명을 할 수 있겠는가"


권력이란 정책을 결정하는 힘이다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권력을 재편할 수 있는 총선이 이제 두어 달 앞으로 다가왔다. 일반인들이야 먹고 살기 바쁘다고 해도 정치권에서는 이러저러한 행동들을 발빠르게 진행하고 있다.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야권의 이합집산은 말할 것도 없고 친박 비박 진박 어쩌고 하면서 이른바 ‘박 터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 여권도 심상치 않다. 공공연히 정치에 환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 대한민국 국민만큼 정치에 관심이 많은 이들도 드물다. 옳든 그르든 웬만한 사람들은 정치평론가 이상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권력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개인의 생활이 어떻게 바뀌는가 하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어느 권력자와 친분이 어느 정도 있느냐 하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지역에서 특정 정치세력이 굳건한 것이 여기에 연유한다. 정치가 일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권력에 연연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이익에 맞춰서 정책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익이라는 것이 공적인 것에 바탕으로 두어야 하지만, 종종 그것이 사적인 것이어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정의를 외치고 복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지만, 들판에서 아무리 목놓아 외친 들 무슨 소용이랴. 정작 정책을 결정하는 무리는 따로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정당한 방법으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얻어서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활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권력이란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러한 권력이 없는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서 권력을 가진 이에게 호소한다. 그 방법은 정책 제안이기도 하고 정치 평론이기도 하다. 때로는 언론을 이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용할 수 없는 많은 이들은 또 다른 방법을 택한다. 자신과 같은 요구를 하는 이들과 연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그것이 시위이고 서명운동이다.

시위하는 세력과 서명하는 권력

  지난 10월에 야당 대표가 1인 시위를 하고 나섰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그 문제에 관한 한 권력의 한 축인 야당으로서도 전혀 의사를 관철할 수 없었던 현실을 보여준 것이었고, 당시 야당의 내부 상황에 의해서 대표가 지도력을 강력하게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야당 대표의 1인 시위는 비난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1인 시위라는 것은 아무런 세력도 없는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공론화하기 위해 선택하는 마지막 수단이 아닌가. 개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막강한 세력을 진두지휘하여 그것을 통하여 의견을 개진해야 할 야당의 수장이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설사 상대방이 절벽을 보고 말하는 느낌을 주더라도 최소한 야당 전체를 이끌고 장외투쟁을 벌여도 시원찮을 판에 혼자서 피켓을 들고 서있다니.

  그런데 이번에는 대통령이 서명운동에 나섰다. 이것이야말로 희극이 아닐 수 없다. 천만 명이 됐든 16만 명이 됐든 그렇게 서명한 명부를 누구에게 보여줄 것이라는 말인가. 서명이라는 것이 권력이 없는 다수가 권력을 가진 자에게 의견을 개진하기 위한 방법이 아닌가. 그런데 권력의 정점에 위치한 국정책임자가 서명을 한다니 도대체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없는 것이 아닌가.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에 대해서는 이제 면역이 생길 정도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망각에는 실소를 넘어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니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다시 깨닫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한겨레> 2016년 1월 19일자 1면
<한겨레> 2016년 1월 19일자 1면

어느 야권 세력의 논평처럼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100만 명의 서명과 국정교과서 문제에 대한 137만 명의 서명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는 계기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면 현재 대통령이 야당 시절에 사학법 문제에 대해서 촛불을 든 전력이 있는 만큼 장외투쟁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간 일어난 일련의 집회 및 궐기대회를 종북이라는 프레임으로 몰아붙여 왔던 대통령이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모로 우스울 뿐이다.

  그러고 보면 광우병 사태부터 세월호 참사를 거쳐, 그리고 아직 이어지고 있는 교과서 국정화와 위안부 합의 등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위와 서명이 있었다. 그때마다 권력은 귀를 막고 눈길을 돌리고 있다.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권력

  서명 운동까지 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잊고 있는 정권이 어떤 경우에는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다. 절차도 과정도 무시하고 번개불에 콩 볶듯이 한 순간에 처리해 버린다. 대표적인 것이 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더불어 이른바 ‘위안부 합의’이다. 현 정권의 소통 부재는 이제 더 이상 논란거리도 못되려니와, 작년에 벌어진 수많은 사건의 대미를 장식했던 것이 바로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였다. 아무런 사전 과정도 없이 연말에 기습적으로 발표된 이 외교적 합의는 일부 무조건적인 지지자를 제외하면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가스통을 들고 설치는 극우단체마저도 이 부분에서는 조심스레 접근한다. 그 합의에는 정작 당사자인 할머니들이 제외되어 있다. 그러면서 “살아계실 때 사과를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협박을 하고 있다. 가해자는 반성을 하지 않는데, 피해자만 용서를 하라고 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조금만 그 분들의 입장을 감안해 보면 나올 수 없는 발언과 행동이 분별 없이 자행되고 있다. 그야말로 후안무치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가끔은 이러저러한 인문학 강좌를 마치고 나면 가끔 강연을 잘 들었다는 이들과 뒤풀이처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다. 살아가기에 팍팍하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선각자인 양 현 정권의 실정을 토로하면서도 결국은 야당의 발목잡기나 이른바 사회불만세력의 음모로 결론을 맺는 기-승-전-종북의 지역의 정서를 잘 알고 있기에 낯선 사람과의 정치적 논쟁을 피하고 있다. 웬만하면 참석자의 말을 듣는 정도로 끝내고, 굳이 말을 시키면 동의는 하지 않지만 말씀을 잘 들었다는 정도로 맺고 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참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칠곡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서의 일이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칠곡을 지역구로 둔 국회의원의 발언을 두고 속시원하다면서 그 사람이 다시 출마를 하면 꼭 찍어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것은 “미국 경찰이 총을 쏴서 시민들이 죽는데 10건 중 80~90%는 정당한 것으로 나온다”고 하면서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을 옹호하는 발언이었다.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농민 한 분이 물대포를 맞아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는 사태 직후였다. 정치적 신념과 진영 논리를 넘어서, 사회적 질서를 위해서라면 그 구성원의 생명까지 희생되어도 된다는 인식에는 인내의 한계가 오지 않을 수 없었다. 4월 혁명이 어떻게 터졌으며 6월 항쟁이 무엇에 촉발되었는지 잊었느냐고 따졌다.

  언제부터 생명을 이렇게 가벼이 여겼다는 말인가. 지난 시절의 독재와 철권정치를 깨뜨렸던 단초가 단식투쟁이었고 투신이었고 분신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생명을 걸고 실행했던 투쟁방식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경외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삭발투쟁은 그저 퍼포먼스로 치부하고 있고, 한달 반 이상 계속되는 단식에도 아무 느낌없이 조소의 눈초리만 보낼 뿐이다. 도대체 인간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보이지 않는다.

명분도 변명도 없는 정권

  국회 회기뿐만 아니라 임기가 다 끝나감에도 불구하고 지지부진하게 협상을 이어가고 있는 쟁점 법안 중의 하나인 노동법 또 마찬가지이다. 대통령이 서명까지 해가면서 여론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지만, 거기에는 여론의 동조를 받을 여지가 없다. 그러니 경제단체의 동원과 중복 서명에 의한 전개가 일어날 수밖에. 노동유연성이 높아져야 국가경제경쟁력이 올라간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제경쟁력은 세계 26위인데, 노동유연성 항목이 83위라서 점수를 까먹은 상황이기에 노동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법안을 반드시 만들어야 된다고 한다. 숫자를 통한 허상의 대표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누구를 위한 노동유연성이고 경제경쟁력이란 말인가. 노동유연성은 쉽게 취업할 수 있는 기회를 말한다.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보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취업 자체가 힘든 마당에 마음대로 해고하고 일용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무슨 의미라는 말인가. 이 역시 조금만 입장 바꿔 생각하면 저지를 수 없는 일인데 그 약간의 역지사지를 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서명운동이라니. 나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도록 만드는 법안을 만들자고 하는데 내가 서명을 할 수 있겠는가.

민주노총의 '노동개악 저지 대구경북 총파업대회'. 참가자들이 "해고는 죽음이다"는 의미로 상복을 입고 행진하고 있다.(2015.12.16. 새누리당 대구경북시도당 앞)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인턴기자
민주노총의 '노동개악 저지 대구경북 총파업대회'. 참가자들이 "해고는 죽음이다"는 의미로 상복을 입고 행진하고 있다.(2015.12.16. 새누리당 대구경북시도당 앞)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인턴기자

  그야말로 후안무치이다. 그래도 이전 정권은 독재와 철권정치를 해도 명분은 있었다. 민족중흥을 제시했든 복지사회 구현을 제시했든 캐치프레이즈는 장밋빛이었다. 많은 독재자들이 그랬듯이 민족주의를 왜곡하여 갖다 붙이기도 했고, 국민을 몽매한 대상으로 보더라도 현혹할 만한 구호를 붙여서 기만이라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마저 없다. 정권책임자는 알아듣지 못할 말만 나열하고 있고, 그를 둘러싼 권력실세들은 대놓고 기득권자를 위한 정책을 펼친다. 거기에는 일말의 명분도 변명도 없다. 사라진 7시간에 대한 해명도 없고 국정 교과서를 만드는 집필진에 대한 설명도 없다. 그것을 알고자 하면 사회불만세력이고 종북세력이 된다. 그러한 후안무치는 역지사지의 부재에서 나온다.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주는 이들을 소외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은 존재에서 나오고, 존재는 연민에서 나온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쌩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 권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의 별을 떠나 여러 행성을 여행하는 어린 왕자가 첫 번째로 방문한 별에서 만난 이가 왕이었다. “짐이 만약 어떤 장군더러 물새로 변하라고 말했는데 장군이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건 장군의 잘못이 아니라 짐의 잘못인 것이다” 이것이 왕의 통치방식이다. 그는 당연한 것만 명령한다. 그의 권위는 필연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왕의 권위는 우주의 필연법칙 혹은 운영원리를 수용하는 데에서 나온다. 왕에게 권력을 이양한 것은 우주의 운영원리인 것이다. 왕은 그것에 맞춰 권력을 발휘할 수 있다. 왕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고 어린 왕자를 위하여 해가 지도록 명령했다면 해는 물론 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권위만 떨어졌을 것이다. 자신에게 권력을 준 존재를 망각하고 그것에 맞선다면 파멸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제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기 위해서는 국민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 국민은 생명을 가진 인간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재이다. 그 존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권력은 그저 공허한 폭력이 될 뿐이다.

 생명을 가진 인간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감정이입이 필요하다. 먹고 살기에 힘들다고 넋두리하는 개인과 개인이 처한 각자의 다양한 삶의 형태는 물론이고 광장의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군중 속에서 촛불을 바라볼 때 떠오르는 감성, 물대포를 맞을 때 온몸에 다가오는 물보라가 전해주는 공포, 휴대전화 문자로 해고 통지를 받을 때 한 순간에 몰아치는 인생에 대한 회고, 엄동설한에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비닐을 뒤집어 쓰고 있을 때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잡념들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일단 권력을 내려놓고 그러한 감각을 느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을 다시 집어들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이입은 연민이다.

  생명에 대한 예의도 없이 존재에 대한 연민도 없이 결정하는 정책은 필연적으로 소외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러한 권력은 공허하다. 그러니 권력이 시위하고 서명하는 사태가 나올 수밖에.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망각하지 않는 권력, 올바른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 그래서 제대로 된 권력은 연민에서 나온다.

 
 





[권오현 칼럼 1]
권오현
/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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