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형무소 끌려갔다는데"...한국전쟁 과거사에 묻힌 아버지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 입력 2017.07.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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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숙(72.가명)씨, 67년 전 한국전쟁 때 달성군서 사라진 아버지 흔적찾아 대구 방문
10월항쟁유족회 "문재인 정부, 국가폭력 과거사 진상규명 시급...2기 진실화해위 출범"


67년 전 사라진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는 전씨(2017.7.27.10월항쟁유족회 사무실)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67년 전 사라진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는 전씨(2017.7.27.10월항쟁유족회 사무실)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끝내 아버지 흔적을 찾지 못한채 진상규명 신청서를 작성하는 전씨(2017.7.27.10월항쟁유족회 사무실)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끝내 아버지 흔적을 찾지 못한채 진상규명 신청서를 작성하는 전씨(2017.7.27.10월항쟁유족회 사무실)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대구형무소로 끌려갔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 생사조차 모르고 살았습니다"

27일 대구시 달서구 성당동 '대구10월항쟁·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유족회(회장 채영희)' 사무실. 경기도에 사는 전미숙(72.가명)씨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사라진 아버지 흔적을 찾기 위해 아버지의 고향 대구로 왔다. 아버지가 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일지도 모른다는 작은 단서를 찾기 위해서다. 일흔이 넘은 딸은 수 많은 낡은 문서를 손가락으로 하나 하나 짚어가며 67년 동안 가슴 속에 묻어 놓은 아버지의 이름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1960년 6월 9일자 <대구매일신문>에 공개된 '대구형무소 수감자 명부'를 확인했지만 아버지 이름은 없었다. 이후 착잡한 심정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달성군 옥포면에도 들렀다. 하지만 아버지를 기억하는 이들은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아버지를 잃은 10월항쟁 유가족도 전씨를 위로했다. 일흔 딸의 아버지는 어두운 과거사 어디에 여전히 잠들어 있다. 

대구형무소 수감자 명부에서 아버지 이름을 찾고 있는 전씨와 가족들(2017.7.27.10월항쟁유족회 사무실)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대구형무소 수감자 명부에서 아버지 이름을 찾고 있는 전씨와 가족들(2017.7.27.10월항쟁유족회 사무실)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1960년 6월 9일자 <대구매일신문>에 공개됐던 대구형무소 수감자 명부(2017.7.27.10월항쟁유족회 사무실)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1960년 6월 9일자 <대구매일신문>에 공개됐던 대구형무소 수감자 명부(2017.7.27.10월항쟁유족회 사무실)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여름. 전씨 아버지 전정만씨는 당시 31살 나이로 경상북도 달성군 옥포면사무소(현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 서기로 일하고 있었다. 6살이었던 어린 전씨는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배급하는 일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러던 어느 여름 날, 검은색 짚차에서 낯선 남자가 내리더니 아버지를 데리고 사라졌다. 당시 6살이던 미숙씨는 쌀가마니 위에 앉아 차를 타고 떠나는 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가 금방 올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밤 이후 67년간 돌아오지 않았다. 

이날 전씨가 10월유족회 사무실을 찾은 것은 전씨의 이모가 대구형무소 수감자 명단에서 아버지 이름 석자를 봤다고 했기 때문이다. 전쟁 당시 대구형무소에는 많은 민간인들이 끌려가 희생됐다. 실제로 외삼촌이 곧바로 대구형무소로 달려가 확인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트럭에 실려 나간 뒤였다. 이후 동네에는 '아버지가 무장공비에게 쌀을 줬다는 이유로 대구형무소에 끌려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아버지를 가슴에 묻고 살았다. 그러다 올해 처음으로 달성군 가창면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창면은 아버지가 사라진 후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던 지명 중 하나다. 하지만 1959년 댐이 생겨 유골 발굴이나 조사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이곳은 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 1만여명이 묻힌 곳으로 10월항쟁유족회는 추정하고 있다.

전씨는 "67년 전 갑자기 골목에 검은 차가 들어와 낯선 사람이 내렸다. 아버지는 그 차를 타고 사라졌다. 금방 올거라 생각했는데 생사조차 알지 못한다. 이제 흔적이라도 찾고 싶다"고 호소했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1만여명이 희생돼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가창댐(2017.4.7.달성군 가창면)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1만여명이 희생돼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가창댐(2017.4.7.달성군 가창면)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힌 한국전쟁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피해자 명단(2017.7.27.10월항쟁유족회 사무실)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힌 한국전쟁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피해자 명단(2017.7.27.10월항쟁유족회 사무실) / 사진. 평화뉴스 김지연 기자

이처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유가족들과 시민사회로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10월항쟁 가담자, 국민보도연맹원, 대구형무소 수감자 등이 1950년 7월 7~31일까지 군과 경찰에 의해 달성군 가창면, 경산 코발트광산, 칠곡 신동재, 달서구 본리동 등에서 사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2010년 이명박 정권 당시 진실화해위 조사기간이 종료되면서 지금까지 피해가 규명된 이들은 수백여명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해 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국민 눈높이에 맞는 과거사 문제 해결'을 포함시켰다. 오는 2018년 상반기 중 2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과 활동 재개 추진을 약속한 것이다.

김영호 10월유족회 부회장은 "국가폭력에 희생된 민간인은 최소 수 십만여명으로 추정되지만 신원이 확인된 이들은 수 백여명에 불과하다"며 "문제는 시간이다. 이제는 유족들도 고령으로 돌아가시고 있다. 더 늦기 전 문재인 정부는 2기 진실화해위를 출범시켜 과거사를 진상규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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