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의 캔자스와 2018년의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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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제모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토마스 프랭크 저 | 김병순 역 | 갈라파고스 펴냄 | 2012)


이 책은 2012년에 한국에 소개되었다. 2012년은 대선이 있던 해였다. 나는 2012년 대선이 끝난 후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위해 투표한다는 이 책의 제목은 당시 나에게 매우 흥미로웠다. 이명박 정권을 거친 후 박근혜를 선택한 대한민국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부시의 재선여부가 걸린 2004년 미 대선을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지역이었던 캔자스가 공화당의 아성으로 변한 이유를 밝히려는 책이다. 지역 정치인, 시민단체, 주민들의 인터뷰를 통한 미시적이고 실증적인 논증을 하고 있는 이 책의 원제는 ‘What’s the matter with kansas(캔자스에 무슨 일 있었나)’이다.

캔자스는 미국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지역이었다. 1990년대 레이건과 부시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캔자스의 노동자, 농민, 서민은 경제적으로 매우 피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노동자와 농민으로 대표되는 서민은 기존 정치체제에 분노했다. 이러한 분노는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주도하여 분노의 원인을 제공한 공화당이 아니라 이에 반대한 민주당에게 온전히 표출되었다. 이는 계급배반적인 투표로 나타났다.
 
 
 

보수 우파는 1960년 이후 '자유주의' 세력에 빼앗긴 정치적 주도권을 찾아오기 위해 보수적 기독교 가치관을 전면에 내세웠다. 기독교 가치관과 결합한 보수 우파는 경제적인 문제를 철저히 배제한 채 낙태, 동성애, 진화론, 총기소지와 같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들을 이슈화 시켰다. 이런 작업에는 보수 우파의 첨병인 미 전역의 씽크탱크와 폭스나 워싱턴 포스트와 같은 보수 언론이 동원되었다.

민중은 분노의 근본원인인 경제 또는 계급문제보다는 교회와 언론이 정해주는 가치를 통해 그 분노를 표출할 출구를 찾았다. 그 대상은 명문대를 나와서, 와인을 마시고, 잘 난체하는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겸손하고 청교도적이며 소박하고 선한 캔자스의 서민들은 기독교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응징을 가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향하였고, 공화당은 캔자스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보수 우파는 종교와 언론을 통하여 경제 문제로 나타난 민중들의 분노를 도덕적·종교적인 가치관으로 치환했다. 그리고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자들을 가치의 적으로 지목함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했다. 저자는 이를 ‘문화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저자는 민주당의 무능 또는 잘못된 정책을 또 하나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레이건 부시 정권을 거친 후 클린턴이 8년간 집권하였으나 경제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민중들은 민주당 정권이 경제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또한 민주당의 리더들은 전통적 지지세력인 노동자들을 제쳐두고 선거자금을 더 많이 지원해 줄 수 있는 지식인과 기업들에게 영합하는 중도화 전략을 취하였다. 그 결과 민주당 스스로 경제문제를 선거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이런 전략의 근저에는 전통적인 지지세력은 민주당 이외에는 갈 곳이 없고, 민주당은 경제문제에서 공화당 보다 한 발짝만 앞서 있으면 된다는 안일한 현실인식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 세력은 방향을 잃게 되었고,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종교를 중심으로 한 지역조직이 전파한 기독교적 가치였다. 언론이 중심이 된 대중매체는 이를 확대 재생산하였다.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세력은 기독교적 가치를 신봉하는 애국자가 되어버렸고 캔자스는 그렇게 공화당에 넘어갔다.

저자가 지적한 계급배반투표는 사실 캔자스에 특유한 현상이 아니다. 대한민국 특히 대구경북의 투표성향을 보면 계급배반투표는 민주주주 선거의 일종의 필요악으로 보인다.

이 책은 ‘가난’과 ‘부’ 그리고 ‘역설’이라는 의문을 가지고 시작하였지만, 그 결론은 ‘가치’에 있다. 저자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역설을 찾았으나 캔자스의 유권자들은 그것이 조작된 것이든 자발적인 것이든 ‘가치’에 투표를 하였다. 결국 캔자스의 유권자들의 입장에서 역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에 투표를 한 것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책이 숨기고 있는 민주주의 선거의 본질에 주목해야 한다. 선거는 유권자가 하는 것이고 유권자는 그들의 경험과 인식을 바탕을 후보를 선택한다. 유권자의 선택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유권자의 경험과 인식을 공유해야 하고 그들의 언어와 행동으로 유권자에게 다가가야 한다.

유권자들은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이 기반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그들 나름의 경험과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가치’를 형성하고 그 ‘가치’에 따라 선택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정치지도자는 유권자들이 공유하는 ‘가치’를 공유해야 하며 때로는 그 ‘가치’를 창조하거나 선도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최종적인 결론이다.

대구경북은 박정희 이래로 1당 독재에 가까운 정치체제가 지배해 온 곳이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역설이 극단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곳이다. 대구경북에서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수구 보수세력이 40년 가까이 그 지배체제를 공고히 해 온 원인은 저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대구경북민들의 ‘가치’를 선도하고 그에 부합하는 행동을 지속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역주의든, 근대화 신화이든, 유교에 맞닿은 출세지향주의이든 말이다.
 
이런 대구경북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통해 대구경북민들의 삶을 향상시키고 인권 등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보수우파가 캔자스를 가져오기 위해 어떠한 전력을 세웠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막연히 기존 ‘가치’의 부당함을 역설하여 대구·경북민들이 바뀌길 기다리거나, 중앙정치의 후광에 기대거나 특정 정치인의 인기에 영합하여 우후죽순격으로 후보를 내는 방법만으로는 대구·경북민들의 ‘가치’를 가져올 수 없다.

늦었지만 지난 40년간 대구경북을 지배해온 ‘가치’가 무엇인지, 이에 공감할 방법이 있는지, 아니면 이를 대체할 새로운 ‘가치’를 생산할 것인지, 그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책 속의 길] 128
류제모 / 변호사. 법무법인 우리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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