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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하게 재미있는 일기장
정은정 / 만화 『송곳』(최규석 글.그림 | 창비 펴냄 | 2015,2017)
2018년 02월 05일 (월) 11:51:35 평화뉴스 pnnews@pn.or.kr

나는 자주 우는 사람이다. TV를 보다가, 책을 읽다가, 뉴스를 보다가, 팟캐스트를 듣다가, 길을 걷다가, 혼자 노래를 하다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눈물이 흐른다. 엉엉 울기도 한다. 자주, 많이 우는 사람인데도 유독 정말 많이 울었던 몇 몇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은 시간이 많이 지났어도 꽤 또렷이 기억난다.

2009년 늦봄이었다. 대구에서 손꼽히던 레미콘 회사가 현장 노동자 전체를 정리해고 한다고 공고했던 날이었다. 그 노동자들은 두 해 전이었던 2007년에 우리 노조에 가입했었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회사의 불법적이고 부당한 횡포를 참지 못해 노조를 찾아 왔었다. 노조 활동을 통해 그 횡포들을 차츰 없애 나갔지만, 이전과는 다른 시련에 맞서야 했다. 회사는 처음에는 노조를 받아들이지 않고 없애 버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노조에 대한 혐오감과 적대감으로 새롭게 무장했다. 60을 조금 넘긴 회장님은 죽을 날을 받아놓은 노인처럼 골골거리며 시도 때도 없이 노조 때문에 회사 망한다고 앓았다.

2008년 말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건설업이 어려움에 처했고, 레미콘 회사들도 시련을 맞았다. 노회한 회장님은 위기는 기회라는 걸 꿰뚫고는 기업회생을 신청하면서 조합원이었던 현장 노동자들 전체를 정리해고 한다고 통보한 것이다. 공장 문을 완전히 닫는 게 아니고 회사를 회생 시키려고 하면서 현장 노동자 전체를 정리해고 하겠다고 당당히 밝힐 수 있는 게  이 나라의 사장님이다.

전원 정리해고! 조금은 몽환적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우리는 아주 화가 났지만, 멍하기도 했던 것 같다. 회사 근처 식당에서 조합원 형님들과 저녁을 먹으며 못 먹는 술을 몇 잔 마시고 조금 취해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택시 안 혼자 있으니 울음이 터져 나왔다. 십 수년 일 해왔던 회사에서 공고문 한 장으로 해고통보를 받은 조합원 형님들의 허망하고 억울한 마음이 헤아려지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내릴 때까지 멈추지 못하고 꺽꺽 울었다.

   
▲ 만화 『송곳』 중에서

그 날 이후, 1년 가까이 조합원 형님들과 투쟁을 했다. 멈춰버린 회사에서 농성을 시작하고, 매일 매일 회장 집과 법원, 노동청, 채권은행 앞에서 집회를 하고, 여기저기 다니며 선전전을 하고, 뒤에는 단식도 하고... 그 투쟁은 어쨌든 나름대로 잘 마무리되어 몇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다시 일터로 돌아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몇 년 뒤 공장은 끝내 문을 닫긴 했지만...

이런 일은 노동조합 하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일터에서 쫓겨나는 일은 아주 흔치 않았지만 특별하지 않다. 노조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온갖 야비하고 악랄한 회사의 압박에 맞서는 싸움은 일상이다. 그 과정은 수많은 평범한 노동자들(월급쟁이들)의 생활이고 삶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낯설다. TV에 나오는 재벌들의 삶보다 더 거리감 있고, 생경하다.

우리 곁에서 벌어지는 이웃의 일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다른 별의 이야기처럼 낯선 이 이상한 사회를 뚫고 나온 송곳이 바로 최규석의 만화 <송곳>이다. <송곳>은 노동자들의 투쟁 - 노동운동을 다루었다는 의미를 넘어서 노동운동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면들을 풍부하게 다루었고, 드러나는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내면 깊이까지 들어가 사람들과 그들이 맺은 관계의 본 모습들을 드러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드라마로도 제작되었을 만큼.

나는 <송곳>이 마치 나의 일기장 같았다. 투쟁을 할 때 밖으로는 큰 목소리로 회사와의 대립을 강조하고, 단결과 투쟁만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크고 작은 수 십, 수 백 가지의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회사와의 대립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싸움의 시작은 한 가지 문제였지만, 그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처한 상황은 다르고, 그만큼 돌보고,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다. 회사와의 대립만큼이나 우리들 사이의 대립이 격할 때도 있었고, 나와 또 다른 나의 대립이 심각할 때도 있었다.

   
▲ 『송곳』(최규석 글.그림 | 창비 펴냄 | 2015,2017)

어려움을 견디며 싸움을 하다가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이렇게 싸우는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사람들을 책임질 수 있을까? 두려워지기도 한다. 저들은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괴롭힐까? 풀 수 없는 질문을 하게도 된다. 싸움에서 빠져나가 회사편이 되어버린 한 때 우리 편이었던 사람이 회사보다 더 미워 괴로울 때가 많다. 함께 싸우면서도 자기 것만 챙기는 사람 때문에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할 때도 있다. 우리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상대방을 정당하지 못하게 비인간적으로 대하고 나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회의하게도 된다.

"이봐요, 이수인씨. 기억하세요. 당신이 지키는 건 황준철이 아니라 인간이오. 착하고 순수한 인간 말고 비겁하고 구질구질하고 시시한 그냥 인간.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

"- 뭐가 불안한데요?
 - 그게...내가 끌어들였는데...내가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는 거 같아서...
 - 끌어들이긴 누가 끌어들여요? 그 친구들이 뭐 목줄 잡혀서 끌려왔어요? 제 발로 오더만. 좋은 대학 나오고 넥타이 안 매도 지 인생 귀한 줄은 알아요. 믿으세요. 닥치면 다 하니까. 깨지면 또 붙으면 되고. 지는 건 안 무서워요. 졌을 때 혼자 있는게 무섭지. 그냥 옆에 있어요. 그거면 돼요."

"나가실 분들은 나가셔도 됩니다. 탈퇴한 분들은 배신자가 아닙니다. 모두가 같은 무게를 견딜 수 없습니다. 그분들은 우리와 함께 싸우다 오리보다 먼저 쓰러진 것 뿐 입니다. 저는 부상당한 동료를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노조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저보다는 여러분들께, 여러분들보다는 반달치 월급 때문에 탈퇴한 사람들에게, 탈퇴자보다는 가입할 용기조차 내지못한 사람들에게, 가입 자격도 불확실한 계약직들에게...노조는 더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더 절실한 사람들에게 열려있지 않은 노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남으시면 더 고생할 겁니다. 고생한 사람에 대한 보상은 없습니다. 우리가 성공하면 모두가 성공할 것이고 우리가 실패하면 아마도 우리만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니까...견딜 수 있는 만큼의 짐만 지세요."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송곳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이야기 한다. <송곳>을 통해서 같은 문제를 안고 부대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위로를 받았다. 정답을 얻지 못했지만, 더듬더듬 찾아가는 길에서 작은 빛을 보았다. 그래서 <송곳>을 읽는 일이 옛일기장을 읽는 것처럼 낯 뜨겁고, 설렌다.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두고 두고 들쳐볼 것 같다.

   






[책 속의 길] 126
정은정 / 노동조합 활동가. 대구일반노조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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