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를 진압하라"
1948년 10월 19일 이승만 정권은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14연대에게 '제주4.3항쟁 진압'을 명령했다.
하지만 14연대 군인들은 "우리의 동포를 학살할 수 없다"며 명령을 거부하고 부대를 점거한 뒤 봉기했다.
명령이 내려진 지 하루 뒤인 20일 새벽 경찰서 등 여수 시내 중요 기관을 모두 장악하고 순천 장대다리에서 첫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군인들 봉기는 도화선이 되어 여수 시민들에게까지 번졌다. 미(美)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미곡 수집령으로 쌀을 착취당했고, 정부 관리들은 쌀을 비싸질 때까지 팔지 않아 시민들은 굶주렸다.
결국 여수 시민들은 20일 오후 3시 진남관 앞 거리에서 '여수군 인민대회'를 열고 "친일파 척결", "쌀 배급"을 외쳤다.
이승만 정권은 사건 발생 이틀 뒤인 21일 '반란군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진압에 나섰다. 진압군 병력과 무기는 봉기군보다 훨씬 뛰어났다. 광주로 가려던 봉기군은 이날 벌어진 '학구 전투'에서 후퇴했다.
이어 '종포 전투'(10월 23일), '잉구부 전투'(10월 24일) 등 시민들과 봉기군, 군경 간의 전투를 거듭한 끝에, 사건 발생 8일 만인 10월 27일 진압군이 여수를 점령하며 진압 작전은 마무리됐다.
여순항쟁 과정을 묘사한 기록화들과 함께, 진압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황폐화된 도시 등 시대의 아픔을 그린 작품도 전시됐다.
진압군에 의해 총살된 뒤 불에 태워진 동생 시신을 찾으러 간 형의 모습을 그린 '막내 태식이', 좌익 여부를 가려냈던 곳인 '종산국민학교', 항쟁에서 좌익 또는 협력자로 지목된 시민들이 총살된 뒤 구덩이에 버려지는 모습을 담은 '꺼지지 않은 불꽃' 등이 걸렸다.
전시회에는 대구 '10월항쟁'을 그린 그림도 있었다. 작가는 이에 대해 "대구시민들이 '쌀을 달라', '친일 경찰 물러나라'고 외친 10월항쟁이 영남 일대로 번지고, 불꽃은 제주4.3항쟁, 여순항쟁까지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여수·순천 10.19사건(여순항쟁)'의 과정과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아픔을 다룬 전시회가 대구에서 열린다.
'여순항쟁교육문화사업단'은 12일부터 오는 17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 6, 7, 8 전시실에서 '박금만 여순사건 기록화전-여순의 삶'을 연다. 10월항쟁유족회,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등 대구지역 21개 시민사회단체가 전시회 개최를 추진했다. 그림은 45점이 전시됐으며, 오픈식은 오는 16일 오후 2시로 예정됐다.
박금만(54) 작가는 전시 서문에서 "대구 10월항쟁의 불꽃은 제주 4.3항쟁과 10.19 여순항쟁으로 이어졌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여순항쟁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조망할 수 있고, 당시 사건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또 "대구와 여순은 미군정 시기 똑같은 아픔을 갖고 있다"며 "전시를 통해 앞으로 대구와 제주, 여수가 연대해 함께 항쟁을 노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박 작가는 여순항쟁으로 할아버지를 잃은 유족이다. 1970년 여수에서 태어나 세종대학교 미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지난해 여수 '여순의 삶-순이, 영수 그리고 불가살이', 고흥 '여순항쟁역사화전', 올해 부산 '여순의 삶' 등 여순항쟁과 관련한 개인전과 초대전에 참여했다.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 따르면, 여순사건은 정부 수립 초기 단계에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일부 군인들이 제주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한 사건으로, 전남, 전북, 경남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다수 민간인이 희생당했다. 올해 8월 말 기준 위원회에 희생자 신고 접수된 건은 모두 7,465건에 이른다.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