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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발전소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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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홍철 칼럼] 원전 교육, 세뇌 아닌 과학-기술-사회 이해하는 민주적 학습 되어야


원자력 공모전

지난 4월 27일 아침, 보궐선거 투표를 하러 투표장이 설치된 동네의 한 고등학교에 갔다가, 교내 게시판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보고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제20회 원자력 공모전”이라는 제목의 커다란 포스터의 내용은 “(1) 원전 수출에 대한 나의 생각, (2)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원자력에너지, (3) 녹색에너지 원자력으로 만드는 행복한 세상” 중 하나의 주제를 골라, 글짓기와 미술 부문의 작품을 공모한다는 내용이었다. 혹시나 오래된(3월 11일 훨씬 전에 붙여 놓은) 포스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어리석게도 제발 그러하기를 바라면서) 접수기간을 살펴보니, 웬걸, 2011년 5월 1일부터 31일까지다!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지식경제부가 주최하며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주관하는 공모전이라는 글씨 역시 선명하다.


벌써 20회를 맞이하는 행사라고 하는 것도 놀랍지만, 지난 3월 일본의 대지진과 체르노빌에 버금가는 핵참사 이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는 이 와중에, 그동안 해오던 공모전을 꿋꿋이, 올해에도 어김없이 이어가는 이들 핵마피아 집단의 ‘뚝심’ 앞에 섬뜩함마저 느끼게 된다. (이들 국가-기업-전문가 독재체제의 ‘뚝심’은 바로 현실을 외면하는 구조적 무책임성과 오만, 일말의 의심도 없는 맹목(盲目) 등의 다른 표현이다. 이러한 속성이야말로 핵발전 체제의 가장 위험한 본질이자, 바로 이번 일본 후쿠시마 원전 대참사와 같은 핵재앙의 제1 원인인 것이다.)    

이들에게는 행여 우리 아이들이 방사능에 오염된 비를 맞을까, 지난 며칠 동안 아침마다 우산을 챙겨주며 주의를 당부하는 부모들의 근심도, 우유부터 각종 야채와 해산물에 이르기까지 먹을거리의 안전성을 염려하며 노심초사하는 주부들의 염려도, 한반도가 결코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며 따라서 후쿠시마의 대참사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제기도, 모두 근거 없는 유언비어에 현혹된 어리석은 백성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비과학적인’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세력들은, 체제불안을 조장하려는 ‘좌파세력’들이며, 이들 불순세력의 ‘선동’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더한층 우리 아이들의 정신을 순결하게 세척[洗腦]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맞서 싸워야 할 문제는 ‘녹색성장’의 이념과 국가시책을 회의하게 만드는 불순세력의 선동이지, ‘사소한’ 방사능 위험 따위가 아닌 것이다.  

과거, 해마다 지겹도록 열리던 반공 웅변대회, 백일장, 포스터 그리기 대회에 어린 영혼들을 강제로 동원하던 전체주의적 광기가, 지금 인류 최악의 재난 앞에서 참담함과 두려움을 겪고 있는 이 사회의 연약한 미래 세대들을 또다시 동원하고 세뇌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을 가리고 거짓으로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려는 이러한 기도가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그것이 우리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편향적인 정치관과 왜곡된 역사관을 퍼뜨리는 반동세력의 역사교과서 ‘공작’만이 문제가 아니라, 핵마피아 집단의 끈질긴 이데올로기 공세에 대해서도 풀뿌리 시민들, 특히 양심적인 교사와 학부모들이 각별한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인 것 같다.

교육현장에 드리워진 핵마피아의 그림자

마침 4월 30일자로 발행된 주간지 <시사IN>의 사회면은 “교과서 원전 내용, 일방적으로 바뀌다”라는 특집기사를 싣고 있다. 교학사가 펴낸 고등학교 <경제지리> 교과서 71쪽을 펼치면, 이런 내용의 만화가 실려 있다. 원전을 반대하던 ‘어리석은’ 농민이 지진이 발생하자 핵발전소로 대피한다. 웬만한 강진에도 끄떡없도록 설계된 핵발전소는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대피시설인 것이다. 그 농민은 이렇게 말한다. “휴! 겨우 살았네!” 함께 대피한 사람들의 말, “진짜 튼튼한 걸?”, “원자력발전소 만세다! 만세!”

“원자력발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화를 통해 나타내보자”는 탐구활동의 예시로 제시해 놓은 만화이다. 이처럼 핵발전에 대해 ‘우호적’인 교과서 내용의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핵발전 홍보를 맡은 지식경제부 산하단체인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1996년부터 ‘각급 학교 원자력 관련 수정 반영을 위한 교과과정 개편 추진 기본계획’을 마련하고, 교과서에 표현된 핵발전 관련 내용의 수정을 교육과학기술부에 꾸준히 요청해온 결과다. 이를 위해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은 국민의 세금으로 연구용역까지 주어, 집요한 작업을 해왔다. 그것은 단순히 교과서상의 ‘오류 정정’을 요구하는 차원을 넘어, 관련 자료사진의 크기와 배치까지도 핵발전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수정하도록 요구하는 등, “대안적 에너지원으로서의 원자력발전에 대한 학생들의 ‘막연한’ 부정적 태도를 변화시킨다”는 목표에 따라 치밀하게 추진해온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1996년 11월 교과서 저술․편찬을 담당하는 교육부 편수관들을 울진 핵발전소로 초대해 시찰(견학)하도록 한 이후,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은 교육 관련 인사와 단체 및 교과서 발행사(출판사) 편집 직원 등을 대상으로 핵발전소 현장 연수를 꾸준히 진행해왔다고 한다. 심지어 이 재단이 2009년 2월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직무연수기관으로 공식 지정된 이후, 각급 학교 교사들을 핵발전소로 초대하여 식사까지 제공하는 무료견학을 진행해왔을 뿐만 아니라, 재단 및 지정 기관에서 일정 시간 이상 직무연수과정을 이수한 교원들에게는 성과 상여금, 승진 등에서 이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특혜까지 주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마피아 집단다운 ‘세 불리기(자기 편 만들기) 수법’이라고 할 만하다.          

아이들에게 비판적 상상력을

핵마피아 집단과 성장 이데올로기에 눈이 먼 국가권력 및 지배 엘리트들은 어쨌든 시간이 흘러가고, 또다른 이슈들에 묻혀 저 일본사회의 지옥도(地獄圖)가 시민들의 뇌리에서 조금씩 희미해져 가기를 바랄 것이다. 아니, 단순히 그러한 망각을 기다리고 있기보다, 시민들의 뇌리에서 핵발전에 대한 공포를 씻어내기 위해 가일층 치밀하고 집요한 세뇌(洗腦)를 기도하려고 할 것이 뻔하다. (그리고 그 일차적인 대상이 우리 아이들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저들로서는 자신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이상 학교가 그러한 일방적인 세뇌의 공간이 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우리 아이들이, 이 땅의 미래를 이어갈 세대가, 자신들의 생존과 관련된 핵발전의 문제에 대해 균형 잡힌 정보를 충분히 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전체주의적 광기가 아닌 민주적인 학습과 토론을 통해 비판적 상상력과 판단력을 가진 시민, 정치와 삶의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이 참담한 재난 속에서도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방사능 비와 오염된 먹을거리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것 못지않은 우리 어른들의 정치적 의무이다. 현실을 이토록 끔찍한 화탕지옥(火湯地獄)으로 만드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 기성세대의 마지막 의무 말이다.

대구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5개 단체로 구성된 '핵 없는 세상을 위한 대구시민행동' 회원 10여명이 대구백화점 앞 광장과 동성로 일대에서 '반핵'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2011.4.22) / 사진. 평화뉴스 박광일 기자
대구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5개 단체로 구성된 '핵 없는 세상을 위한 대구시민행동' 회원 10여명이 대구백화점 앞 광장과 동성로 일대에서 '반핵'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2011.4.22) / 사진. 평화뉴스 박광일 기자

이것은 물론 학교현장에만 맡겨놓을 문제가 아니다. 최근 대구환경운동연합과 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시민.전문직 단체들이 힘을 모아 활동을 시작한 ‘핵 없는 세상을 위한 대구시민행동’ 같은 시민사회 영역의 그룹들도 앞으로 어린이와 청소년, 뜻있는 교사와 학부모들과 함께 핵발전의 문제, 과학-기술-사회의 관계, 재생가능 에너지와 대안사회의 비전, 민주주의와 풀뿌리의 역할 등에 관해 공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할 것이다. 이미 방사능으로 오염된 땅과 하늘, 바다를 이어받아 여기에 생명과 평화의 공동체를 일구어 나가야 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게도, 우리 아이들의 몫이다. 우리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오염과 파국의 정도를 더 늦기 전에 최대한 낮춤으로써 미래 세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일과(이것만 하더라도 지난한 투쟁이 되겠지만, 여기에 덧붙여), 우리 아이들이 새로운 역사를 위한 쟁기질을 의연하게 시작할 수 있도록 지혜와 비판적 상상력을 아낌없이 불어넣어 주는 일일 것이다.                  

마침 오는 5월 11일(수) 오후 7시, 대구교대 1강의동 107호에서는 에너지정의행동이 주최하고 ‘핵 없는 세상을 위한 대구시민행동’이 주관하는 뜻깊은 강연회가 열린다고 한다. 이날 강연회에서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격납용기 설계자인 고토 마사시 씨가 “핵발전소 설계자가 본 후쿠시마 사고의 문제점과 향후 전망”을 주제로, 그리고 일본 원자력자료정보실의 사와이 마사코 씨가 “후쿠시마 핵사고로 인한 피해 정도와 시민사회의 대응”을 주제로 강연할 계획이다. (문의 053-426-3557) 시민단체 활동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과 교사들, 특히 학부모들이 어린이․청소년들과 함께 많이 참석했으면 좋겠다. 이러한 강연회는 우리 학교를 장악하고 있는 핵마피아 집단의 세뇌공작에 맞서, 우리가 아이들과 함께 진실과 민주주의, 우리의 생존과 미래를 방어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변홍철 칼럼 4]
변홍철 / <물레책방> 인문학연구실장. 전 <녹색평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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