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서점가에서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한 『화폐전쟁』(쑹홍빙 지음)은 세계금융을 둘러싼 금융재벌들의 음모를 그린 흥미진진한 책이다. 미국과 유럽의 금융을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 금융재벌들이 통화팽창을 일으켰다가, 이어서 통화긴축 상황을 만들어 사람들의 재산을 뺏어가는 이른바 ‘양털 깎기’의 실상을 고발한다. FRB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미국유대인들의 행태가 리얼하게 그려진다. 링컨과 레이건, 케네디 대통령의 피격사건도 화폐의 지배권을 둘러싼 금융재벌들의 음모(陰謀)였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악마의 음모에 놀아난 탓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인간사회의 역사는 온통 음모로 점철돼 왔다.『삼국지연의』같은 탁월하게 재미있는 작품에서도 음모와 술수를 빼어버린다면 독자들의 흥미는 반감되고 말 것이다. 오늘도 우리사회에서 다반사로 펼쳐지는 음모는 특히 권력이나 돈, 이념을 둘러싼 싸움에서 두드러지는 일상사다. 그렇다보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음모인지를 식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가령 요즘 정치권의 화두로 등장한 복지논쟁의 경우, 어디까지가 표를 얻기 위한 정치인들의 꼼수이고, 어디부터가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자비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구별하기 어렵다. 서양에서는 복지논쟁의 초창기에 어려운 이웃을 국가가 나서서 도와야 한다는 논리를 두고, 그들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기득권자들의 음모라고 주장하는 논리가 득세한 적도 있다.
정치에 필수항목처럼 여겨지는 음모는 그 냄새가 지도자들의 도덕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떤 정권에서는 음모의 악취가 상대적으로 훨씬 더 강하게 풍긴다.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사건의 경우, 진보성향의 언론에서 음모론을 제기하는 논조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논조들은 법원에서 시시비비가 가려질 때까지 곽 교육감이 절대로 사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정연주 ․ 노무현 ‧ 한명숙에게 했던 만행이라고 검찰수사를 성토하는 이들도 있다.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도 “아무리 피의자라 하더라도 무죄추정 원칙과 피의사실 공표금지원칙은 지켜져야 하고 인권은 보호되어야 한다." 는 말로 곽 교육감이 처한 어려운 처지를 동정했다. 참여연대를 포함한 43개 시민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곽 교육감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음모가 담긴 기획수사라고 주장했다. 야권의 일부 유력 인사들이 ‘즉각사퇴’라는 보수진영의 주장에 동참한 것에 대한 비판도 드세다. 사자의 무리에게 붙잡혀 죽어가는 동료를 두고, 자기만의 보신을 위해 달아나기에 급급한 들소무리들과 뭐가 다른가 하고 야권인사들의 조기사퇴 주장을 질책한다.
이에 반해 보수신문들은 곽 교육감 구하기에 나선 진보 ․ 좌파 단체들이 비리사건을 좌우갈등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난의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런 논쟁을 지켜보는 우리는 차제에 해묵은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날이 갈수록 그 열기를 더해가는 원인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지도층 가운데는 정의를 가장 가치 있는 덕목으로 내세우고, 신의 섭리를 믿는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도 그들이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갈등의 골이 자꾸 깊어지는 것이 아닐까. 얼마 전 어느 큰 스님은 종교가 세상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걱정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시점에서 스님의 말씀이 상기되는 이유는 곽노현 사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경말씀 같은 종교적 경구들이 많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는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려 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이 있다. “죄 없는 자 이 여인을 돌로 쳐라”고 한 예수의 말씀도 있다. 그런 가르침을 잊어버린 채, 아전인수 식의 기도를 일삼는 종교인들은 말세에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는 늑대의 아바타들인가.
우리의 시민의식과 민주역량도 문제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는 그 나라 국민들의 의식수준과 비례한다고 했다. 많은 사회지도층이 저지른 편법상속이나 주민등록법 위반, 부동산투기 같은 위법행위가 드러날 때마다, “그 정도 안한 사람 어디 있나”하고 아량 넘치는 말을 예사로 하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이다. 그러면서도 반대쪽의 과오에 대해 가해지는 공권력의 철저함에 열렬히 박수를 보내는 그들의 심보는 놀부의 가당찮은 그 심술에 비견할 만하다.
우리는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법정을 만들었고, 그것도 3심까지 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운영한다. 곽 교육감이 선거 후 수개월이나 지나, 후보 중도사퇴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돈을 건넨 사실이 최종판결에서 유죄라면 그 때는 마땅히 사퇴하고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본인이 혐의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그런데다 아직 재판도 시작되지 않은 상황인데도 조기사퇴를 기정사실화하는 일각의 주장은 상식에 어긋난다. 한국인이란 사실이 자랑스러운 나라, 상식이 통하는 나라에 살고 싶다는 것이 민초들의 간절한 소망이다.
[김상태 칼럼 16]
김상태 / 언론인. 전 영남일보 사장.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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