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에게 헌법은 무슨 의미인가
지금 이 나라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에게 ‘헌법’은 어떤 의미가 있나? 오직 자본, 특히 재벌기업들의 이익만을 위해 법과 제도, 공권력이 철저히 봉사하는 현실 앞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비용은 ‘사회화’하면서 그 이익은 철저히 ‘사유화’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는 이 나라의 경제질서 속에서, 노동자와 농민,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스스로를 ‘국민’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더 이상 달력에 ‘빨간 날’로 대접받지도 못하는 ‘제헌절’을 며칠 앞두고, 이 나라 대한민국 건국의 바탕이 되었던 ‘제헌헌법’을 돌아보는 것은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는 일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제헌헌법에 보장되었다가 이른바 제3공화국 헌법에서 삭제된 ‘근로자 이익균점권’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경제와 노동 현실을 생각할 때,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일 것 같다. 이흥재 교수(서울대 법학과)는 “이익균점권은 세계 어느 헌법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우리의 독창적인 근로자 기본권”이라고 평가한다. 이하의 내용은 이흥재 교수의 논문 〈전진한과 자유협동주의〉(《녹색평론》제118호, 2011년 5-6월호 수록)에서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임을 밝혀 둔다.
농민에게 토지를, 노동자에게 완전한 인격 보장을
제헌 당시의 피폐한 경제상황과 정치적 분열 및 사회적 혼란 속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최대의 국민적 과제는 토지개혁과 적산(敵産) 처리 문제였다. 특히 당시 산업상황에서 적산의 규모가 남한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이의 처리방식과 향후 관리에 참여하고자 하는 일반 근로대중의 욕구와 기대는 생존의 차원에서 들끓고 있었다.
그러나 지주와 자본가 세력을 대변하는 한민당계가 중심이 된 헌법기초위원회는 그 속성상 이러한 일반 대중의 여론을 외면하고 헌법 초안에 반영하지 않았다. 국민의 8할인 농민과 일반 근로대중의 절실한 기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대변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통감한 전진한 의원(상주 을, 대한독립노동총연맹)과 문시환 의원(부산 갑, 조선민족청년당), 조병한 의원(문경, 무소속) 등을 중심으로 한 비(非)한민당계 의원들은 적산기업에 대한 참여권과 이익균점권의 보장을 통해 남한의 사회적 통합은 물론 민족통일의 초석으로 삼고자 본회의에서 수정안 제출에 동의하였다.(재적 의원 180명 중 80명 동의)
이때 우촌 전진한 의원은 한민당계가 제출한 헌법 초안이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해서 자세한 규정을 할 뿐이고 실질적인 경제적 민주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추상적이고 그 규정성에 있어서 매우 결함된 점이 많아, 종합해서 보면 너무나 형식적”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그는 민족통일의 사상적 토대로서 농민과 근로대중의 창의와 자유를 실질적으로 실현하지 않는다면 헌법 초안은 사문화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근로자의 완전한 인격을 보장하기 위하여 수정안을 제시할 뜻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제헌의회 ‘태풍의 눈’이 된 이익균점권
헌법안 제2독회(1948년 7월 3일 국회 제24차 회의)는 무려 10시간에 걸쳐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만큼 이익균점권 등의 보장 논의가 헌법 초안 심의에서 ‘태풍의 눈’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노총 관계 33단체로부터 전진한 의원 등이 낸 수정안을 지지하는 탄원서가 들어왔고, 대한농총 외 19단체에서 서류가 들어왔으며, 인천조선섬유회분회 외 32단체에서도 지지의 뜻을 담은 서신을 보내왔다. 한편 조선상공회의소는 수정안에 반대하는 의견을 보내왔다. 수정안에 대해서 한민당계 의원들은 반대했고, 주로 무소속 의원들이 찬성발언을 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수정안의 표결방식을 종전의 상례에 따른 거수로 하지 않고, 이례적으로 무기명 투표방식을 최초로 도입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첨예하고 민감한 사안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 과정을 우촌 전진한은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제헌국회에서 노동자 이익균점, 노동자 기업참여, 농민에의 토지 분배 등 ‘노농(勞農) 8개 조항’을 제출하였다. 내가 이 안을 제출하자 상공회의소 측에서 이것을 부결해 버리려는 운동이 맹렬히 일어났다. 회의에서 이 안들이 거의 다 통과될 기세가 보이자 이 박사가 의장을 보다가 신익희 부의장에게 맡기고 나갔고, 신 부의장도 어물어물하다가 산회를 선포하고 퇴장하고 말았다. 다수 의원들은 퇴장하지 않고 나를 임시의장으로 추천하여 이 안들을 직석에서 통과시키려까지 했었는데, 2~3일 후 다시 회의가 열렸을 때에는 의원들 중에 상당한 수가 회유를 당해서 노동자 기업참여만은 부결되고, 노동자 이익균점을 위시한 다른 항목들은 대개 통과되었다.
우촌은 “종래 노자(勞資) 문제는 노동잉여가치 착취설에 의하여 심각한 대립을 보았을 뿐 아니라 항상 노동을 상품시하여 자본에 예속시켜 왔던 것이다”라고 전제하면서, 이익분배 균점권 정신은 “노동을 생산의 원동력으로서 자본과 동일시하여 노자 대등의 입장에서 기업에서 생기는 이윤을 노자 균점케 하여 종래의 임금노예제도를 완전히 분쇄하고 노동도 생산에 있어서 한 개 주체적 입장에 서게 된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전진한의 생애와 자유협동주의
우촌 전진한(錢鎭漢, 1901-1972)은 경북 문경의 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상주의 외가에서 보내다가, 17세에 서울로 고학의 길을 떠나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등이 하숙하던 하숙집에서 “밥 짓고 물 긷고 밥상을 나르고 각 방마다 불을 때고 청소와 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사환노릇을 하면서 독학을 하여, 기미육영회 동경유학생으로 선발되어(1920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1928년)
동경유학 시절 비밀결사체 ‘한빛’을 조직하여 이를 중심으로 10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제국주의 착취에 대항하기 위한 자주적 경제조직체의 건립이라는 취지로 ‘협동조합운동사’를 결성하였다.(1926년) 당시부터 노선대립을 하던 ML당과 신간회 일본지부 설치를 둘러싼 쟁탈전에서 우촌은 ML계 대표와의 격렬한 이론전 끝에 승리하여 본부의 결정으로 신간회 일본지회 창립대회(1927년)에서 간사로 추대되었다.
대학 졸업 후 우촌은 곧바로 귀국하여 협동조합운동사 본부를 서울로 옮겨 전국에 수백 개의 조합을 조직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중, 치안유지법 위반 죄목으로 체포되어(1928년) 신의주 감옥에 2년간 투옥된다. 출옥 후에도 빈번히 구금되다가 함남 갑산에서 사립학교 교원생활을 하던 중 다시 불온분자로 찍혀 추방되어, 1933년부터 해방되기까지 12년간 금강산 신계사의 효봉 스님,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 스님 밑에서 참선수행을 하며 “무인지경에서 생활하다가 해방된 것도 모르고 지냈을 정도”로 깊은 산 속 은둔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자유협동주의’ 입장에서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청년운동 및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대한독립촉성 전국청년총연맹위원장(1945년), 대한노동총연맹위원장(1946년)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제헌국회의원으로서 ‘노농(勞農) 8개 조항’을 국회에 제출하여 근로자의 이익균점권 등의 보장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정부 수립 후 초대 사회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우촌은 한편 국제노동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 창립 런던대회(1949년)에서 이사로 피선되었으며, 그 뒤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 아시아대회(1951년)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제2대 국회의원으로서 노동법 제정(1953년)에 앞장섰으며, 제3대 국회의원이 되어 이승만 정권의 탄압에 맞서 평생의 정치이념인 자유협동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농당(勞農黨)을 창립(1955년), 당의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4·19 이후 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1960년) 한국사회당을 조직하는 등 혁신세력을 규합하려고 노력했고,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민정당을 발기하여 최고위원에 취임함과 동시에 제6대 국회의원(1963년)과 민정당 부총재(1965년)에 당선되었다. 1965년 통합야당인 민중당 지도위원으로서 정당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우촌은 정계 은퇴 후, 그 전에도 틈이 있을 때마다 간간이 해오던 금강경 강의를 동국대 선학원, 대각사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펼치다가 후두암으로 입원하였다 자진 퇴원하여 단식을 하며 참선으로 마지막 운명을 맞이하면서, “노동자로 이 세상에 왔다가 노동자로 돌아간다”는 말과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활활투탈(闊闊透脫)”이라는 임종 게송을 남기고 만세를 외치며 대자유인의 경지로 돌아갔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협동조합운동의 실제》(동경; 1927),《건국이념》(1948),《협동조합의 신구상》(1952),《민족위기와 혁신세력》(1955),《자유협동주의》(1957),《이렇게 싸웠다》(1967년 매일신문에 연재한 것을 자비 출판한 것) 등이 있는데, 우촌의 장남 전창원 씨가 이러한 저술들을 한데 모아 한 권의 책으로《이렇게 싸웠다》(1996)를 펴냈다.
우촌의 일관된 정치이념은 자유협동주의를 기초로 한 민족통일의 지향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협동주의는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모순을 지양·통일하여,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전체의 협동이 유지되는 인간 본위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이념이다. 우촌은 정치적으로는 외국 간섭이 없는 독립정부를 수립하고 경제적으로는 착취와 대립이 없는 균등한 사회를 건설하며,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국하려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우촌은 자유협동주의의 입장에서 소련의 공산주의와 미국의 민주주의를 각각 ‘폭력주의’와 ‘금력주의’라며 모두 진정한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비판하였다. 또 우촌은 진정한 인민 본위의 명실상부한 민주주의적 정부는 인민을 지배 굴종시키는 권력기관이 아니라 ‘사무기관’으로 존재하여, 압박과 착취가 없는 최이상적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촌 자신의 목소리로 마무리한다.
협동에서 오지 않은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이러한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다. 각자의 자유는 상호 충돌되고 만다. 자유에서 오지 않은 협동은 진정한 협동이 아니다. 이러한 협동은 협동이 아니라 굴종이다. 자유와 협동은 대립의 통일이다. 자유는 협동에 의하여 성립하고, 협동은 자유에 의하여 성립한다. 자유는 협동을 포함하고, 협동은 자유를 포함한다.
[변홍철 칼럼 14]
변홍철 / <하이하버연구소> 소장, 전《녹색평론》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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