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을 사유하는 정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변홍철 칼럼] 총선과 대선 있는 2012년, 탈핵과 에너지 전환의 원년으로 만들어야


정치는 왜 파국을 사유하지 못하는가

이 넘쳐나는 종말에 대한 이미지들 속에서 우리는 현실의 파국에 대해서는 놀랄 정도로 무감각한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궁금함에 대한 한 가지 열쇠는 우리가 이미지와 현실이 전도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스펙터클이다. 쓰나미가 일본 해안을 덮치는 장면보다 영화 <투모로우>의 이미지가 훨씬 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각성을 촉구하는 듯하였다. 오히려 인간들에게는 재난 그 자체보다 재난에 대한 이미지가 훨씬 더 현실적이고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였다.

작년 3월 일어난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교육잡지《오늘의 교육》의 편집위원인 인문학자 엄기호 씨가 쓴 글의 한 대목이다. 그러면서 그는 “교육은 왜 파국을 사유하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

후쿠시마 사고는 분명 우리에게,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현대문명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하며 또한 비윤리적인 것인가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사고는 우리의 현실이 언제라도 ‘파국’을 맞을 수 있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위험천만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임을 너무도 뚜렷이 증명했다. 그런데도 엄기호 씨가 보기에 우리의 ‘교육’은 그러한 위험, 즉 언제라도 ‘파국’을 맞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철저하게 외면한 채 존속하고 있다. 아니, 지금 우리가 날이면 날마다 입에 달고 사는 ‘교육(문제)’ 속에는 ‘파국’에 대한 상상력과 사유 자체가 완벽하게 배제되어 있다. 이것은 완전한 허깨비가 아닌가! “근대 교육은 파국에 대한 철저한 외면 위에 기초해 있었다. 당연히 예기치 못한 위기가 발생했을 때 교육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엄기호 씨의 글에서 ‘교육’이라는 단어를 ‘정치’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해 보자. “정치는 왜 파국을 사유하지 못하는가?” 조금의 오차도 없이 우리의 정치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다고 나는 단언한다.

삶의 근원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우리가 그 사건을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 삶의 의미와 정당성이 총체적으로 부정되는 순간, 그것을 삶의 위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삶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뒤흔드는 질문을 우리 교육(정치)이 수용하고 감당할 수 있는가?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삶의 정당성이 무너지는 파국에 대해 우리 교육(정치)이 열려 있는가의 문제이다.

후쿠시마 이후, 한국의 정치

후쿠시마 사고를 목도하고도 ‘원전 르네상스’를 외치며 “후쿠시마를 한국 핵산업 도약의 기회로 삼자”는 이명박 정부의 무지와 맹목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핵발전소와 방사능에 대한 불안감에 빠져 있는 대다수 국민들의 의견을 외면하고 있는 제1야당의 행태는 “정치는 과연 파국에 대해 사유할 능력이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금 우리의 현실정치는 ‘삶의 근원을 뒤흔드는 사건’을 직시할 능력도, 그것에 대처할 의지도 없는 것 같다. 제1야당인 민주통합당은 “원전(핵발전소)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진보신당과 녹색당(준) 같은 소수정당만이 지금 이러한 ‘파국의 사유’를 현실정치 속에 불어넣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스위스 같은 세계 여러 나라들은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정치권과 국가가 나서서 ‘탈핵’을 선언하고, 그것을 위한 정치적 일정을 서두르고 있다. 핵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기하고, 대신 태양과 바람 에너지 같은 자연에너지로 전력의 상당 비율을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수요관리를 통한 에너지 절약 정책이 뒷받침된다면 얼마든지 ‘탈핵’이 가능하다고 이 나라들은 판단했다. 이들 나라의 전력 생산에서 그동안 핵발전이 차지한 비율을 고려해 보면, 이것은 결코 간단한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국을 사유할 능력만 있다면, 파국과 단절할 정치적 의지만 있다면, 탈핵과 에너지 전환이 결코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님을 이 나라들은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핵 없는 세상을 위한 대구시민 공동행동 선포 기자회견(2012.2.7 대구시민센터)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수습기자
핵 없는 세상을 위한 대구시민 공동행동 선포 기자회견(2012.2.7 대구시민센터)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수습기자

정치란 무엇인가? 그리고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고전적인 물음에 답하기 전에, 국민 대다수의 삶과 국토의 안전, 일상의 평화가 단 한 번의 사고로도 끝장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요인’을 정치가 합리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면, 우리가 도대체 정치에 기대할 것이 무엇인가 하고 먼저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

전국의 시민들이 후쿠시마 사고 1주년 무렵인 3월 10일, 서울과 부산에 모여 정부의 핵발전소 확대정책을 규탄하고 ‘탈핵 및 에너지 전환’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의료계, 법조계, 종교계, 학계 등 각 분야에서 ‘탈핵’을 위한 기구를 조직하고 공론의 장을 열면서 행동을 조직하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에서 에너지를 절약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해 핵발전소 1기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하였고,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전국 45곳의 지자체장들이 모여 ‘탈핵 에너지 전환을 위한 도시선언’을 발표하였다. ‘탈핵’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삼는 풀뿌리의 정당 ‘녹색당’이 3월 초 창당을 앞두고 있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통해 2012년을 반드시 ‘탈핵’의 원년으로 만들자는 결의가 풀뿌리 차원에서 전국으로 번져가고 있다. 그뿐 아니라 ‘반핵아시아포럼’ 같은 국제연대의 움직임이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거대정당과 국가권력이 이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동안, 풀뿌리 스스로 ‘파국을 사유하는 정치’, ‘파국과 단절하기 위한 정치’를 아래에서부터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을 제2의 후쿠시마로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박혜령
박혜령
이러한 때에 얼마 전 경북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선거구에 ‘탈핵.농민후보’ 박혜령 씨가 19대 총선 예비후보로 등록하였다. 출마 기자회견에서 그는 “이 땅을 제2의 후쿠시마로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고 자신의 출마 이유를 밝혔다. 서울의 모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17년 전 남편과 함께 경북으로 귀농한 그는, 영덕에서만 10년째 농사를 지어 온 여성농민이다. 산골에서 담배, 고추, 배추 등 7천여 평의 농사를 지었고, 농약을 덜 치는 방식을 고집하다 담배와 고추 등은 다른 농가에 견주어 소출이 반도 안 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굴하지 않고 어렵사리 논밭을 일구어왔다. 그렇게 땅에 엎드려 조용히 살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자신과 가족들이 힘겹게 뿌리를 내린 영덕에 핵발전소가 들어설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지역의 농민들과 함께 ‘핵발전소 유치백지화 투쟁위원회’를 조직, 공동대표로서 풀뿌리 운동을 이끌어왔다.

그러나 결국 작년 연말, 삼척과 함께 영덕이 신규 핵발전소 부지로 선정되자 그는 오랜 고민 끝에 총선 출마를 결심했다. 돈도, 힘 있는 조직도 물론 그에게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열두 살 딸에게 핵발전소와 방사능의 땅을 물려줄 수는 없다는 어머니의 마음, 땀흘려 일구어온 논밭을 후쿠시마와 같은 죽음의 땅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농민의 마음, 자신을 친딸처럼 다독이고 받아들여준 너그러운 이웃과 마을들이 핵발전소로 인해 각박해지고 황폐해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딸의 마음, 야무진 며느리의 마음으로 그는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이 땅을 제2의 후쿠시마로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는 이 작은 여성농민의 외침에는 우리가 그 어떤 거대정당, 힘 있는 정치인들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절박함이 배어 있다. 그것은 바로 ‘파국을 사유하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박혜령 후보에게 이번 선거는 결코 만만치 않은 ‘전투’가 될 것이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수많은 난관이 그에게 닥칠 것이고, 시시각각 그를 무너뜨리고 무릎 꿇게 하려는 유혹과 압력이 마지막까지도 주변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핵발전소로 인해 활기를 잃고 지역의 자존감마저 꺾여버린 울진의 주민들, 신규 핵발전소 유치 과정에서 토호들과 공무원들의 오만한 기세 앞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영덕의 어민과 농민들, 그리고 대형댐과 대규모 풍력발전소 건설 때문에 고통받아온 영양의 주민들, 참담한 농촌현실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봉화의 주민들에게 탈핵.농민후보 박혜령의 출마 소식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희망의 신호’가 되고 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고 있다. 그것은 이미 후보 개인의 싸움이 아닌 것이다. 토건세력과 핵마피아들, 대대로 지역을 자신들의 안마당처럼 여기며 거드름을 피웠던 토호들과 비리공무원들로 인해 주눅들고 고통받아왔던 땅의 사람들, 바닷가 사람들에게 박혜령 후보의 출마 선언은 풀뿌리의 당당한 ‘자기선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는 파국을 사유할 수 있는가? 아니 정치는 파국과 단절하고 희망을 선언할 수 있는가? ‘세상 가장 먼 곳’, 그동안 철저하게 소외되고 무시당해 왔던 이 땅 한 귀퉁이인 영양.영덕.봉화.울진 땅에서 시작된 풀뿌리의 정치적 도전에 주목하면서, 이제 우리는 이 질문에 새로운 답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했던가. 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러나 모든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다가오는 선거를 통해 어떤 결실을 맺기를 원하는가. 지금부터라도 ‘파국과의 단절’을 깊이 사유하지 않는 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각성이 동반되지 않는 한, 그 꽃은 아름답고 실한 열매가 아닌, 또 다른 쭉정이만을 낳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변홍철 칼럼 11]
변홍철 / <하이하버연구소> 소장, 전《녹색평론》주간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