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공부해서 뭐할 건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변홍철 칼럼] 무책임하고 야만적인 ‘전문가’들에 맞서 ‘고향’을 지키는 교육을


'시험'이라는 터널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최근 며칠 사이 2학기 중간고사를 치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이지만, ‘내신’과 직결된 중간고사를 치르는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시험에 대한 부담 때문에 아이들의 ‘생기(生氣)’는 벌써 보름(길게는 한 달) 전부터 시들고, 시험이 끝나는 날까지 아이들의 낯빛과 목소리에는 긴장과 불안의 그림자가 잔뜩 깃들어 있다. 평소 성적이 좋든 그렇지 못하든, 스스로 원하지 않는 ‘평가’를 받고 ‘서열화’되어야만 하는 아이들은 이 고통스런 통과의례 앞에서 누구 하나 예외없이 잔뜩 ‘쫄아’ 있다.

‘물레책방 청소년 인문학 교실’이라는, 시험점수에 그다지 직접 도움이 될 것이 없는 공부모임을 중․고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꾸려가고 있는 나로서는 시험을 전후한 2~3주 가량은 제대로 된 인문학 수업은커녕, 아이들과 살가운 대화마저 나누기가 어렵다. 모든 아이들은 ‘시험’ 앞에서 일시적 ‘사고정지’ 수준의 경직에 짓눌린다. 이런 아이들에게 인문학적 질문과 토론은 어쩌면 한가하고 무력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여름방학, 경북 영양의 산골로 ‘캠프’를 갔을 때 펄펄 살아 뛰놀던 그 아이들이 정말 맞나 싶을 정도로 안쓰럽기 짝이 없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가급적 ‘학습노동’에 대한 부담을 아이들에게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놈은 묻지도 않는데 그날그날의 시험결과를 미리 ‘자수’하면서 혹시라도 애비가 ‘실망’하지 않을까 지레 염려하는 기색이 뚜렷하다. 제발 그럴 것 없다고 타일러도, 애비의 말은 아이에게 그다지 ‘믿음’을 주지 않는 눈치다. 뭐라고 말하든, 결국 애비도 어른들 ‘체제’(시험을 통해 아이들을 평가하고 서열화하는 체제)의 일부에 불과한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지옥 같은 ‘경쟁’을 아이 스스로 이미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알아서 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중간고사의 터널을 허겁지겁 통과해서 겨우 한숨 돌리고 있는 내 아들놈과 또래 아이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그렇게 공부해서 도대체 뭐할 건데?”

그래도 원전이 답이다?

지난 9월 8일 대구경북연구원 18층 대회의실에서는 “일본 원전 사태 이후 경상북도 원자력 정책 추진 방향”이란 제목의 세미나(대경 콜로키움)가 열렸다. 경북도에서 추진하려고 하는 ‘원자력 클러스터’와 관련된 토론회라 꼭 가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나지 않아 직접 참석은 못하고, 다녀온 환경단체의 활동가로부터 대강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 자리에는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박군철 교수가 발표자로, 그리고 박종운 동국대 원자력및에너지공학부 교수와 성기용 경상북도 에너지정책과장이 토론자로 나왔다고 한다.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지인은 한 마디로 “욕지기가 치미는” 자리였다고 전했다. 이 날 발표를 맡은 박군철 교수의 A4 한 장짜리 발표문의 일부를 인용해 보면, 이 날 토론회의 취지와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월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은 2만명 이상의 사망, 실종자를 낸 전후 최악의 참사였다. 수많은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대형 원전사고를 초래하고 말았다. … 이러한 시점에서도 경북은 원자력 클러스터 조성으로 향후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성장동력인 원자력의 이용확대로 국가는 물론이고 경북지역의 삶의 질을 높이려고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 물론 경북지역에는 울진원전을 포함 충분한 원자력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고 우수인력 조달에 필요한 우수한 교육시설, 좋은 조건의 접근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민들의 원자력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부가적인 요인들도 같이 짚어 보아 주민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사회적, 기술적 정보가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류는 항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발전하여 왔다. 이번의 대참사를 교훈으로 더 깊은 안심을 주도록 한다면 원전만큼 좋은 에너지원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 박군철 <그래도 원전이 답이다> 중에서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참사가 아직도 수습은커녕 향후 얼마나 끔찍한 재앙으로 확대될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 나라 ‘최고의 대학’이라는 국립대 교수가 늘어놓고 있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단지 에너지 기술로서 ‘원전’의 안전성에 대한 ‘견해 차이’의 문제가 아니다.

박군철 교수 같은 이에게는 앞으로 백년 가까이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되어 버린 후쿠시마 핵발전소 주변 마을들과 도호쿠 지역, 아니 경북 울진 같은 지역은 누군가의 ‘고향’이 아니다. 누군가의 노동과 삶, 땀과 눈물이 서려 있는 구체적인 ‘곳(장소)’이 아니다. 그에게 경북 동해안의 농촌과 어촌 마을들은 오직 “충분한 원자력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고 우수인력 조달에 필요한 우수한 교육시설, 좋은 조건의 접근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그래서 자신을 포함한 ‘전문가’들의 야심을 펼칠 만한 추상화된 공간, 철저한 익명의 공간일 뿐인 것이다.

나는 박군철 교수와 그 날 토론회에 발표자와 토론자로 참석해 “그래도 원전이 답”이라고 지껄인 전문가들에게 한 마디 묻고 싶다. “당신들 중 경북 울진―이미 세계 최고의 원전 밀집지역이다―에서 반경 30킬로미터(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 정부가 ‘거주불능’ 지역으로 인정한 최소범위) 이내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고등교육과 고향 지키기

청중 가운데서 한 부인이 일어나서 연단 위에 앉아있던 사람들에게 그들 중 과연 몇 명이 마아블 힐(1980년대에 핵발전소를 짓고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50마일 내의 위험권역 안에서 살고 있는지를 말해 보라고 요청하였다. 이 질문은 전술적으로 뛰어난 것이었다. 이것이 단상의 명사들에게 충격을 준 것이 분명했고, 그들은 그날 저녁의 발언 중에서 가장 짧고 솔직한 답변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없었다.” 훌륭한 보수를 받고 있으며 좋은 교육을 받았고 세상에서 성공한 그 중요한 사람들 중 단 한 사람도 마아블 힐에서 어떠한 치명적인 재난이 일어날 경우에도 자기 가족이나 재산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 웬델 베리 <고등교육과 고향 지키기> 중에서


미국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이며, 대학교수를 그만둔 뒤 농부가 된 탁월한 문명비평가 웬델 베리가 쓴 <고등교육과 고향 지키기>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당시 핵발전소가 건설되고 있던(그후 중단되었다) 마아블 힐이라는 시골마을에서, 핵발전소 건설회사인 ‘퍼블릭 서비스 인디애나사(社)’의 대표자들과 ‘원자력 조정위원회’ 위원들이 참석한 공청회의 한 장면이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장면은 전혀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는 지금 세계 도처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 “어디에서나 날마다 지역민들의 토착적 삶은 불편스러워지고, 거덜나고, 위협에 처해지거나 파괴되고 있는데, 이것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자행하는 나쁜 일의 나쁜 결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는 곳에 살고 있거나,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특권을 누리고 있는 힘센 사람들인 것이다.”

웬델 베리는 이러한 ‘야만적인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조건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출세주의’와 ‘고등교육’이다. 출세주의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향상을 방해하는 어떠한 장애물이나 장소도 허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끊임없이 위로 움직여가는” 태도이다. ‘야만적인 전문가’ 계급에 속하기 위해서는 ‘지역’에 대해서는 어떠한 애정도 갖지 않아야 하고, 절대로 지역민(풀뿌리)의 관점에 서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후쿠시마도 경북 울진도, 그런 ‘지역’을 자기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해서도 안 되고, 다른 누군가의 삶의 뿌리가 박혀 있는 고향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두 번째 조건인 ‘고등교육’은 바로 ‘야만적인 전문가’ 계급을 선발하고 특권을 부여하기 위한 일련의 험난한 전투과정이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은 끊임없이 고향을, 지역을, 이웃을 버리고 ‘떠나도록’ 강요받는다.

교육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키워낸다’는 것, 즉 젊은 사람들에게 책임있는 성숙성을 심어주고, 그들이 주어진 것(지역의 자연과 자원, 공동체―인용자)을 훌륭하게 돌보는 사람들이 되도록 돕고, 이웃 생명체들에 대하여 자애롭게 되도록 돕는 일을 말한다. 그러한 교육은 분명히 즐겁고 유익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교육이 잘 이용되려면 이것이 반드시 어떤 ‘곳’에서 이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것은 사람이 살고 있는 곳, 그리고 장차 계속하여 살려고 하는 곳, 즉 고향에서 이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기관들이 고향을 떠나도록 사람을 교육시킬 때 그들은 교육이란 것을 ‘출세준비’로서 재정의(再定議)한 것이다.
― 웬델 베리 <고등교육과 고향 지키기> 중에서


중간고사를 힘겹게 치르고 나서, 이번 주말에는 죽은 듯이 자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안쓰러워하는 동료 학부모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묻고 싶다. “우리는 혹시라도 고향을 버리고 떠나도록, 지역과 이웃을 경멸하도록 만드는 야만적인 전문가들의 교묘한 술책을 ‘교육’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변홍철 칼럼 8]
변홍철 / 물레책방 인문학연구실장, 전《녹색평론》주간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