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집 앞에 꽃 심겠다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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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홍철 칼럼] 4.11 총선, 풀뿌리의 생존과 민주주의를 위하여


"의병으로 나서는 기분"

나는 지난 한 주 동안, 경북 봉화와 영양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다가오는 4월 11일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대한민국 최대 면적의 선거구”인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선거구에 출마한 녹색당 후보의 선거운동을 조금이라도 도와 보자고 나선 길이다. 봉화장, 춘양장, 영양장 같은 닷새장에 후보가 선거유세를 오면 그것을 지원하고, 다시 후보가 울진이나 영덕으로 넘어가고 나면, 지역의 녹색당 당원들과 함께 연락사무소를 중심으로 주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활동을 한 것이다.

대개 10~15년 전, 도시의 번잡한 삶을 정리하고 봉화와 영양땅, 비교적 땅값이 싼 오지 마을로 귀농했던 이들이 녹색당에 많이 참여하고 있었다. 어렵사리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오직 조용히 땅에 엎드려 농사만 짓던 이들이, 생애 처음으로 정당에 가입하고 이렇게 선거운동에까지 뛰어든다는 것은 사실 보통 결심이 아니고서야 어려운 일이다. 몇 분에게 녹색당에 가입한 계기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모두들 비슷한 대답을 했다.

“그저 양심적으로 농사짓고 가족들 건사하는 데 자족하며 조용히 살아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평화로운 삶이 나 개인이나 가족의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핵발전소는 말할 것도 없고, 댐이다 스키장이다 송전탑이다 골프장이다, 어렵게 터 잡은 시골마을이 좀처럼 조용한 날이 없다. 농민들 먹고살기 어려운 것은 길게 말할 것도 없다. 한미FTA로 농촌과 소농이 완전히 몰락할 거란 건 이제 농민들이 더 잘 안다. 그런 데다가 온갖 난개발 사업들이 농촌마을 어느 곳 하나 남겨두지 않고 들쑤시고 결딴내려 한다. 한마디로 농촌 현실은 캄캄하다. 이런 일이라도 안 하면 이제는 끝장이라는 절박한 생각에 평생 처음으로 정당이란 델 가입했다. 내가 귀농하면서 꿈꾸었던 평화롭고 자족적인 삶도, 결국 제대로 된 정치 없이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떤 당원은 “마치 조선시대 말에 외세가 몰려오고 탐관오리들 학정이 극에 이르렀을 때 민초들 마음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 의병으로 나서는 기분으로 선거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라고 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워낙에 보수적인 지역이라 큰 변화를 당장에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명박 정부 이후 농촌의 민심에도 분명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귀띔해주는 분도 있다. “여기 사람들, 자기가 이명박 찍었다고 말하는 사람, 이제 아무도 없어요.”

"죽어가는 집 앞에 꽃 심겠다는 놈들은 찍어주마 안 된다!"

녹색당 후보 역시 농민이라 그런지, 비록 낯선 신생정당의 여성후보이지만, 만나는 주민들마다 대개는 호의적이다. (이따금 연세 많은 할머니들 중에는 그를 ‘박근혜’로 잘못 알아보고, “우짜든동 이번에는 되야 될낀데” 하며 손목을 붙드는 분들이 계셔서 주변 사람들이 함께 웃기도 하지만.)

춘양장. 전날은 하루종일 제법 많은 눈까지 내렸는데, 오늘은 바람 끝이 어느새 부드럽게 느껴지는 화창한 봄날이다. 이제 선거 종반으로 치닫는 상황, 약간 목이 쉰 후보가 선거유세용 방송차량 위에 올라 연설을 시작한다.

“저, 그동안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눈물 속에서 세상을 배우고, 이웃을 만났습니다. 대학시절, 판잣집이 강제철거당하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이웃들을 보며 울었습니다. 눈물을 닦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농촌으로 들어와 농사 지으며 많이도 울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농사구나, 한숨도 쉬었습니다. 하지만 눈물을 닦고 호미를 다시 쥐며 세상에 농사만큼 귀한 일은 없다는 것을 묵묵히 배웠습니다. 부녀회장으로 마을 살림 챙기며 또 울었습니다. 억울한 일, 서러운 일 앞에도 할 말 못하고 당하기만 하는 이웃들. 눈물을 닦고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억센 딸, 당찬 며느리가 되어 따질 것은 따지고, 싸울 일은 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와 식구들이 어렵게 뿌리내린 영덕에 위험천만한 핵발전소가 들어설 거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더 이상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웃들과 의논하고 힘을 모아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리고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후쿠시마 어느 마을, 저처럼 딸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쓴 글을 읽고 저는 한없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눈물을 닦고, 어금니를 깨물고, 다시 팔을 걷어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땅을 제2의 후쿠시마로 만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이들에게 오염된 땅과 바다를 물려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농촌과 어촌이 죽어버린 나라를 물려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후보의 연설이 공약에 관한 대목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 한 분이 방송차량 옆에 서 있는 내게 다가오시더니 다짜고짜 물으신다. “이 후보는 공약이 먼고?” 나는 지레, 여당 지지자인 어르신이 시비를 걸려고 하시나 보다 사뭇 긴장을 하고, 나름대로 또박또박 녹색당 후보의 주요공약을 설명했다. 내 설명을 다 듣고 난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요지는 이렇다. “이번 선거에서는 댐 짓겠다, 길 내겠다, 다리놓겠다 카는 놈들은 찍어주마 안 된다. 전부 국민들 낸 세금으로 그런 일 자꾸 벌이봤자, 농민들한테 덕 되는 거 하나도 없더라. 지금 농민들이 한미FTA로 다 죽게 됐는데, 죽어가는 집 앞에 꽃 심겠다는 놈들, 찍어주마 안 된다. 가마이 놔두마 우리는 대대손손 다 묵고 살 수 있다. 그냥 가마이 놔두마 된다.”

"어질고 소박한 이웃들과 함께"

죽어가는 집 앞에 꽃 심겠다는 자들! 자신들의 기득권을 끊임없이 연장하기 위해 온갖 토건사업들로 풀뿌리의 생존과 민주주의를 짓밟는 자들의 본질을 이보다 더 날카롭게 갈파할 수 있을까.

후보의 연설이 계속되고 있다. “이제 저를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신 어질고 소박한 이웃들과 함께, 활짝 웃는 지역을 만들겠습니다. 더 이상 핵발소는 안 됩니다. 영덕 등 신규 핵발전소 부지 선정을 철회시키겠습니다. 영양댐, 달산댐, 대규모 풍력단지, 초고압 송전탑 등 자연을 망가뜨리고 주민들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개발사업을 몰아내겠습니다. 2030년까지 핵발전에서 벗어나도록 ‘탈핵 및 에너지전환 기본법’을 반드시 제정하겠습니다. 그리고 농민과 어민은 그 누구보다도 존경받아야 합니다. 농민과 어민들을 못살게 하는 한미FTA를 폐기시키고, 농수축산물 개방을 막겠습니다. 농민들이 마음놓고 농사지으며 농촌을 지킬 수 있도록 ‘농민기본소득’을 반드시 지급하겠습니다……”

죽어가는 집 앞에 꽃 심겠다는 놈들은 절대로 찍어주면 안 된다던 노인이 구부정한 허리를 애써 펴고, 후보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과연 녹색당 후보의 저 호소와 약속은 얼마나 많은 경북의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낼 수 있을까? 녹색당의 도전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쉽게 점치기도, 장담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다만 오는 4월 11일, 이 땅의 유권자들이 ‘풀뿌리의 생존’과 ‘민주주의’를 위한 현명한 선택을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엎드려 청하는 도리밖에는 없다. 그리고 녹색당을 비롯한 정당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한 다음, 겸손하게 결과를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연설을 듣고 다시 장터의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이번에는 어디 멀리서 장터 구경이라도 왔는지 젊은 부부 둘이서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화창한 햇볕을 받으며 지나간다. 시끌벅적한 춘양장 풍경 속에서 잠시 나는 망중한에 빠져 권정생 선생의 소설 <한티재 하늘>의 몇 대목을 떠올렸다.

폭풍이 치고 억수비가 쏟아져도 날씨가 개이면 만물은 다시 햇빛을 받아 고개를 들고 잎을 피우고 꽃봉오리를 맺듯이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살아있는 것은 그렇게 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천지가 뒤흔들리고 난리가 나도 세상에는 아기가 끊임없이 태어났다. 조선의 골짝골짝마다 이렇게 태어나는 아기 때문에 모질게 슬픈 일을 겪으면서도 조선은 망하지 않았다. 그 아기들은 자라서 어매가 되고 아배가 되고 할매, 할배가 되었다. 참꽃이랑 산앵두꽃이 피어나는 들길로 그 애들이 손잡고 노래 부르고 있었다.






[변홍철 칼럼 12]
변홍철 / <하이하버연구소> 소장, 전《녹색평론》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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