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착기에 몸 묶어 송전탑 막는 '밀양' 할머니들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13.05.2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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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드리마을> '89호기' 현장 / 새벽 3시부터 저녁 7시까지 대치..."살기 위해 싸운다"


굴착기에 몸 묶는 김수암 할머니(2013.5.25.밀양 바드리마을 송전탑 공사장)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굴착기에 몸 묶는 김수암 할머니(2013.5.25.밀양 바드리마을 송전탑 공사장)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25일 새벽 3시 경남 밀양시 단장면 바드리마을 백마산. 단장면 동화전마을에서 40년째 살고 있는 김수암(71) 할머니는 송전탑 공사를 막기 위해 어두컴컴한 산길을 올랐다. 지팡이를 짚고 1시간 걸어 '89호' 송전탑 공사 예정지에 도착했다. 벌목이 진행된 흙더미에 가방과 돗자리를 내려놓고 굴착기 2대가 나란히 놓인 장소에 주저앉았다. 한국전력공사 직원과 공사장 인부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굴착기에는 '위험 들어가지 마시오', '반경내 접근금지'라고 적힌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개의치 않고 기름으로 까맣게 변한 굴착기 바퀴 속 좁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준비해 온 밧줄을 꺼내 목과 팔에 두르고 굴착기 아래 구멍에 연결했다. 어깨에 묶인 줄을 당겨 다시 목에 감고 "떨어지지 않도록 단디하라"고 다른 할머니들에게 일렀다. 곽동철(80) 할머니는 "줄을 놓고 왔다"고 울상을 지었다.

새벽 5시 30분. 굴착기 사이에 자리를 잡는 할머니들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새벽 5시 30분. 굴착기 사이에 자리를 잡는 할머니들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89호에 배정받은 5명의 70-80대 할머니들은 "같이 묶으면 된다. 걱정마라"고 입을 모았다. 새벽 6시. 할머니들은 굴착기에 기대서 해 뜨는 모습을 봤다. 깊게 팬 주름에 그늘이 졌다. 내내 줄을 매고 있던 김 할머니는 깁스한 왼팔이 아픈지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주물렀다. 인대파열로 수술을 받아 안정을 취하던 중 지난 20일 송전탑 공사가 재개돼 한전 직원들에게 저항하다 통증이 재발한 것이다.

"이웃들은 싸우다 병원에 실려 가고 서방은 철탑 막는 꼴도 못보고 세상을 떴다. 경찰은 줄 자르려고 내 몸에 칼을 들이밀고 한전은 내가 밑에 있어도 굴착기 시동을 건다. 사람이 있는데, 사람이 살고 있는데 신경도 안 쓰더라. 두렵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김 할머니는 끝낸 눈물을 흘렸다.

"두렵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물 흘리는 김 할머니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두렵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물 흘리는 김 할머니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60년째 단장면에서 살고 있는 이차순(80) 할머니는 "살기 위해 싸운다. 여기서 농사 지어 먹고 살아야 된다. 조상한테 받은 땅 고스란히 자식한테 물려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철탑이 그리 좋으면 한전 사장 동네에 지으라"며 "나는 싫다. 조용히 농사짓고 살고 싶다. 안되면 공사장에서 눈 감을 거다. 지금 죽으나 송전탑 들어와 죽으나 똑같다. 항상 끝을 생각하고 있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밀양 송전탑 공사가 8개월 만에 재개돼 한전과 주민들이 마찰을 빚고 있다. 지난 18일 한전은 "동계 전력수급 위기 때문에 공사 재개가 불가피하다"는 대국민호소문을 발표하고 20일 공사를 강행했다. 첫날부터 7백여명에 이르는 경찰병력과 한전, 시공사 직원을 6개 송전탑(84, 85, 89, 109, 124, 127호기) 공사 예정지인 바드리마을과 평밭마을, 고례마을, 도곡마을, 여수마을 공사장에 투입시켰다.

'반경내 접근금지'...굴착기를 둘러싼 동화전마을 할머니들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반경내 접근금지'...굴착기를 둘러싼 동화전마을 할머니들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는 당일 성명을 내고 "재개는 명분도 정당성도 없다"며 ▷송전탑 공사 중단 ▷지중화 공사 시행 ▷공권력 투입 중단 ▷전문가협의체 구성을 촉구했다. 10명씩 조를 이룬 주민들은 새벽 3시부터 저녁 7시까지 산에 있는 공사장에 머무르며 몸을 밧줄과 쇠사슬로 장비에 묶거나 '소똥 수류탄'을 만들어 공사를 저지하고 있다. 20일에는 '알몸 시위'를 하다 실신해 병원으로 옮겨진 할머니도 있는가 하면 평밭마을 주민들은 유서까지 쓰고 농성장에 나가고 있다.

26일까지 60대 이상 할머니와 할아버지 16명이 쓰러지고 부상을 당해 병원에 후송됐으며 현재 7명이 밀양과 부산에 있는 병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25일에는 환경운동연합과과 녹색당 등 여러 단체가 참가하고 있는 '탈핵희망버스' 참가자 250여명이 4개면 공사장으로 흩어져 주민들을 지지방문 했다. 한전은 25일 하루 공사를 중단하고 26일 공사를 재개했다.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의 인사 시간 할머니들이 모처럼 웃음을 되찾았다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의 인사 시간 할머니들이 모처럼 웃음을 되찾았다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박호야(66) 대책위원장은 "8년을 싸워왔다. 아름다운 밀양의 산천을 지키며 살던 곳에서 계속 살고 싶을 뿐이다"며 "보상도 필요 없다. 공사를 중단하든지 지중화를 원한다"고 했다. 이선옥(48) 동화전마을 부녀회장은 "지금 제일 걱정되는 점은 힘이 없는 어르신들이 경찰이나 한전 직원과 물리적 충돌 때문에 다치는 일"이라며 "매일 매일이 전쟁이다. 이 사태가 너무 두렵다"고 말했다.

탈핵희망버스를 타고 25일 공사장에 도착한 이보나 대구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한전은 동계 전력수급 위기 때문에 공사를 강행한다 말하지만 신고리3호기 전력 공급력은 전체 전기 2%도 안된다"면서 "왜 이 책임을 밀양 어르신들이 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철탑이 들어서면 발생하는 환경파괴와 건강, 농사 피해는 돈으로도 보상이 안된다. 당장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벌목 된 89호기 공사장. 새벽부터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도착했다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벌목 된 89호기 공사장. 새벽부터 탈핵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도착했다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앞서, 2006년 한전은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전기를 창녕 북경남변전소까지 보내기 위해 90.5km에 이르는 송전선로를 연결하는 공사에 들어갔다. 또, 밀양 52기를 포함해 울산, 부산 등에 모두 161기의 송전탑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주민 반대로 벌목만 진행됐을 뿐 8년째 공사가 완료 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월에는 삼외면 보라마을 주민 이치우(74)씨가 공사에 항거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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