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 이름으로…”식으로 정치인들은 입만 벙긋하면 국민을 내세운다. 마침 150주년을 맞은 제 16대 미국대통령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이 최근 여의도에서 아전인수 격의 패러디 바람을 일으켰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여야가 생각하는 ‘국민’이란 말의 대상이 전혀 다르다. 서로 내세우는 기준은 지역 · 연령대와 함수관계가 있다. 그러면 이런 지역 · 연령대별 정치적 성격에는 미래지향(未來指向)이란 점에서 어떤 함의가 있을까?
여론조사기관인 리서치뷰가 지난 11월 30일과 12월 1일의 이틀 동안 전국 성인 휴대전화가입자 1천명을 대상으로 정례조사를 실시한 현 정부의 지지도 조사결과 지역별로는 영남, 연령대별로는 고령자들의 지지도가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높았다. 여야가 판단하는 국민은 이처럼 지역과 연령대별로 뚜렷이 구분된다. 이런 지역 · 세대 간의 뚜렷한 분리현상은 응당 그르려니 하고 적당히 넘겨버릴 일인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관련 기사 :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 하락..."5월 이후 최저")
먼저 연령대의 문제를 보자. 급변하는 세상에서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은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다. 고령자들은 정보화 사회에서 ‘낫 놓고 기역자 모르는’ 문맹자가 되기 일쑤다. 젊은이들도 따라잡기 어려운 정보화의 속도에 나이든 늙은이들이 제대로 적응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변화를 아예 외면해버리거나, 세상이 그렇게 빠르게 변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일일 수밖에 없다.
오복의 으뜸이었던 장수에 대해 축복이 아니라는 의견이 상당히 많이 나오듯, 나이 든다는 사실은 날이 갈수록 상당히 힘겨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죽음이 가까워진다거나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변화의 스탠스에 스텝을 맞추기 어렵다보니, 세상살이가 갈수록 힘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젊은 세대들이 보는 오늘의 노인상은 상당히 부정적이다. 노인들을 세상의 정상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각계의 시국선언에 맞불을 놓는 어르신들의 어쭙잖은 풍경을 보는 젊은이들의 시각도 그렇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20여년 전에 미국 명문대에서 유도를 가르치고 있던 동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어른을 공경해야한다고 말했더니, 학생들이 왜 그래야 되느냐고 묻더란다. 그분은 한국에서 배운 대로 그냥 말했을 뿐인데, 미국 학생들이 진지한 태도로 그 이유를 따지는 바람에 매우 놀랐다고 했다. 오늘의 우리나라가 그런 상황이 아닐까싶다. 왜 어른은 공경의 대상인지를 물어왔을 때 우리도 점점 대답을 찾기가 막연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일부 정치권이 부추기기까지 하는 지지도 지역편중의 딜레머는 어떤가? 보수의 텃밭을 자임하는 대구 · 경북을 예로 들어보자. 이지역이 우려할 수준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은 외지인들의 공통된 비판이다. 최근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철도노조의 민영화반대투쟁에 대구시민들이 파업을 지지하고 민영화반대 현수막들을 내걸어 화제가 되고 있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대구에서 어찌 그런 일이 생기느냐는 뉘앙스를 풍기는 기사였다.
원고 권영길과 피고 매일신문의 최근 명예훼손송사(매일신문은 권영길 전의원에게 5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고 정정보도문을 게재하라는 대법원 판결)는 수구꼴통시비를 둘러싼 다툼이었다는 점에서 지역언론의 발자취에 남을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지역 · 세대 간의 갈등이 날이 갈수록 깊어진다면 국민 대 국민의 대결양상이 점점 심화될 수밖에 없다. 정치에서 지역적 기반과 연령대가 오늘처럼 두드러지게 부정적적인 함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권이 외치는 ‘국민’은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되고 연령층도 다양할수록 좋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이런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 · 사회적 개선책에 대한 논의는 하루라도 뒤로 밀쳐둘 수 없는 과제다.
[김상태 칼럼] 28
김상태 / 언론인. 전 영남일보 사장.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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