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에서 시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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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스스로 주인이 되는 시민,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6·4 지방선거와 관련해서 다양한 진단과 평가가 나오고 있다. 곳곳에서 환호와 분노가 교차하고 있다. 세월호의 참사에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라며 시민들의 무력함에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고 역시 선거의 여왕이라며 박근혜를 연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역주의 극복을 내세운 특정 후보의 경우 ‘아름다운 패배’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지만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지방선거 하나로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는 현실론도 있었고, 미래세대를 위한 희망이 없다는 비관론도 있었다.

여러 진단과 평가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번 선거의 결과를 한마디로 ‘두 거대 정당의 고착화와 진보 정당의 궤멸’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만큼 진보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정서는 무관심했고 냉소적이었다. 통합진보당과 정의당의 정당지지율은 반토막이 났고, ‘2%대 득표’를 목표했던 노동당과 녹색당은 각각 0.62%와 0.55%에 그쳤다. 무엇보다 ‘진보정치 1번지’로 불렸던 울산은 시장과 5개 기초단체장, 선출직 시의원 19명을 새누리당에 싹쓸이 당했다. 거기다 진보정당은 기초단체 226곳에서 단 한명의 단체장도 배출하지 못했다. 이것이 이번 선거를 통해 드러난 진보정당의 현주소다. 이런 결과에는 시민들의 정치적 의식의 보수화도 한 몫 했겠지만 무엇보다 진보의 정치적 의제를 점령당한 진보정치의 무기력이 더 컸을 것이다.

그나마 우리에게 한 가닥 희망의 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보를 표방한 교육감의 대거 당선이다. 이에 대한 여러 분석과 진단이 가능하겠지만 어쨌거나 진보 성향의 교육감들은 보수 성향 교육감들의 내부 분열을 틈 타 단일대오를 형성했고, 무상급식, 혁신학교 등 교육 분야에서 대안세력으로서의 역량과 성과를 시민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진보정치의 방향, 즉 진보정치의 책임과 역할을 일부 인정했다고 할 수 있다. 미래세대의 삶에 대한 기성세대의 고민의 흔적이다. 한 가닥 희망의 불꽃이 발화할 수 있는 지점은 남겨 둔 셈이다.

우리는 시민들의 양가적 감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시민이 바라는 진보정치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이념 투쟁이 아니라 바로 시민들의 생활세계로 파고 들어가 몸이 부서지도록 혼신을 다해 봉사하라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언제든지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무언의 응대는 아닐까. 여기에 진보정치의 어려움이 있다. 도덕성과 이념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진보정치가 일상적 삶에 매몰된 수동적이고 비자발적인 시민들의 마음을 얻기 어려운 이유다. 진보정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가끔 도덕성을 잃거나 이념적 가치를 버리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해서 필자는 진보정치에 부탁하고 싶다. 만일 진보정치를 재구성하고 싶다면 다시 생활정치로 되돌아가라고. 거기서 진보정치의 ‘어떻게’를 찾고 다시 시작하라고.

왜 생활정치인가? 그것은 현재 사회체를 경쟁 원리로 가득 채우고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을 사회에서 배제해 가는, 즉 시민들의 생활세계를 식민화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 때문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흔히 공공 부문의 축소, 공공 부문의 민간 부문으로의 이관, 규제 완화, 시장 원리 중시와 같은 경제정책을 중시하는 이데올로기로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이 정도에 멈추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원리는 시장 논리를 전체 사회체에 철저하게 관철시키기 위해 국가가 법적 개입을 통해 제도적 틀을 형성하는 국가 개입의 원리이다. 이명박 정권부터 현 정권이 어떤 원리를 금과옥조로 삼아 통치했고, 통치하는지를 새삼스럽게 입에 담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현재 우리사회에 전면화된 신자유주의의 권력은 학교, 감옥, 군대 등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규율 권력처럼 규범이나 특정 가치의 내면화를 통해 순종적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원리를 내면화한 ‘자기-경영’의 주체, 즉 조작 가능하고 통치 가능한 주체를 형성하고, 그런 주체 형성 모델에 적응할 수 없는 개인들을 가차 없이 사회 바깥으로 내던져 버린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 권력은 사회체의 모든 국면을 시장화하고 위험을 관리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환경에 개입함으로써 통치를 행하는 권력이다. 이런 신자유주의의 통치에서는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인 주권을 생산한다. 경제성장만이 국가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며, 이때의 정치적 심급은 자율성을 상실하고 경제에 침식당한다. 심지어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사회체의 기초적 구성단위를 기업이라는 형태에서 찾고 마침내 사회체를 기업이라는 형태로 뒤덮어 버리려고 한다. 사회적인 모든 것의 기업화.

이런 통치 하에서 자신들의 생활세계가 식민화된 시민들은 수동적이고 비자발적이며 무비판적으로 ‘자기-경영’ 주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민주주의 담론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시민은 민주적 참여와 자율적 통치에 걸맞는 능력, 역량, 의식, 주체성을 장착하고 있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자신의 이해관심에 따라 행동하고, 타인과 연대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 시민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혹시 자신이 당하는 착취와 불평등에 저항하지 않고, 자신의 이해관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며, 완전히 공개된 정치적 장에 참여하지도 않는 주체들은 아닌가? 시민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개인이 온전한 시민으로서 자신의 이해관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개인이 자신의 발전에 관심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시민이 아니라 신민일 뿐이다. 타인의 권력이나 권위에 종속되는 것은 민주적인 시민성에 반하는 것이다. 스스로 통치하는 시민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역량과 권력을 가지며, 자신의 집합적 이해, 욕망, 목표에 따라 행동한다. 신민이 외적 강제에 따라 처신한다면, 시민은 자신을 위해 권력을 행사한다. 시민은 자기 자신의 주인인 것이다. 개인은 누구나 권력에 종속되는 동시에 스스로의 주인이다. 그러나 개인이 시민이 될지 신민이 될지는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가 아니면 권력에 종속하는가에 달려 있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스스로 주인이 되는 시민으로서의 개인을 키우고 만들며 아끼고 보호하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평화뉴스 이재성 칼럼 51]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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